[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부여군(군수 이용우)과 (재)백제고도문화재단(원장 박종만)이 지난 4월부터 발굴조사 중인 부여 구드래 일원(명승 제63호)내 유적과 부여 서나성(사적 제 58호)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구드래 빙고재 일원에서 백제 시대 빙고와 조선 시대 빙고가 확인되었다. 그동안 발굴된 백제 시대 빙고로는 한성 도읍기의 연기 나성리유적, 웅진기의 공주 정지산유적 빙고가 확인된 바 있으며 이번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빙고는 백제 사비기 빙고로 확인되었다.
* 빙고(氷庫): 얼음을 보관하였던 창고. 빙고재는 빙고가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핑고재’라고도 부름
▲ 백제시대 빙고(왼쪽), 조선시대 빙고
또한, 조선 시대 빙고는 목조 빙고로 홍성 오관리 유적에서 확인된 조선 시대 빙고와 형태와 규모 면에서 상당히 비슷하다. 이 빙고는 조선 전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18세기 이후에 들어서면 석빙고의 형태로 변화하게 되어 빙고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 자료이다.
빙고는 얼음을 저장하는 직사각형의 구덩이와 얼음물을 내보냈던 배수로로 구성되었다. 백제 시대 빙고의 얼음저장 구덩이 규모는 7.2×4.7m이며, 깊이는 1.9m이다. 구덩이의 바닥은 가운데가 낮아지도록 오목하게 조성하였으며, 가운데에 배수로로 연결되는 T자형의 물 유입부를 조성하였다. 배수로의 현존길이는 4.6m, 너비는 0.7m, 깊이는 0.7m이다. 배수로는 구덩이를 판 후 측벽을 세우고 덮개돌과 토기 조각을 넣어 밀봉하였으며 구덩이를 팠던 흙으로 배수로 상부에 다시 되메우기하였다.
▲ 조선시대 빙고 발굴경과
조선 시대 빙고의 얼음저장 구덩이의 규모는 16.4m(확인 길이)×6.0m이며, 양 측벽에 직사각형의 자른 돌을 쌓아 축조하였다. 배수로의 잔존 길이는 17.3m, 깊이는 0.4m이며 바닥석을 깔고 측벽석을 세운 뒤 덮개돌을 덮었으며, 안는 물에 의한 점토와 모래가 켜켜이 퇴적되었다.
* 현재 유적의 잔존 규모를 통해 부피를 계산해보면 백제 시대 빙고는 약 48㎥, 조선 시대 빙고는 약 100㎥ 정도로 빙고 안에 얼음을 가득 넣을 경우 15t 트럭으로 백제 시대 빙고는 최소 5차 분량, 조선 시대 빙고는 약 10차 분량이 필요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조사 대상지 일대는 옛 관아가 있던 마을로 빙고재와 장승배기(鶴峴, 장승이 있던 곳), 구드래(큰 나라)등의 고유땅이름이 남아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만든 특수지형도와 1998년도에 만든 지도에서도 빙고리(氷庫里), 빙고재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 후기(영조 연간~헌종 연간) 편찬된 《충청남도읍지(忠淸南道邑誌)》에 “현내면 빙고리는 관아에서 서쪽으로 1리(약 400m) 떨어져 있다(縣內面 氷庫里自官門西距一里)”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빙고가 있을 가능성이 큰 곳이었다.
▲ 발굴현장 전경
▲ 1915년 만든 특수지형도(왼쪽), 2008년도 만든 1/5,000 수치지형도
이번 발굴 결과에 대한 현장 설명회가 오는 12일 오전 10시에 발굴현장에서 개최된다.
* 발굴현장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구교리 86-1번지(부여 구드래 일원)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구교리 130-17번지 일대(부여 서나성 유적)
부여군과 백제고도문화재단의 발굴조사를 통해 이번에 확인된 빙고는 부여 구드래 빙고재와 관련하여 고유지명과 문헌기록을 증빙하는 유구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백제와 조선 시대 빙고가 한꺼번에 확인되는 획기적인 발굴성과를 거두었으며, 앞으로 추진될 부여 구드래일원과 서나성의 문화유적 정비 기본계획 수립과 함께 사비도성 내의 백제와 조선 시대의 얼음 저장시설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