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청백리였던 조선 중기 문인 설봉(雪峯) 강백년(姜栢年,1603~1681년)은 1628년(인조 6년) 1월에 종4품 “조봉대부로 승품한다.”는 교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교지 뒷면에 보면 “이리(吏吏) 심기(沈麒)”라는 글자가 작게 적혀 있지요. 여기서 '이리'는 조선시대 인사를 담당했던 ‘이조’의 맨 아랫자리에서 실무를 보는 아전을 말하고 '심기'는 그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내리는 문서에 감히 말단 서리의 이름이 낙서처럼 쓰인 까닭이 무엇일까요?
▲ 1628년(인조 6년)에 내린 강백년(姜栢年)의 승품 교지(왼쪽), 아전 심기(沈麒)의 이름이 쓰여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전경목 교수 제공)
조선시대의 벼슬아치들이 윗자리로 오르기란 매우 어려웠습니다. 평생 미관말직에 머무르다 생을 마치는 경우도 흔한 일이었지요. 그래서 벼슬이 오르려면 능력도 중요하지만 로비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인맥도 없는 지방의 미관말직 벼슬아치들은 로비하기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지요. 그래서 이들은 이조나 병조의 서리들에게 줄을 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정해진 녹봉이 없었던 서리들은 이들에게서 수수료를 챙기는 대신 인사와 관련된 각종 자문은 물론 벼슬자리 청탁까지 받았는데, 이때 교지가 내려지면 뒷면에 자기 이름을 써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지요.
이들은 소속 기관별로 '이리' '병정리' 등으로 불렸는데 친한 사이였을 땐 '단골(丹骨)' '단골리'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1893년(고종 30년)에 내린 황우영 통훈대부(정3품) 교지에는 '단골 김중섭'이라고 쓰기도 했지요. 그런 단골리들은 심지어 녹봉도 대신 받기도 했는데 이것이 바로 뇌물인 셈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사가 적체되면 금품이 오가는 로비가 있게 마련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