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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는 공연과 전시

화훼영모화를 통해 만나보는 옛 사람들의 생각과 삶

<간송문화전> 5부 “화훼영모_자연을 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화훼영모”란 꽃과 풀, 날짐승과 길짐승을 일컫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동식물들을 소재로 하는 그림을 “화훼영모화(花卉翎毛畵)”라 한다. 조선시대 화훼영모화는 산수화나 인물화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우리 선조들은 꽃과 새, 곤충과 물고기들도 자연의 일부임과 동시에 우주만물의 섭리가 함축된 존재로 알고 있었다. 이를 보고, 기르고, 글과 그림으로 옮겨내면서 자연과 생명의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고, 자신의 성정을 닦고자 했다. 또한 동식물들을 통해 도덕적 이상과 더불어, 무병장수나 입신출세 등과 같은 현세적 욕망을 담아내곤 했다.

 

   
▲ 향원익청(香遠益淸: 향기는 멀수록 맑다), 강세황(1713-1791), 지본채색, 115.5×52.5cm(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 황묘농접(黃猫弄蝶: 노란 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다), 김홍도, 지본채색, 30.1×46.1cm(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이 화훼영모화 전시가 오는 3월 27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배움터 2층 디자인박물관에서 간송미술문화재단, 서울디자인재단, SBS 공동 주최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공민왕으로부터 신사임당,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표암 강세황, 혜원 신윤복 같은 고려 말에서 조선말까지 500여 년 동안 당대를 대표할만한 화가들이 동식물을 소재로 그려낸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화훼영모화는 가장 쉽고 재미있게 다가갈 수 있는 그림 가운데 하나로 낯설고 어렵게만 여겨지는 우리 옛 그림과 친숙해 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나아가 우리 그림이 지닌 아름다움과 그림 속에 담긴 선조들의 이상과 욕망, 삶의 지혜까지도 엿볼 수 있으리라.

전시장에 들어가면서 맨 먼저 보는 대표작 “향원익청(香遠益淸: 향기는 멀수록 맑다, 강세황, 지본채색, 115.5×52.5cm”에 나는 푹 빠진다. 나이 61살이 되어서야 처음 벼슬길에 올라 한성판윤까지 지낸 표암 강세황, 그는 이 작품에서 끝 부분이 붉은 색깔을 띈 백련 몇 송이와 연잎 하나를 차지한 개구리 한 마리를 그려 관람객의 마음을 훔친다. 진흙 속에서 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요사스럽지 않은 연꽃을 우리는 멀리서 바로보아야 한다.

 

   
▲ “군원유희(群猿遊戱, 곧 뭇 원숭이들이 장난치다), 정유승(鄭維升, 1660~1738), 자본담채, 29.5×47.3cm(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 과전전계(瓜田田鷄: 오이밭의 참개구리), 정선, 견본채색, 30.5×20.8cm(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 훤원석죽(萱菀石竹: 원추리꽃과 패랭이꽃), 신사임당, 지본채색, 41.0×25.7cm(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향원익청을 뒤로 하고 돌아보는 내게 병신년 원숭이해에 눈이 끌리는 작품 하나가 보인다. 생소한 이름의 취은(醉隱) 정유승(鄭維升, 1660~1738)이란 서화가의 작품 “군원유희(群猿遊戱)” 곧 "뭇 원숭이들이 장난치다"가 그것이다. 이번 작품은 여덟 마리 원숭이가 각자의 모습으로 서로 어울려 논다. 어떤 놈은 제 머리를 긁기도 하고, 어떤 녀석은 사타구니를 벌리거나 남의 머리를 만지고 제 발가락을 만지기도 한다. 심지어 둘이 어울려 곤충 하늘소를 실에 꿰어 놀리기도 하는 모습은 압권이다. 실감나게 묘사한 원숭이 얼굴 표정이 참 재미나다.

이밖에 작품들을 보면 “훤원석죽(萱菀石竹: 원추리꽃과 패랭이꽃, 신사임당, 지본채색, 41.0×25.7cm), 과전전계(瓜田田鷄: 오이밭의 참개구리, 정선, 견본채색, 30.5×20.8cm), 황묘농접(黃猫弄蝶: 노란 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다, 김홍도, 지본채색, 30.1×46.1cm), 자웅장추(雌雄將雛: 암수탉이 병아리를 거느리다, 변상벽, 지본채색, 30.0×46.0cm) 등도 있다.

국보급 문화재들이 골동품 상점에서 헐값에 거래되고 있었던 일제강점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20대 초반에 십만석꾼이 된 간송 전형필 선생은 우리민족 문화유산을 지켜내는 것을 자신 일생의 사명으로 삼았다. 우리 민족의 뛰어난 문화와 역사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조상이 남긴 문화재뿐이기 때문이다. 간송선생은 그렇게 수집한 문화재들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 보화각(葆華閣)을 1938년에 설립하였고, 지금은 간송미술관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 자웅장추(雌雄將雛: 암수탉이 병아리를 거느리다), 변상벽, 지본채색, 30.0×46.0cm(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 <간송문화전> 5부 “화훼영모_자연을 품다”를 보는 관람객들

 

성북동에서 1년에 두 번, 각각 2주씩만 전시를 해오던 간송미술관이 2014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소장품들을 전시하면서 우리는 더 자주, 더 오래 간송의 ‘문화보국(文化保國)의 정신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지난해 열린 간송문화전 1부는 ‘간송 전형필,’ 2부는 ‘보화각’ 이라는 주제로 각각 꾸며졌고, 소장품들중 《훈민정음》, 《원전신첩》, 《촉잔도권》등 주요 명품들이 전시되었다. 3부 ‘진경산수화’ 전시에는 우리 강산 고유의 아름다움을 사생한 진경시대 산수화들이 주를 이루었고, 지난해 10월에 마친 4부전시는 ‘매.난.국.죽.’을 주제로 군자의 성품과 몸가짐을 연상케 하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서화들이 대거 출품되었다.

 

 

간송 할아버님께서 물려주신 문화유산 사랑, 정말 커
[
대담] 간송미술문화재단 전인건 사무국장
 

   

▲ 대담을 하는 간송미술문화재단 전인건
사무국장

- 이번 전시는 공민왕, 신사임당, 윤두서, 정선, 김홍도, 강세황, 신윤복 등 내로라하는 화원들의 작품이 걸렸습니다. 모든 작품이 대단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특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네 굳이 고른다면 이번 전시에 대표작품으로 내놓은 표암 강세황의 <향원익청(香遠益淸: 향기는 멀수록 맑다)>을 먼저 꼽고 싶습니다. 이 그림의 주제는 백련인데 끝 부분만 자주색에 가까운 붉은 빛을 띈 희귀한 연꽃에 개구리도 한 마리 있고, 귀뚜라미도 한 마리 그려 한 폭에 자연을 다 담아놓은 정말 정감이 가는 작품이지요.

그런데 하나 더 꼽자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창강(滄江) 조속(趙涑)이란 분의 작품인 <고매서작(古梅瑞鵲)>입니다. ‘묵은 매화나무에 앉은 상서로운 까치’라는 뜻의 이 작품은 문인화의 문기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것은 물론 매화의 구도도 정말 아름답고 붓질 몇 번으로 터럭을 잘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새해와 매화가 핀 봄을 맞아 기쁜 소식을 들려주는 까치를 마주하는 것은 관람객들에게 좋은 의미를 줄 수 있지 않을 까 합니다.“

- 간송 선생님은 후손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대신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는데 거의 전 재산을 다 쓰셨습니다. 그런 선조를 바라보는 사무국장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어렸을 때 기억나시는 일화도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세상은 돈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간송 할아버님께서 후손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으셨지만 대신 다른 면으로 큰 부를 물려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유산에 대한 사랑을 물려주신 것은 그 어느 것과 견줄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라 믿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님과의 일화는 없습니다. 다만, 아버님을 비롯하여 주변의 많은 분들께서 할아버님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간송께서는 당시 일제강점기라는 냉혹한 시절이기에 그런 선택을 하셨을 것이고, 훌륭한 스승을 모신 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을 들자면 할아버님께선 우리나라가 독립될 거라는 믿음을 굳게 가졌고 나중에 독립이 되더라도 우리의 문화유산을 일본에게 다 뺏긴다면 껍데기 독립이 될 것이란 걱정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재산을 쏟아 부어서도 문화유산을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한 가지를 전해들은 일화를 들자면 아버님이 어렸을 적에 그림을 그리시다가 아이들과 놀러나갔는데 간송께선 물감과 붓을 그대로 두고 나간 것을 보고 아무 말 없이 붓을 빨아 두고 물감을 정리해두셨다고 합니다. 돌아와서 그것을 본 아버님께서는 꾸중을 들은 것보다 훨씬 무서웠을 것입니다. 그 뒤 아버님은 그림 공부를 더 철저하게 하셨고, 지금도 붓을 빨고 물감을 정리하는 것은 아무에게도 시키지 않고 손수 하시는 것은 그때 할아버님의 가르침 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그동안 간송미술관은 좀 턱이 높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곳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대중 기획전도 상설 전시 비슷하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간의 비판은 이제 해소가 된 것인지요?

저희 간송미술관 보화각 자체가 1938년 지어져 오래된 건물이라는 점, 그리고 지어졌을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많은 관람객들을 예상하고 건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대중적인 전시 자체가 참 어려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다른 박물관처럼 자유롭게 전시하기도 어려웠고 따라서 턱이 좀 높다는 비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실 저희는 미술관박물관법에 의한 정식 미술관이 아니고 연구소입니다. 법대로 하려면 한 해에 300회 이상 전시를 해야 하는데 저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리고 정식으로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설립된 것도 2년밖에 안됐습니다. 그 전에는 단순히 유물의 보존과 연구를 위한 사적인 공간일 수밖에 없어서 이용하시는 분들에게 다소 불편이 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저희도 재단이 설립되고 예전보다 운영의 체계를 갖추려 하고 있기에, 관람객들에게 보다 친절한 간송미술관이 되기 위해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또 전시공간이 넓고 쾌적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전시를 하고 있는 것 역시 좀 더 일반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서기 위한 노력의 하나임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중장기계획으로 성북동에 상설전시관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때까지는 어쩔 수 없는 약간의 몸살은 견뎌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상설전시관을 짓기까지는 인허가 부분과 재원 마련이 관건이긴 합니다. 그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지켜보시고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지난해 간송미술문화재단에서 교보문고를 통해 복간한 《훈민정음 해례본 복간본》 1쇄가 일반 판매로만 거의 다 나갔다고 합니다. 마침 본지 김슬옹 편집위원이 해설서를 쓰셨다고 하는데 25만원이나 하는 해례본이 베스트셀러 수준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끈 이유는 무엇일까요?

“의식이 있는 미국 가정에 가면 <독립선언서> 사본을 한부씩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미국의 근본이고 이것으로부터 미국이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또 독일에 가면 구텐베르크성경 초판본을 가지고 있는 집이 많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그 성경을 독일 지성의 시작이고 나라의 근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처럼 우리나라에도 가정에서 자랑스럽게 지니고 자녀교육에 활용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당연히 《훈민정음》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정에서 소장하는 것은 물론 쉽게 볼 수도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훈민정음》 원본의 느낌을 최대한 살린 복간본을 내게 되었는데 출판원가가 비싸게 들을 수밖에 없어서 교보문고도 이익을 가급적 배제했지만 그래도 일반인이 사기에는 부담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훈민정음 해례본 복간본》이 인문학 부분에 2주 동안 베스트셀러 2~3위를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한 것도 아닌데 많은 분들이 저희의 기획의도를 충분히 공감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고마운 마음입니다.“

기자는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명문가가 어떻게 명문가를 이루게 되었는지에 대한 다큐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서 명문가는 대대로 이어지는 문화정신 덕에 명문가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처럼 이 간송가는 할아버지 간송 선생과 그 아들 간송미술문화재단 전성우 이사장과 전영우 간송미술관장, 그리고 손자 전인건 사무국장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정신, 문화유산에 대한 사랑이 명문가를 만들어내고 있음이었다. 대담 시간이 1시간을 넘길 만큼 격의 없이 많은 얘기를 나눴다. 대담을 하면서 기자는 간송의 마음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