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청사 건물은 낡고 비좁았는데 삐거덕 거리는 청사 계단을 오르며 많은 상념에 젖어본다. 밀랍인형으로 만든 백범 김구 선생이 청사 2층 사무실에서 집무를 보는 모습이 마치 그때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만 같아 몇 번이고 다시 바라다보았다. 어디 백범 김구 선생뿐이겠는가. 이곳을 드나들던 숱한 독립지사들의 이름이 스쳐지나간다. 사실 이번에 상해를 찾은 것은 여성독립운동가 가운데 한분인 김윤경(金允經, 1911. 6.23~1945.10.10) 애국지사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서였다.
김윤경 애국지사는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은 고향인 황해도 안악(安岳) 출신으로 일찍이 부모와 함께 중국 땅으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부터 중국에서 보냈다. 1924년 8월 15일부터는 상해 프랑스조계(租界)에 있는 백범 집에 살면서 임시정부에서 만든 인성(仁成)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상해에 있는 우리 인성학교에서는 금년에 제4회 졸업식과 진급식을 지난달 9일에 삼일당에서 거행하였다. 교장 조인권 씨의 사회로 졸업증서, 진급증서, 정근증서 등 상품 외 수여식이 있었고, 학교 직원의 학사 보고와 내빈 가운데 이청천, 김창환 두 분의 축사가 있은 뒤 폐회식을 가졌다. 졸업생 성명은 현보라 정흥순 김영의 옥인의 이다.” (글쓴이가 현대말로 옮김) 이는 신한민보 1923년 8월 30일치 인성학교 졸업식 기사이다.
일제의 조선침략으로 1910년 초부터 상해에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몰려들었다. 이렇게 상해 거주 한국인들이 늘어나면서 자녀 교육을 위한 학교 설립의 필요성이 생겼고 이에 인성학교가 문을 열게 되었다. 인성학교는 1916년 9월 1일 상해 공공조계 홍구지역(公共租界 虹口) 곤명로 재복리(昆明路 載福里)75호에서 4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여 1935년 11월 11일 문을 닫을 때까지 명실상부한 한인들의 든든한 교육기관이었다. 인성학교에서는 한인 자녀들의 일반적인 교육뿐 아니라 민족의식을 불어 넣는 독립운동가 양성기관의 역할도 충실히 담당하였다.
실제로 1921년 현재 프랑스조계의 한인 약 700명 가운데 200명 정도가 직업적인 독립운동가였을 정도로 당시 상해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여들었고 그러다 보니 자녀의 교육문제가 심각해졌다. 인성학교는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여 설립한 학교다. 인성학교는 1916년 9월 1일 상해 공공조계에서 ‘상해한인기독교소학’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는데 처음에는 소학교로 출발하였지만 그 목표는 상해뿐만 아니라 해외 한인들의 가장 완비된 모범교육기관으로서 초등·중등·전문과정을 교육하는 종합학교를 지향하였다.
인성학교의 교육목표나 내용은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정신과 민족역량을 배양하고 자활능력을 양성하여 완전한 민주시민 육성과 신민주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었고 지덕체(德智體)를 바탕으로 한 건전한 육체와 인격을 갖춘 인재 양성을 중시하였으며 ‘민족혼’과 ‘독립정신’ 교육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교육목표였다.
교과목은 한글, 한국의 역사와 지리 등에 치중하였으며 수업은 한국어로 하고 일본어는 절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교과서는 인성학교에서 직접 등사로 밀어 제본한 교본을 사용하였다. 인성학교의 교장을 비롯한 교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계있는 독립운동가들로 구성되었으며 선우혁, 여운형, 김태연, 김두봉 등이 교장을 맡으면서 자연스러운 독립운동가를 키우는 학교로 자리매김 되어 나갔다.
1929년 8월 당시 김두봉 교장은 상해를 방문한 한글학자 이윤재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 자료에서 인성학교가 지향하는 목표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내가 상해 부두에 내리기는 지난 8월 8일 하오 1시였다. 마차를 타고 법계(法界)에 들어서 서울로 치면 종로와 가튼 하비로를 거치어 다시 맥새이체라로로 빠저 원창공사(元昌公司)를 차젓다. (중간 줄임) ‘학교가 창립된 지 10여년에 요만큼이라도 돼가는 것은 순전히 교민들의 힘이지요. 그러고 상해에 거류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천여 명이나 됨니다. 아이들만 해도 수백 명이 되는데 아이들을 중국 사람의 소학교에 보내면 중국의 교육을 밧게 됨으로 모국말을 다 이저버리고 중국말만 하게 됨니다. 이찌 조선 사람의 구실을 할 수 있슴니까. 이러한 관계로 해서 더욱이 학교에 힘을 쓰지 아니 할 수 업게 됩니다.’”
인성학교 학생 수는 1916년 개교 당시 4명이었지만 1920년도 신학기에는 학급수가 4개로 늘어나고 유치원급이 증설되면서 학생 수는 30명으로 늘어났다. 1920년대 후반 이후에는 매년 50~70명의 학생 수를 유지할 정도였다. 그러나 인성학교의 재정 사정은 넉넉지 않았다. 이를 입증하는 기사가 신한민보 1930년 7월 17일치에 ‘상해 인성학교를 도와주소서’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것으로도 그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김윤경 애국지사는 백범 집에 거주하면서 인성학교에 다녔는데 그 나이는 13살쯤으로 추정된다. 집에서는 백범 어르신에게 독립정신을 자연스레 익혔고 인성학교에서는 철저한 민족교육을 받음으로써 훗날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 등에서 위원장으로 여성 항일운동의 선봉장으로 뛸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독립운동가들의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직, 간접적으로 몸에 익힌 김윤경 애국지사는 열아홉 되던 해인 1930년 8월에 여성들의 독립운동 단체인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 (上海韓人女子靑年同盟)에서 위원장으로 뽑혀 여성 항일운동의 선봉에 서서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으며 독립운동을 위한 정보수집에 온 힘을 쏟았다.
여자청년동맹에서는 일본 관헌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임시정부에 전달한다거나 또는 임시정부에서 대일(對日) 독립항쟁을 위해 일본 관헌을 교란시킬 필요가 있을 때에는 이들이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김윤경 애국지사는 1933년 상해에서 남경을 거쳐 중경으로 옮겨 다니면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한국독립당 산하의 부인회 등에 참여하여 항일운동을 지속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귀환하지 못한 채 1945년 10월 10일 이국땅에서 34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