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은 만 14살이던 1776년 한 살 연상의 풍산홍씨(1761~1838)와 혼인한다. 그러나 1801년 신유사옥으로 다산이 전남 강진으로 귀양 가면서 부부간의 생이별은 시작된다. 생이별한 지 일곱 해 째, 남편이 살아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던 1806년 부인 홍씨는 특별한 선물을 귀양지로 보낸다.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빛 비단치마였다. 혼인한 지 30년, 다홍치마는 이미 누렇게 바래 있었다.
▶ 하피첩(霞帔帖)
1810년(순조 10), 필사본, 24.8×15.6,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1807년 봄, 홍씨 부인은 유배 생활중인 남편 다산선생에게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색 비단치마를 보냈다. 다산 선생은 그 오래된 비단 치마를 말라서 1807년부터 1809년까지 두 아들에게 경계의 말을 적어 보내면서, 이것을 《하피첩》이라 이름 지었다. 《하피첩》은 원래 4첩으로 이루어졌는데, 현재 3첩만 남아 전한다.
다산은 부인이 보내 온 치마를 보고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서시
“병든 아내가 치마를 보내
천리 밖에 그리워하는 마음을 부쳤는데
오랜 세월에 홍색이 이미 바랜 것을 보니
서글피 노쇠했다는 생각이 드네.
잘라서 작은 서첩을 만들어
그나마 아들들을 타이르는 글귀를 쓰니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하며
평생 가슴속에 새기기를 기대하노라."
그리고 다산은 비단치마를 조각조각 말라 두 아들에게 경구(警句)들을 써 보냈다.
“나는 벼슬을 하지 않아 너희에게 남겨줄 게 없다.
오직 두 글자의 놀라운 부적을 줄 테니 소홀하게 여기지 말아라.
한 글자는 근(勤)이요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진심으로 바라건대 너희들은 항상 마음을 화평하게 하여
벼슬길에 있는 사람들과 다르게 생활하지 말거라.
자손 대에 이르러서 과거에 응할 수도 있고
나라를 경륜하고 세상을 구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천리는 돌고 도는 것이니 한번 넘어졌다고
반드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것은
다행스럽게도 너희가 온 마음을 기울여
내 글을 연구하여 그 깊은 뜻에 통달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고생스러워도 고민이 없을 것이다.”
18년의 유배가 끝나자 다산은 고향으로 돌아온다. 홍씨 부인과 만년을 보낸 다산은 혼인 60돌, 회혼일(回婚日)인 1836년 음력 2월 2일 숨을 거두고 2년 뒤 홍씨도 남편을 따른다. 부부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함께 묻혀 있다.
이후 <하피첩>은 다산 집안의 가보(家寶)로 대접받았다. 1925년 을축년대홍수로 다산 생가인 여유당이 유실되는 위기의 순간에도 <하피첩>과 <여유당전서>는 보존되었다. 그러나 1950년 터진 한국전쟁이 문제였다. 6·25 발발 직후 다산의 종손 정향진(1968년 작고)씨가 난리통에 수원역에서 열차에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하피첩을 잃어버렸다. 7대 종손인 정호영(56) 교육방송 정책기획센터장은 “할아버지께서 잃어버린 것을 뒤늦게 깨닫고 실신할 지경으로 애통해하셨지만 끝내 찾지 못하셨다.”고 말했다.
하피첩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2006년이었다. 한 소장자가 “2004년 수원에서 폐지를 수집하는 할머니의 수레에서 발견했다.”며 공개했다. TV ‘진품명품’ 프로그램에서 감정가 1억 원이 매겨지기도 했으나 다시 행방이 묘연해지고 말았다. 이후의 행적은 아래와 같다.
- 2010년 문화재청에서는 옛 글씨 일괄 공모를 통해 <하피첩>을 보물 1683-2호로 지정했고,
- 2011년 부산저축은행 전 대표의 파산으로 그가 소유하던 <하피첩>은 예금보험공사에서 압류하고 만다.
- 2015년 국립민속박물관이 서울 옥션 경매에 나온 <하피첩>을 구입 언론에 공개한다.
- 2016년 <하피첩>은 국립민속박물관 전시에서 1차 공개되었고 오는 10월 17일 실학박물관 기획 특별전에 다시 공개된다.
▶ 매화병제도(梅花倂題圖)
1813년(순조 13), 필사본, 31.7×20.5,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1813년 7월 유배기에서 다산 정약용은 시집가는 딸에게 매화와 새를 그린 그림을 보내준다. 두 마리의 새처럼 다복한 가정을 꾸미고 풍성한 열매를 맺어 집안이 번창하기를 비손한 아버지의 마음을 담았다.
경매를 전후하여 경기도와 실학박물관은 <하피첩>은 다산 집안의 보물이자 전 국민의 보물임을 크게 홍보했다. 한 개인의 사유물로 되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노력으로 하피첩은 국립민속박물관으로 가게 되었고 이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아쉽게도 다산의 고향에는 돌아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