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조선왕조실록》을 남한은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가 1971년 실록 번역에 착수해 1993년 끝냈고, 북한은 《리조실록》이라는 이름으로 1980년대 번역을 마쳤다.
최근 정영미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은 최근 발간된 학술지 《민족문화》에 올린 논문 “남북한 조선왕조실록 번역 비교”에서 남한과 북한의 현종실록 번역문을 비교ㆍ분석한 결과 한자와 한자어의 쓰임이 가장 큰 차이라고 밝혔다.
그는 “남한에서는 실록을 번역할 때 일반 대중이 아닌 전문가를 겨냥했는지 국한문 혼용을 원칙으로 하고 한자어도 빈번히 썼지만, 북한은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한자 병기를 하지 않고 역사 낱말도 되도록 쉽게 풀어썼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남한이 "이번에 신방(新榜)을 분관(分館)할 때 괴원(槐院)의 관원들이 재차 회합을 가졌다."고 옮긴 월(문장)을 북한은 "이번에 과거시험 합격자들을 견습 배치할 때에 승문원의 여러 관리가 두 차례나 모여 앉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또 문신 홍위의 죽음에 대한 부분을 남한은 "전 감사 홍위(洪위<초두머리 아래 威>)가 졸하였다. 홍위는 문명(文名)은 약간 있었으나 행정 능력은 없었다."고 뒤쳤으나, 북한은 "전 감사 홍위가 죽었다. 위는 글은 잘한다는 이름이 좀 알려졌으나 실무능력은 전혀 없었다."고 풀었다.
낱말을 살펴보면 남한이 '선정신'(先正臣)이나 '정거'(停擧)를 풀이하지 않고 그대로 쓴 데 견주어 북한은 '어진 신하'나 '과거시험을 못하게 하다'라고 풀어서 섰다.
남북한 조선왕조실록 번역의 또 다른 차이는 주석의 유무다. 남한은 주석을 통해 어려운 어휘에 대한 보충 설명을 하고 각종 정보를 제공했으나, 북한은 본문을 쉽게 풀었기에 주석을 달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한자 한 글자를 한글로 옮겼을 때 글자 수를 계산한 번역률은 남한이 3.51, 북한이 3.25로 큰 차이가 없었다. 오역의 발생 빈도도 비슷했다는 것이다.
정 선임연구원은 "남한의 번역은 직역에 가까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고, 북한의 번역은 모든 어휘를 풀어쓰다 보니 원래 뜻과는 거리가 생기는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 작가 ‘ㅅ’ 씨는 “자주 들여다보는 남한판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정작 어려운 말은 주석도 없는 경우가 많고, 사전을 찾아봐도 나오지 않은 경우가 많아 이게 정말 뒤친 것인지 이해가 잘 안 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