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는 이웃나라인 중국 글자지요. 글자로 쓴 글을 한문이라 불러요. 세종 임금이 우리 글자를 만들기 전까지는 한자와 한문을 주로 썼어요. 세종대왕은 조선시대 네 번째 임금이셨지요. 세종 임금 전까지는 우리 글자가 없었으니 중국글자인 한자를 빌어다 썼습니다.
얼마나 불편한지 상상해 보세요. 말로는 “엄마 저 배고파요.”라고 말하고는 쓰기는 중국 사람들처럼 “母 我饑”라고 썼지요. “난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고는 “我愛你(나-사랑해-너)”라고 썼어요. 말 차례도 다르지요. ‘사랑해’라는 말이 우리말에서는 끝에 왔는데 중국어는 가운데 있지요. 중국말은 영어 차례와 비슷합니다. 영어로는 “I love you"라고 하니 사랑한다 love 가 중국말처럼 가운데 있지요.
그나마 이런 한자는 양반들만 맘껏 쓰고 중인들은 이런 한자를 쉽게 뜯어 고친 이두라는 글자를 썼답니다. 일반 평민이나 천민들은 글자(한자)를 쓸 생각도 못했지요.
한문을 잘 한다 하더라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지만, 이런 한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양반들은 이런 불편에 대해 짜증내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답니다. 어렵고 불편한 만큼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에요. 우쭐했던 것이지요. 양반들은 우리나라를 ‘작은 중국’으로 여기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했어요. 그래서 우리말에 잘 어울리는 글자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한자 모르는 일반 백성들은 읽고 쓸 줄 몰랐으니 생활이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따라서 대다수 백성들은 이러한 한자가 어렵기도 하거니와 실제 글자를 쓸 수 있는 삶을 누리지 못했답니다.
말을 적는 글자는 한자가 독점한 셈이었어요. 지금이야 글자라고 하면 영어도 있고 일본 글자도 있지만 그 당시로는 한자만이 진정한 글자라고 생각했으니 “글자=한자”라는 식이 성립했답니다. 그렇다고 한자를 부려 쓰던 사람들이 학문 도구로서의 한문이 아닌 일상생활과 관련된 부분까지 한문 쓰기가 편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겨우 만들어낸 것이 중국식 한문을 우리식 한문으로 바꾸는 이두문을 만들어냈답니다. “我愛你(나-사랑한다-너)”를 일단 우리식으로 “我 你 愛(나-너-사랑한다)”와 같이 차례를 바꾸었지요. 그리고 나서 토씨(조사) ‘-는, -를’, 어미 --ㄴ다‘등을 발음이 비슷한 한자의 뜻이나 음을 갖다 붙이는 식입니다. 이를테면 “我隱(은)你乙(을)愛多(다)”처럼 바꾸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꾸면 우리식 흉내는 어느 정도 낼 수 있지만, 한자 자체가 어려운 글자이고 보면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죠.
한자는 토씨나 어미가 거의 발달이 안 되어 있고 하나의 낱말을 소리 높낮이로 구분하는 중국말에 적합한 글자이니 그렇지 않은 우리말과는 너무나 먼 것이었습니다. 새 글자 해설서 집필의 신하 총책임자였던 정인지는 그 불편을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낀 것과 같이 서로 어긋나는 일”라고 비유했답니다.
곧 조선이 한자 문화권에 놓여 있고 양반들이 한문을 부려 쓰는데 별 불편이 없었다 할지라도 여러 가지로 표현하려는 생각을 한문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으며 한문을 쓰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뜻이 통하지 않음으로써 크고 작은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실용적인 공용문서에는 이두가 끊임없이 쓰여 온 것으로 보아 입말과 글말이 다른데 대한 불편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반들은 이런 불편을 뻔히 알면서도 한자가 주는 묘한 맛에 빠져서 그럭저럭 살아온 듯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중국의 영향력을 적게 받은데다가 실용 성향이 강해 한자를 아예 뜯어고쳐(해체) 일본 말에 적합한 문자(가나)를 만들어냈습니다. 일본말은 발음할 수 있는 소리 세계가 단순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소리 세계가 풍부한 우리말은 일본과 같은 방식으로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이두문을 개발해 그 불편을 줄여보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이랍니다.
한자가 정확이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대개는 위만 조선인 기원전 195년 앞뒤에 한사군 설치와 한족 이민, 한문화화 함께 전래되었다고 봅니다.
신라 지증왕, 법흥왕 때에 나라 이름을 한자말로 바꾸고, 연호도 한자로 썼으며, 통일신라 이후 더욱 본격적으로 받아들였죠. 한자어 발전 정착은 신라 후반기의 향가부터 고려 광종의 과거제도 실시 등으로 더욱 확산된 것입니다.
그런데 세종 임금이 훈민정음을 만들면서 백성들의 언어생활은 확 바뀌게 됩니다. 양반들은 주로 한문을 쓰면서 이두나 훈민정음을 쓰게 되었고, 중인들은 주로 이두문을 쓰면서 한자나 훈민정음을 쓸 수 있게 되었으며, 평민이나 천민들은 드디어 훈민정음을 쓸 수 있게 되었지요. 물론 실제로는 평민이나 천민 가운데 훈민정음을 깨친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겠지만 누구든지 읽거나 배울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문이라면 아예 꿈도 꾸지 않았을 터인데 꿈을 꿀 수 있는 쉬운 글자가 생긴 것이지요.
양반들도 한자를 배울 때 훈민정음이 매우 요긴해 한자를 더 쉽게 배울 수 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