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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굿을 통해 본 무교의 저승관

망자는 살아생전 행적과 관계없이 좋은 곳으로 간다
[양종승의 북한굿 이야기 6]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다리굿은 망자를 좋은 곳으로 보내는 천도제다. 만신에게 실린 영혼이 산자들과 대면하여 살아생전 못다 한 대화를 나눈 후 맺힌 한을 풀고서 ‘좋은 곳’으로 가는 의식이다. 무교에서의 ‘좋은 곳’은 걱정이나 근심뿐만 아니라 부족함이나 어려움 없이 영원토록 즐겁고 평온히 살 수 있는 낙원이다. 이러한 무교 사후관은 지옥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생전 선한 일을 한 사람만이 극락세계나 천국을 가게 되는 불교나 기독교와는 다르다.

 

이를테면, 불교의 저승관은 권선징악 이분법 구조로 되어 있어서 선인은 극락세계로 악인은 지옥으로 가게 된다. 개신교에서도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분법 구도가 전개되기 때문에 현세에서 많은 사랑을 베풀고 선한 일을 한 사람만이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천국으로 들어가 부귀영화의 삶을 이룩하지만, 현세에서 나쁜 짓을 하거나 사랑을 베풀지 못한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무교에서는 망자 누구나 살아생전 행적과 관계없이 좋은 곳으로 가는 관념체계다.

 

 

한민족은 오래전부터 죽음을 넋(영혼)과 몸(육신)의 분리 현상으로 보았다. 넋은 혼(魂)이요 몸은 백(魄)이어서 인간이 죽으면 몸은 땅에 묻히지만, 그 넋은 또 다른 공간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유지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은 영혼이라도 이들이 어떠한 방법으로든 산자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영혼에 대해 각별한 대우를 하여야 한다고 믿어 온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인들의 사후세계관에는 살아생전의 삶이 저승으로 이어지는 일원적(一元的) 내세관(來世觀)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일원적 내세관으로 논의되는 무교의 저승관은 불교나 개신교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승 삶의 결과에 따라 저승 삶이 결정되는 이른바 불교 또는 개신교의 ‘인과응보’ 내지는 ‘종과득’과와는 다르다. 이러한 신앙적 구조는 무교의 사후세계가 선악 개념을 포함하지 않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승세계에서의 영혼 향방이 이승의 행적에 따라 갈라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무교의 일원적 내세관 성립은 혼백 분리에 따라 육체는 땅에 묻혀 소멸하여도 그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이른바 혼백사상에 기인한다. 그리고 혼백사상에 바탕한 영혼 활동은 저승세계에서도 지속해서 유지됨을 뜻한다. 혼과 백의 분리에 의한 영혼관 구조는 고대사회로부터 오늘날까지 계승 발달되어 왔으며 그 뿌리는 샤머니즘의 세계관이다. 이러한 고대사회에서의 샤머니즘적 세계관은 고대인들을 움직이는 절대적 가치관이었고, 그 믿음은 오늘날까지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폭넓게 지배해 왔다.(나희라, 《고대 한국인의 생사관》, 2008)

 

 

사람이 태어나 죽어서 가는 곳이 저승이다. 저승은 현세의 삶을 살고 있는 이승과 반대되는 공간으로서 누구나 언젠가는 죽어서 가야 할 곳이다. 저승을 내세 또는 사후세계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 ‘떠나셨다’, 또는 ‘저세상으로 가셨다’라고 하는데, ‘돌아 간곳은 어디이며, 떠나 간곳은 어디인가? 또한, 저세상은 어디에 있으며 그곳은 어떠한 곳인가’라고 하는 문제 제기는 어제 오늘이 아니다.

 

저승에 대한 궁금증은 태초부터 사람들의 숙제였으며 앞으로도 분명 풀리지 않을 인간사 가장 큰 관심사 가운데 하나지만, 사람간들은 이에 대한 내용을 늘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한국인의 저승은 이 땅에 특정 종교가 유입된 후 이야기되고 있는 그러한 공간과는 다른 곳이다. 앞서 말한 현세와 내세가 분리된 이원적 내세관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인에 있어서의 저승관은 자연발생적 세계관 확립에 따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으며 그 실체를 무속신앙을 통해 알 수 있다. 무속신앙에서는 저승의 삶이 이승의 삶과 연계되고 이승의 삶은 저승의 삶으로부터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하면, 저승은 이승이라는 현실세계가 대비되어 논의되며 또한 이승의 세계는 전생에서의 연장이라는 가치에 의해 펼쳐진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은 전승(전세)과 이승(현세) 그리고 저승(내세)의 삼생(三生)의 구도 위에서 풀이될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전생에 선한일로 이승에서 복 받았다’, “전승에 무슨 쇠로 이승에서 이 고생을 하는가’, ‘저승에 가 한없이 잘살아 보자’, ‘저승 가서 무슨 죄를 받을려고 나쁜 짓을 하는가’ 등의 일상생활 언어에서부터 삼승의 연관성을 알수 있다. 또한 ‘금생이 나그네 길이요’, ‘저승이 본향(本鄕)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일상 언어 속에서 전승과 이승 그리고 저승의 세계를 그려볼 수 있듯이, 인간은 이와같은 삶과 죽음의 구조 선상에서 순회자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다. 곧 이승은 현실세계이며 저승은 죽은 뒤의 세계이고 전승은 태어나기 전의 세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삼각 구도는 각기 독립된 것이 아니고 서로가 연속 선상에 있다. 곧, 인간은 태어나기 전과 인간으로 태어나 삶을 영위하는 것 그리고 죽은 뒤 사후세계의 과정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다.

 

다리굿에서는 죽은 망자가 무엇으로 환생하였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 쌀이나 밀가루 등을 그릇에 담아 하얀 천이나 종이에 덮어 두었다가 굿을 마무리 하면서 살펴본다. 이때 죽은 자가 또 다시 인간으로 재생하는 경우는 없고 새나 짐승 등 자연 생물로 환생하게 된다. 이와같이, 인간 재생 불법칙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죽은 뒤에도 저승에서 지속해서 영혼 활동이 유지되고 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곧 이승과 저승이 연결고리를 갖고서 생전의 삶과 사후의 삶이 연결 선상에서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승에서의 선악 업보를 저승으로 짊어지고 가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