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벌써 아침인가?
부스스 눈을 부비며 일어나보니 창밖이 훤하다. 날이 벌써 새나? 이런 생각에 밖을 내다보니 아직 지지 않은 둥근 달이 서쪽 하늘에 걸려있다. 내일이면 8월 보름 아닌가? 곧 더 원만해질 달이 자애롭게 서쪽 하늘에서 웃고 있는 새벽이다. 한가위 대보름을 위해 마치 수레바퀴처럼 둥글어지며 달려온 저 달이 오늘 새벽에 일찍 나를 깨운 것이다.
그 달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밑으로 내리니 세상이 온통 은빛 속에 춤을 춘다. 북한산 자락에 세워진 아파트 사이의 도로도 차량의 흔적이 끊긴 채 고요하고, 올려다보이는 나지막한 봉우리들이 시립(侍立, 웃어른을 모시고 섬)한 그 위로 달빛 공주의 춤을 보며 손뼉을 쳐주고 있다.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은 어떻게 그리 이 달빛을 보는 순간 영원히 잊히지 않을 절창을 했을까? 어떻게 이 달빛을 보며 고단한 인생, 고향을 떠나 살 수밖에 없는 우리 나그네의 심사를 온통 다 쓸어 담았을까?
床前明月光 침상 앞 달빛 어찌 그리 밝은지
疑是地上霜 서리가 내린 줄 알았잖아
擧頭望明月 고개 들어 밝은 달 보다 보니
低頭思故鄕 고향 생각에 고개 절로 내려가네 。
다섯 글자로 넉 줄, 곧 20자의 한자로 표현한 가장 간결한 달밤 정경인데, 초저녁이 아니라 나처럼 새벽에 깬 상태이리라. 정야사(靜夜思), 곧 고요한 밤에 생각나는 것이란 제목에서 사람들이 달빛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비로소 알겠다.
우리가 보름달이 좋은 것은 그 속에 고향이 있기 때문이리라.
고향은 곧 부모님이고 부모님은 곧 우리에게 언제나 먹을 것을 대어주시던 포근함이고 넉넉함이다. 무엇이든 해주려 하고 무엇이든 먹이려 하고 무엇이든 객지에 나간 자식을 위해 싸주려 하는 그 사랑의 마음이다.


우리가 추석이라고 그 고생을 해가면서도 고향에 가려고 하고 겨우 한 시간을 보고 올망정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보고 싶은 것은 바로 그 마음, 그 포근함, 그 사랑이 그리워서일 것이다. 우리의 삶이 도시로 나가서 살지 않으면 갈수록 어렵고 그 속에서의 삶이란 팍팍함과 살벌함으로 점점 달려가는 이 현실에서 우리에겐 고향 부모님의 사랑이 그리운 것이고 아무 걱정없이 부모님이 해주시던 그 음식을 다시 먹어보고 싶은 것이리라. 비록 팔순 구순이 되어 이젠 움직이기도 힘들어지신 부모님일지라도 그 주름진 손으로 만든 음식을 받아먹어 보고 싶고, 그 깊게 팬 눈가의 주름이 웃음과 기쁨으로 펴지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먹고 산다고 고향을 나와 일에 매어 살다 보니, 또는 찾아갈 부모가 없는 분들은 이렇게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고 대신 부모을 만나는 것이다. 그 달 속에 부모가 있고 고향이 있고 사랑이 있고 풍성함과 풍요로움이 있다. 달은 곧 어머니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달빛을 보고 고향의 서리를 생각한 이태백보다는 달빛을 보고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해낼 수 있는 사람들은 훨씬 행복하지 않은가? 달빛을 서리가 아니라 어머님의 백설기 쌀가루라 생각하면 비록 지금 남들보다 모자란 것 같고 못난 것 같아도 마음은 더 풍요롭지 않은가? 겨우 하루가량 둥글다가 곧 하현달로 접어들 저 달이 펼칠 공주의 치마자락을 휘날리며 추는 춤을 되도록 더 많이 보고 조금 더 창밖의 백설기 쌀가루를 마음으로 받아먹어야겠다. 마음 같아서는 저 보름달이 기울지 않고 언제나 둥글었으면 하지만 말이다.
십오야의 달(十五夜月)
十五寒宵倚石欄 십오야 차가운 밤 난간에 기대어 서니
多看月色正團團 둥글둥글 보름달 참 밝기도 하구나
初陞嶺首開金鏡 고갯마루 처음 떠오를 땐 황금 거울 열린 듯
轉上天中掛玉盤 하늘 한가운데 올라서는 옥쟁반 걸린 듯
玄兎杵邊光自滿 검은 토끼 절구 옆엔 눈부신 흰 빛
姮娥窓外影無剜 항아의 자태도 어김없이 드러나네
誰干上帝同弦望 달이 언제나 둥글도록 누가 하느님께 청해다오
長使淸輝遍世間 맑은 이 빛 두루 세상을 길이길이 비추어 달라고
... 이응희 [李應禧, 1579 ~ 1651]

그러나 보름달이 좋은 것은 언제나 둥글기만 하지 않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그믐과 초승달,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잠시나마 아주 감출 수 있는 날도 있기 때문이리라. 늘 훤하게 보름달만 있다면 누가 그 고마움과 덕을 알리오. 스스로 몸을 줄여 비움의 고마움을 실천하니 다시 채움의 덕이 두드러지는 것이리니.
비우니까 채워지는 것이고 채워지면 다시 비워낸다.
그러므로 보름달이 좋은 것은 늘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것이 29일을 지나서 얻는 한 번의 선물이기 때문이리라. 더구나 가장 큰 달은 한해 365일 가운데 하루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달은 참 자유로운 존재라 할 것이다.
그 비움의 덕을 우리가 배울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의 손길 같은 저 보름달도 올해는 고향의 어머니와 같이하지 못하고 각자 도회지 자기 집에서 오로지 아들딸들만 같이 보라고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었기에 아빠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실증해 보일 수가 없구나. 그저 마음만으로, 그러다가 혹 영상으로라도 서로 함께 하는 것이지, 눈앞에서 그 사랑을 만져가며 확인할 수는 없겠구나.
아 올해는 부모님의 사랑도 부모님이 해주는 송편의 맛도 모두 머리로만 생각으로만 맛보는 정말로 전대미문의 추석이 되겠구나.
보름달이여, 내년에는 부디 그렇게 되지 않도록 당신의 원력을 발휘해 주세요! 당신 비움의 내공이 내년에는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신공으로 바뀌기를 간절히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