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히라쓰카 운이치, <백제의 옛 수도[百濟古都]>, 일본 1935년, 다색판화, 33.9×48.5cm](http://www.koya-culture.com/data/photos/20201146/art_16048919425727_2f711f.jpg)
이 다색판화는 일본의 근대 판화가 히라쓰카 운이치[平塚運一, 1895~1997]가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 주변의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1935년 제10회 국화회(国画会) 출품작으로, 작가가 1939년 덕수궁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에 기증하였습니다.
낮은 언덕을 배경으로 오층석탑, 땔감 지게를 진 인물, 그리고 가지만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석양 무렵의 풍경인 듯, 저 너머 해가 저무는 언덕은 붉게 빛나고 그 뒤편 언덕에는 이미 푸른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정연하게 배치된 판석과 실제보다 경쾌하게 들린 옥개석으로 당당하게 표현된 석탑은 화면 가운데서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탑을 등지고 걸어가는 인물 탓인지 그 주변엔 쓸쓸한 분위기가 감돕니다.
근대 창작판화의 제작
근대 창작판화(創作版畫)인 이 작품에는 판목(版木)을 찍어낸 순서를 기록한 에디션 넘버가 없습니다. 히라쓰카 운이치는 ‘창작판화’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항상 판목을 스스로 조각한 뒤 한 장만 찍어냈고, 나중에 특별히 부탁받아 다시 찍을 일이 생겨도 번호를 매기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대량생산되었던 일본의 전통 목판화와는 전혀 다른 제작 방식이었습니다.
에도시대[江戸時代, 1603~1867]에 유행한 다색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絵]는 밑그림을 그리는 화가[画師]와 목판을 깎는 조각사[彫師], 그리고 색을 입혀 찍어내는 기술자[摺師]의 분업으로 완성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 서양인들 사이에서 일본 기념품으로 우키요에의 인기가 높아졌을 때, 이러한 분업 체계는 더욱 빛을 발하며 늘어나는 나라 안팎 수요에 부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 이후 ‘창작자(創作者)’로서의 근대적 ‘예술가’ 개념이 등장하면서, 판화 제작 전 과정에 화가 한 사람의 창조성이 오롯이 반영되는 ‘창작판화’가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운이치는 이러한 창작판화의 대표 작가였습니다. 스스로 창작판화는 ‘조각도로 그림을 그리는 듯한 기분[刃物で描くというこの気持]’으로 제작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그는, 근대 서양화가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柏亭, 1882~1958]와 전통판화가 이가미 본코쓰[伊上凡骨, 1875~1933]를 동시에 스승으로 모시며 일본의 전통 다색판화를 근대 예술 장르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일본 근대 예술가의 한국 고대사 탐구
히라쓰카 운이치는 102살까지 장수를 누린 작가로, 판화 제작뿐만 아니라 연구ㆍ저술 활동도 활발히 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일본 판화의 원류를 찾아 고대 불교 경판(經板)과 기와 연구에 몰두하였고, 자연스레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삼국의 불교미술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부여를 찾아 정림사지를 답사하고 이 작품을 제작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쇼와[昭和] 7년(1932), 나는 전람회에 출품할 유화 제작과 불교미술 및 기와 연구를 위하여 조선으로 건너가 한 달 정도 체류한 적이 있다. (중략) 먼저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를 찾아갔다. 여기도 (일본의 아스카[飛鳥]와 마찬가지로) 폐허가 되어 지금은 돌로 만든 오층탑[平濟塔]이 1기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조선에 오기 전, 백제와 연관이 깊은 아스카 지역을 미리 답사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논밭으로 변해버린 고대 유적지에서 더없이 쓸쓸한 기분에 사로잡혔는데, 부여 정림사터에서도 바로 그때와 똑같은 감정을 느낀 모양입니다. 이 석탑이 정림사의 것임이 밝혀지기도 전의 일입니다. <백제의 옛 수도> 화면 전체에 감도는 쓸쓸한 분위기는 그가 정림사터 오층석탑 앞에서 실제 느낀 감정에서 우러나왔을 것입니다.
20세기 초 한반도에 들어온 일본인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백제의 옛 수도인 부여 일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백제는 일본에 고대 문화의 핵심인 불교를 전해준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본격적으로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부여의 불교유적은 한국사의 타율성론(他律性論)을 주장하는 데 유용했던 낙랑(樂浪)의 중심지 평양이나, 통일신라까지 이어진 유물의 보고(寶庫) 경주 일대에 견주어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부여의 부소산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39년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구심점이 될 부여신궁(扶餘神宮)의 건설터로 선택된 이후의 일입니다. 그 이전의 부여는 히라쓰카 운이치와 같이 순수한 지적 탐구심에 일본 고대 문화의 원류를 찾아 나선 이들에게 오히려 더 매력적인 곳이었을 겁니다. 운이치가 이곳에서 얻은 예술적 영감은 <백제의 옛 수도>라는 작은 화면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며 다시 그림을 바라보면, 오로지 쓸쓸함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류승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