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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의 판관대와 율곡 잉태설화

평창강 따라 걷기 제3구간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우리는 이제 소란한 31번 국도를 외면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둑길을 걷고 있다. 둑길 양쪽으로 벚나무를 심어놓았다. 수령이 꽤 되어 보인다. 하얀 벚꽃이 피면 이 길은 하얀 터널이 될 것이다. 둑길 아래로는 풀밭과 자갈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자갈밭 너머에는 평창강이 소리 없이 흐른다. 강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아래쪽을 보니 보가 있었다.

 

벚나무가 양쪽으로 서 있는 이 구간은 매우 아름다운 산책길이다. 산책길 이름을 붙이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 것 같다. 깊은 강물 너머로는 가파른 바위산이 보인다. 산이 가팔라서 산 아래 소는 깊을 것이다. (나중에 방림2리 이장님과 전화 통화하여 소의 이름을 알아보니 맨앞소라고 한다.) 벚나무길은 상방림교에서 끝난다. 이 구간의 길이를 카카오맵을 이용하여 재보니 1.5km다. 아름다운 이 구간을 ‘맨앞소벚나무길’이라고 이름 붙이면 어떨까? 평창강에도 봄이 오기는 오는가 보다. 강가에 버들강아지가 예쁘게 피어났다.

 

 

 

 

우리는 맨앞소벚나무길 중간에서 잠깐 쉬었다. 그런데 일행은 개성들이 모두 강해서 그런지 각자 좋아하는 음료수가 달랐다. 은곡은 걸망에서 막걸리를 꺼내었다. 나와 시인마뇽은 믹스커피를 먹고, 석주는 블랙커피를 마셨다. 가양은 그냥 물을 마시면서 초코렛을 꺼내어 먹었다. 가양은 초코렛을 우리에게도 나누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각자의 고향이 모두 달랐다. 은곡은 보은, 나는 전주가 고향이다. 시인마뇽은 파주가 고향이고 석주는 서울 태생이다. 가양은 강원도 동해안 양양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과 좋아하는 음료수가 각자 달라도 우리는 의견 충돌 없이 잘 걷고 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언젠가 가양에게 가양(可洋)이라는 호의 뜻이 무엇인가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이효석의 호인 가산(可山)과 대비시켰다고 말했다. 이효석은 강원도 산골에서 난 사람이고 자기는 강원도 바닷가에서 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럴듯한 설명이다. 그날 나는 음료수를 담을 일회용 종이컵을 사람 수 만큼 가져 왔는데, 가양은 개인컵을 가져왔다. 환경교육과 교수인 가양은 생활 속에서 환경교육을 솔선수범하고 있었다. 명색이 환경공학과 교수 출신인 내가 부끄러웠다.

 

맨앞소 벚나무길이 끝나고 우리는 상방림교를 건너 42번 국도를 따라 방림면으로 갔다. 이 도로는 조선시대 한양에서 강릉까지 연결되는 관동대로의 일부이다.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강릉으로 가려면 한양 -> 양근(양평) -> 원주 -> 안흥 -> 방림 -> 대화 -> 진부 -> 대관령 -> 강릉으로 연결되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방림은 대동여지도에 방림역(芳林驛)으로 표시되어 있다. 역(驛)은 조선시대에 중앙 관아의 공문을 지방 관아에 전달하기 위하여 관리가 여행하거나 부임할 때 말을 공급하던 곳이다. 역은 주요 도로에 30리마다 두었다. 말을 타고 온 관리가 숙식을 제공받는 곳을 역참(驛站)이라고 하였다. 방림역 자리는 현재는 방림5리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 방림역은 대화역과 운교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시인마뇽의 설명에 따르면 ‘한참 동안’이라는 우리말 표현에서 ‘한참’은 한 역참에서 다음 역참까지 다다를 정도의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역참이 있는 곳의 지명은, 예를 들면 이태원 조치원 인덕원 장호원처럼 원(院)자로 끝난다고 한다. 시인마뇽은 현재 강원대 국문과 박사과정에서 고문학(古文學)을 공부하고 있는 만학도이다. 그는 나보다 두 살 위이니 엄청난 만학도이다. 그의 뜨거운 학구열에는 그저 존경심이 갈 뿐이다.

 

42번 국도에는 차가 자주 지나갔다. 차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린다. 자동차 소리가 시끄러웠다. 내가 싫어하는 국도를 따라 700m쯤 걷다가 왼쪽 좁은 길로 들어섰다. 입구에 ‘방림체육공원’이라고 쓴 안내판이 있었다. 조금 직진하니 내가 좋아하는 둑길이 나타난다. 사방은 다시 조용해지고 몸과 마음이 다시 편안해졌다. 소가 있어서인지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평창강이 보이는 이곳이 천제당(天祭堂)이다. 옛날에 평창강을 안전하게 건너게 해 달라고 기도하던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천제당은 없어지고 그 장소는 방림 체육공원이 되었다. 공원 옆에 커다란 주차장이 있었다. 평창강을 왼쪽에 두고서 둑길을 걸었다. 둑길에는 벚나무를 줄지어 심어놓았다. 간혹 개복숭아와 철쭉도 보였다.

 

 

강물 건너편에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아직 여기는 이른 초봄이어서 새잎을 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상상컨대, 봄부터 가을까지 나뭇잎이 무성한 동안에 이곳에는 멋진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지도를 보면 이 둑길은 방림교까지 2.3km 계속된다. 이 길을 ‘천제당벚나무길’이라고 이름 붙이면 근사할 것 같다. 이 길이 특히 좋은 것은 길가에 안내판을 여러 개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안내판에는 방림에 얽힌 역사와 전설, 그리고 문헌에 등장하는 방림에 대한 한시 등을 기록해 놓았다. 길을 걷다가 글을 읽으면, 재미도 있고 역사 공부도 되고 여러 가지로 좋을 것이다. 안내판의 내용 중에서 흥미로운 세 가지를 소개한다.

 

<운교리 밤나무와 율곡 잉태설화>라는 제목의 안내판에는 봉평의 판관대에 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율곡 잉태설화는 메밀꽃 필 무렵의 고장인 봉평면 창동리의 판관대에 가면 만날 수 있다. 길에서 보면 까만 비석 몸돌에 자연석 지붕돌을 얹어놓은 판관대라는 기념비가 있다. 조선 중종 때 수운판관(필자 주: 종5품직으로서 조창(漕倉)을 담당하는 관리)을 지낸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의 직함을 따 ‘이 판관의 집터’라는 뜻으로 판관대라고 하였는데... 이원수가 벼슬길에 있으며 대관령을 넘어 강릉의 본가를 오가기가 어렵자 산수가 수려한 봉평에 거처를 마련해 두었던 터이다. 율곡의 탄생지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대로 오죽헌이지만 잉태설화는 판관대로 전해진다.”

 

다른 안내판에는 나도밤나무의 이름에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인천에서 수운판관을 지내던 이원수가 어느 날 여가를 내어 식솔이 머물던 봉평으로 오던 중 방림주막에서 잠시 여정을 풀게 되었는데, 마침 주막집 주모는 용이 가득히 안겨 오는 기이한 꿈을 꾼다. 주모는 꿈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고 이원수를 모시려 했으나 그가 완강히 거절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주모의 청을 거절한 이원수는 그날 밤 봉평의 판관대에 도착한다. 이날 바로 신사임당이 율곡을 잉태한 것이다. 며칠 판관대에 머문 이원수가 인천으로 돌아가는 길에 또다시 방림주막에 들러 이제는 청을 들어주겠노라고 했으나 이번에는 주모가 청을 거절한다.

 

주모 왈 “하룻밤 모시기로 했던 것은 신이 점지한 영재를 얻기 위함이었으나 지금은 아닙니다. 이번 길에 댁에서는 귀한 아들을 얻을 것입니다. 귀한 인물을 얻었으나 후환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원수는 깜짝 놀라 화를 막을 방도를 물었다. 주모가 이르기를 이곳 주변에 밤나무 1,000그루를 심으라는 것이었다. 이원수는 주모가 시키는 대로 천 그루의 밤나무를 심도록 금전을 치르고 방림을 떠났다. 그렇게 몇 해가 흘렀다.

 

어느 날 이원수는 식솔들을 만나기 위해 또다시 이곳 방림을 지나치게 되었고 주막을 들리게 되었다. 마침 주막에는 범상치 않은 인상의 중이 앉았다가 그를 맞으며 “액풀이를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내가 데려가야겠다”라며 아이를 내게 주지 않으려면 밤나무 일천 그루를 시주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원수는 일전 방림주모의 예언이 떠올라 “이 주변의 밤나무 일천 그루가 모두 내 것이니 가져가시오” 선뜻 대답하며 스님과 함께 한 그루 한 그루 세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찌 된 것인지 밤나무가 딱 한 그루 모자라는 것이었다. 당황한 이원수가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강 건너 갈참나무 숲에서 “나도 밤나무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를 들은 중은 표정이 일그러지며 갑자기 호랑이로 변해 갈참나무 숲으로 사라져 버렸단다. 이렇게 해서 나도밤나무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생겨났고, 이로 인해 방림지역에는 밤나무와 도토리나무가 많이 자생한다고 전한다.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다. 하마터면 이율곡이 봉평 판관대가 아니고 방림 주막에서 잉태될 뻔했다. 방림에 관한 한시로서는 손곡 이달(1539~1609)의 시가 좋았다.

 

방림역(芳林驛)

 

西陽下溪橋(서양하계교) 서녘 해 계곡 다리 비추고

落葉滿秋逕(낙엽만추경) 낙엽은 가을 길에 가득하다

蕭蕭客行孤(소소객행고) 쓸쓸한 나그넷길 외롭고

馬渡寒溪影(마도한계영) 말이 차가운 시내를 건너는 그림자뿐

 

우리는 천제당 둑길을 끝까지 가지 않고 방림면사무소 앞까지 걸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5시 50분이다. 오늘은 11km를 4시간 동안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