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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그대 도산서원에 간다면'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115]

[우리문화신문= 이동식 인문탐험가] 벌써 2년도 더 지난 2019년 7월에 우리나라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됨으로서 한국의 서원들은 어진 이를 높이고 선비를 기른다는 유교국가 조선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역사성과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우리나라의 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 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것이 그 효시이지만, 학문 연구와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이 독자성을 가지고 정착, 보급된 것은 퇴계 이황(李滉)에 의해서이다. 풍기군수를 맡고 있던 퇴계는 1549년에 백운동서원에 대해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받아냄으로서 서원이 나라에 의해 공인화되었고 그 뒤를 이어 서원들이 각지에서 건립되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의 서원문화를 일으킨 퇴계 이황(李滉, 1501 ~ 1570)의 학덕을 기리는 도산서원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원이다. 그런데 이 서원은 퇴계가 별세한 지 4년 후인 선조 7년에 그의 문인과 유림이 세운 것이고, 원래는 퇴계가 작은 집을 지어 유생을 가르치며 학덕을 쌓던 도산서당이란 건물이 있었을 뿐이었다. 여기에 서원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할 동서재(東西齋), 전교당(典敎堂:보물 210호), 상덕사(尙德祠 보물 211호) 등의 건물들이 새로 지어져 서원으로 확장된 것이다.

그런데 서원이 만들어지고 퇴계를 기리는 건물들이 많아지다 보니 퇴계가 애초에 이곳에 정착해 서당을 열고 그 속에서 무엇을 구현하려 했는가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지나쳐보는 경향이 있다. 서원 높은 곳에 위치한 전교당이나 상덕사 같은 건물에 비하면 서원 입구 쪽에 있는 서당 건물은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이 드러난 것이 올해 초에 이 도산서당 건물이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이다.

 

문화재청이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각각 보물 2105호, 2106호로 지정한 것이다. 도산서원의 전교당은 보물 210호인데 도산서당은 보물 2105호이니 그 사이 2천 여 개의 보물이 지정된 다음에 이제서야 서당의 가치를 알아보게 된 것이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난 여름에 우리나라 국보와 보물의 번호를 없애기로 했으니 이제는 다같은 보물이기는 하지만). 다시 말하면 향교와 서원이 보물로 지정된 적은 있지만, 서당이 목록에 오른 건 처음이다.

도산서당은 서원 출입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있다. 28.9㎡(약 9평) 크기의 아담한 건물이다. 그 앞에는 유생들의 숙소로서 이번에 함께 보물로 지정된 농운정사가 있다. 퇴계 스스로가 설계하고 지은 배움의 공간으로 1561년 완성한 이후 원 건물이 거의 달라지지 않고 유지돼 왔기에 사실상 가장 오랜 건물인데 이제야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도산서당을 세우기까지의 전 과정과 거기에 담은 퇴계의 생각을 퇴계는 <도산기(陶山記)>라는 글과 <도산잡영陶山雜咏>이라는 시를 통해 세세히 밝혀놓았다. 퇴계가 평생의 은거지로 택한 도산은 작은 골짜기가 있고, 앞으로는 강과 들이 내려다보인다. 그 모습이 그윽하고 아득하며 멀리 트이었으며 바위 기슭은 초목이 빽빽하고도 또렷한데다가 돌우물은 달고 차서 은둔할 곳으로 적합하였다.

퇴계가 땅을 구한 것은 57세가 되던 1557년. 이듬해 터를 닦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집을 짓는 일은 동네 스님이 맡아주었다. 5년 만에 두 채의 집을 마련했다. 서당 건물은 동편의 마루 1칸과 중앙의 방 1칸, 서편에는 부엌이 딸린 아주 작은 골방. 이렇게 조촐했다. 가운데 방에 거주하면서 동쪽 방에서 공부를 하고 서쪽 방에서 식사를 해결하도록 했다. 이렇게 작은 집을 짓고 각각의 방에 이름을 붙인다;

5년 만에 당사(堂舍) 두 채가 되어 겨우 거처할 만하였다. 당사는 3칸인데, 중간 한 칸은 완락재(玩樂齋)라 하였으니, 이는 주선생(朱先生)의 〈명당실기(名堂室記)〉에, “즐기며 완상하니, 족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라고 하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동쪽 한 칸은 암서헌(岩棲軒)이라 하였으니 그것은 주자 운곡(雲谷)의,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했으니 바위에 깃들여[巖棲] 작은 효험이라도 바란다.”는 시의 내용을 따온 것이다. 그리고 합해서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고 현판을 달았다.

이 완락재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설명은 주희가 쓴 <명당실기>라는 글에서 퇴계가 당 이름을 따서 썼다는 말만을 인용하고 만다. <명당실기>라는 글은 무슨 글일까? 좋은 집이라는 뜻의 명당에 관한 리포트인가? 우리 같이 한문을 잘 모르고 영어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뜻이 들어오지만 원 뜻은 명당(明堂)을 설명한 기록이 아니라 집과 방(堂室)에 이름을 붙인(名) 사연을 적은 글이다. 주희는 <명당실기>에서 자신이 만든 서당 건물 양 옆에 옆방 두 개를 만들고 그 이름을 경재(敬齋)와 의재(義齋)로 명명했다고 밝힌다.

나는 일찍이 주역(周易)을 읽고 두 마디 말을 얻었으니 "경(敬)으로써 안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의(義)로써 밖으로 몸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를 학문하는 요점으로 삼은 것은 이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다만 그 마음이나 힘이 어떻게 쓰이는지는 알지 못했다. 《중용》을 읽게 되었을 때 그 말하는 바가 도를 닦으라는 가르침이란 것을 알게 되어 모든 일에 반드시 경계하여 삼가고, 놀라고 두려워함으로 시작하였다.

 

그런 다음에 경(敬)을 지켜나가는 근본을 얻게 되었다. 또 《대학(大學)》에서 명덕(明德)의 순서를 논하는 것을 보고나서 격물(格物)과 치지(致知)의 실마리를 알게 되었다. 그런 다음에 이른바 의(義)를 밝히는 실마리를 알게 되었다. 이 두 가지 격물과 치지의 작용으로 한번 움직이고 한 번 멈추며 그 둘이 서로 작용하는 것으로 주돈이가 말한 태극(太極)의 이론과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으로서 천하의 이치(理致)인 ‘幽明鉅細、遠近淺深', 즉 어둠과 밝음, 가늘고 큰 것, 멀고 가까움, 깊음과 얕은 것이 모두 하나로 통함을 알게 되었다. (명당실기)

주희는 이렇게 공부를 통해 천하의 이치가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안 연후에 비로소 그것을 즐기고 즐거워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즐거움은 평생 싫어하거나 지겨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고 자연히 세상의 것들에 대해 부러워할 여가가 없다는 것이다. 퇴계가 한 줄로 이 완락(玩樂)이란 개념이 명당실기에서 왔다고만 했지만 실은 그 속에는 이렇게 성리학을 연마하는 근본 첩경(捷徑)이 들어있었다. 우리는 퇴계가 도산에 자리를 잡으면서 여기가 경치가 좋아서 완락을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이곳이 학문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탐구함으로써 더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즐거운 곳이라는 뜻이 들어가 있음을 알게 된다.

또 암서헌이란 이름은 이곳에서 주희처럼 세상의 어지러움을 떠나서 조용한 환경 속에서 학문의 본질에 더 가까이 가고 싶다는 뜻을 담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퇴계는 이 도산서당이 자리 잡는 자연환경을 단순히 보고 즐기는 선에 머물지 않고 이곳에서 진정으로 도를 연마하고 학문을 성취할 수 있다는 염원을 담아 두 방의 이름을 지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퇴계가 두 방의 이름을 완락과 암서로 지은 후에 비로소 이 둘을 합해서 이 건물에 도산서당이란 현판을 걸었다. 이로써 서당의 최소기준이 마련되었다. 곧 교무실(연구실)과 교실이 마련된 것이다. 이제는 학생들이 기숙할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은 것이 8칸으로 된 농운정사(隴雲精舍)이다. ‘농운(隴雲)’은 고개 위에 걸려있는 구름이고 ‘정사(精舍)’는 정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연구하며 가르치는 집을 뜻한다.

 

제자들이 공부하는 마루는 시습재(時習齋)라 하고 쉬는 마루는 관란헌(觀瀾軒)이라 하였다. 시습재(時習齋)의 시습이란 말은 《논어》의 첫 머리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學而時習之 不亦悅乎>에서 따온 것이다. 공부하다가 쉬는 마루의 이름 관란헌(觀瀾軒)은 《맹자》에 나오는 글귀로서, ‘물을 보는데도 법이 있으니 반드시 물결치는 이치를 살펴봐야 한다’는 말이다.

퇴계는 완락재를 공부방으로 삼아서 성리학적 이치를 담은 책들을 읽으면서 생활하였다. 천 여 권의 책을 좌우 서가에 나누어 꽂았으며, 화분 한 개, 책상 한 개, 연갑 하나, 안석 하나, 지팡이 하나, 침구, 돗자리, 향로 혼천의를 두었다. 남쪽 벽 윗면에는 가로로 시렁을 걸어 옷상자와 서류 넣는 상자를 두고 이외에 다른 물건은 없었다. 돌아가시기 10년 동안 이 방에 기거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렀고 정치에 관한, 학문에 관한 그의 철학을 밝혔다.

퇴계는 올바른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하는 선비들이 조정에 진출하고 있으면서도 계속되는 권력 싸움과 정치의 혼란으로 수많은 지식인들이 목숨을 잃거나 유배를 가고, 정치는 땅에 떨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그 근본적인 해법을 학문에 대한 근본 개념, 우주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해서 먼저 인간이 되어 정치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서 찾으려했던 것이다. 당시 끊임없이 연속되는 정치적 참화의 근본 원인이 나아가는 길만 있고 물러나는 길이 없는 데 있다고 보고 이 구조를 해소하고 퇴로를 뚫는 데 자신의 정치적인 역할을 찾아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

주희 이후 퇴계로 이어지는 도학자들이 생각하고 실천해 온 학자들의 길이 바로 이것이라면 그것은 현실에서 맞설 용기가 없어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도가 돌아오기를 촉구하는 수양과 학문의 길을 가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서 사회 전체를 밝고 바르게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도학자, 유학자의 길이 바로 그가 터를 정하고 제자를 기른 이 도산서당 속에 압축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당시 상황이 정치적인 재난이었다면 그것을 해결하는 방도를 여기에서 찾고 모범을 퇴계가 보였다. 도산서원의 핵심은 한석봉이 쓴 큰 글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산서당이라는, 퇴계가 쓴 세로로 된 작은 팻말과 그 건물에 담겨있는 것이다.

 

 

도산서원을 가면 맨 먼저 도산서당을 둘러보시고 이 작은 건물에 담긴 퇴계의 사상과 뜻을 조금이라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드리고 싶다. 그래야 진정한 퇴계를 만날 수 있지 않겠는가? 전교당에 올라 밑을 내려다보며 도산서원을 다 보았다고 생각하는 착각 혹은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