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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척 절벽 난간서 강물에 투신한 청심

오대천 따라 걷기 4-3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신기교를 건너면 거문리(巨文里)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구)59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오대천은 길의 왼쪽으로 흐른다. 거문리의 어원을 조사해 보았다. 옛날에는 거문리를 거커리라고 하였는데, ‘큰 글’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마을에 모양이 마치 붓끝처럼 생긴 문필봉(文筆峰)이라는 산이 있어서 거커리라고 하였다. 학자를 많이 배출할 지형이라고 한다. 벼농사가 잘 되어 ‘일강릉 이거컬’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거문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둥근 돌탑 2개를 쌓아 놓았다. 돌탑이 있는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거문리 마을이 나온다. 거문리는 넓은 분지 형상인데, 농경지가 많고 초등학교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마을이다.

 

우리는 거문리로 들어가지 않고 (구)59번 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날씨가 흐려지더니 비가 조금씩 뿌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이번 구간의 종착지인 청심대까지는 멀지 않았다. 장마전선이 중부지방에 걸쳐 있다는데, 오늘은 비 때문에 고생하지 않았다.

 

청심대가 있는 곳의 지명은 마평리이다. 마평리는 진부면의 남쪽 방향에 있는 마을로 《조선지지》에 마평리(馬坪里)이고 현재도 마평리이다. 조선 시대 말먹이를 주었던 곳이라 하여 마뜨루(마뜰)라고 하였는데 마평리로 표기하였다.

 

 

《평창군지명지》(평창문화원 2015년 펴냄)에서는 청심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청심대는 진부면 마평리에 있다. 청심대는 청심바우에서 오대천으로 떨어져 죽은 강릉 기생 청심의 절개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청심대에 오르면 양쪽으로 흐르는 오대천 줄기와 길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으며 청심대 아래에는 사당과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조선 초인 1412년(태조6년)에 강릉부사로 부임한 양수는 6년의 임기를 마치고 1418년 한양으로 가게 되었다. 양수를 사랑했던 관기 청심(淸心)은 부사에게 부실로 따라가기를 애원했으나 부사는 거절하였다.

 

청심은 배웅 차 따라와서 경치가 좋은 청심대 자리에 주안상을 차려 놓고 부사를 접대하면서 다시 한번 따라갈 것을 부탁하자 부사는 재차 거절하였다. 청심이 최후를 결심한 듯 양수에게 말하기를 ‘소녀 비록 천기이오나 관기법에 의하여 행례를 갖추고 평생 사또께 시종 키로 약속하옵고 바친 몸인데 여자의 도리로서 지켜야 할 예절이온즉 불경이부하고 일부종사인데 어찌 약속과 언약을 어기시고 이다지도 박대하심은 야속할 따름이오나 분부받자와 이행하겠사오니 원로 안녕 행차하시라’고 인사를 드린 다음 태연자약한 자태로 가무순행하다가 돌연 수백척 절벽 난간에서 강물을 향하여 투신하였다. 청심의 순절함을 목도한 부사는 명복을 축원하는 뜻으로 순절한 장소를 청심대라고 명명하고 절벽 난간의 쌍립기암(雙立奇巖)을 예기암(禮妓巖)으로 명명하여 영구히 호칭되게 하였다. 1927년에 거문리에 거주하던 남상철 선생의 주선으로 동지 107명을 규합하여 정자를 건립하였으며 지금도 마을에서는 청심제위원회를 구성하여 매년 청심제사를 올리고 있다.”

 

 

 

청심대 입구에는 마을에서 세운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안내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원 김홍도의 금강사군첩 첫 쪽에 그린 청심대>

 

“조선시대 1788년 개혁의 상징인 정조 임금의 어명을 받아 당시 도화서 화원 중에 가장 으끔 가는 단원 김홍도가 금강사군첩을 그리게 되었다. 정조가 구체적으로 내린 어명은 친히 가볼 수 없으니 그림을 통해 볼 수 있도록 진양 내금강과 외금강 회양, 평창과 강릉 등 금강산 접경을 사실적으로 두루 그려 오라고 한 것이다.

 

원주를 거쳐 금강사 가는 길목에 이곳 청심대를 지나가다 기생 청심이의 사연과 함께 빼어난 절경에 매료되어 붓을 들어 그리게 된 것이 바로 청심대라는 작품이다. 세로 37cm x 가로 43.7cm 크기의 ‘금강사군첩’(해산첩, 금강산화첩으로 불리기도 함)은 60폭 비단에 수묵 담채로 그려졌으며, 처음 그린 원본은 정조의 아들인 순조임금의 매제인 영명위 홍현주에게 하사되었다가 그의 아들인 홍우철에게 전해진 후 행방이 묘연하며, 화재로 소실되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현재 남아있는 작품 청심대는 당시 김홍도와 함께 활동하던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임모작(복사본)으로 추측되고 있다.

 

청심대라는 작품을 보면 청심대 가는 길에 말 두 필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아 마평이라는 우리 마을 이름의 유래를 다시 환기시켜 주고 있으며, 청심대 바위 위에 갓을 쓰고 부채를 흔들며 춤을 추는 듯한 사람들 모습이 그려져 있어 당시에도 많은 유람객들이 청심대를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금강산화첩 첫 페이지에 그린 청심대를 비롯하여 월정사, 사고, 중대 상원사 등 이곳 평창 진부면에서만 무려 다섯 점의 명작을 남기게 된 것은 문화적으로 우리 마을의 큰 자랑이다.” (글쓴이: 평창미술인협회장 화가 권용택)

 

 

 

마평리 마을에서는 청심대로 오르는 나무 계단에 청심이 이야기를 풀어서 작은 간판들을 만들어 붙여놓았다. 14개의 나무 간판에 쓰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여기 사랑을 위해 온몸을 던진 한 여성이 있습니다

2. 600년 전

3. 조선의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던 무렵

4. 그녀는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5. 결코 넘을 수 없었던 신분의 차이

6. 강릉부사와 관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7. 헤어져야만 했습니다.

8. 어쩔 수 없이 님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9. 그녀는 돌아설 수 없었습니다. 님은 비록 떠났지만

10. 이 산길 힘겹게 오르며 한 걸음 한 걸음 마음속 깊이 새겼을 것입니다.

11. 자신의 사랑을 영원토록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12. 일편단심(一片丹心)

13. 마침내 600년이 지나도 바위처럼 변치 않은 그 사랑

14. 청심은 오늘 우리 곁에 영원한 사랑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날 9명이 참가하여 동강 따라 걷기 제4구간 10.5km를 걷는 데에 4시간 25분이 걸렸다.

 

나는 이날 오전에 송정리에 있는 닭요리 전문 식당에 저녁 6시에 도착한다고 예약해 놓았다. 시간이 약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청심대 정자에서 우리는 판소리 판을 벌였다. 우리 팀에는 소리꾼이 세 사람이나 있어서 어디서나 소리판을 벌일 수가 있다.

 

 

 

나는 봄날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사철가를 불렀다. 은곡은 청심의 일편단심을 생각하며 춘향가 중의 쑥대머리를 불렀다. 해당은 수궁가 가운데 자라가 토끼 만나는 대목을 불렀다. 정자 바깥으로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앞산에는 구름이 내려와 걸쳐 있다. 판소리는 북 반주가 있어야 제맛이 난다. 북소리와 빗소리가 어우러진다. 모처럼 북 치며 소리하니 흥이 저절로 났다.

 

 

17시 40분에 청심대를 떠나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산골이야’기라는 이름의 식당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자락에 있었는데, 손님은 우리 일행뿐이었다. 찜닭을 맛있게 먹은 뒤에 우리는 주인장의 허락을 받고 즉석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내 친구 권중배가 클라리넷으로 2곡을 연주하였다. 친구는 넬라 판타지아 그리고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 가운데 후반부를 연주하였다. 이규성 교수가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제가를 불렀다. 가사에 대한 해설까지 친절하게 해주었다. 정선댁이 너영나영(‘너랑나랑’의 제주 사투리)을 불렀다. 숨은 고수(敲手) 은곡은 대중가요나 가곡을 불러도 북장단을 잘 맞춘다.

 

 

음악회를 끝내고 7시 20분에 식당을 나와 헤어졌다. 몇 사람은 진부역으로 가서 8시 출발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 정선댁은 정선으로 돌아가고, 은곡은 여우재로 돌아가고, 나는 내 친구 권중배와 함께 봉평 우리집으로 돌아왔다.

 

즐거움과 충만함을 느낀 행복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