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답사 날짜> 2022년 6월 27일 월요일
<답사 참가자> 이상훈, 박인기, 원영환, 최돈형, 홍종배 모두 5명
<답사기 작성일> 2022년 7월 11일
동강 따라 걷기 제5구간은 청심대에서 출발하여 막동계곡 입구에 도착하는 12.4km 코스이다.
이날은 장마전선이 중부지방으로 올라와서 비가 많이 내린다고 예보되어 있었다. 또한 공교롭게도 회원들이 이런저런 사정들이 겹쳐서 5명만이 답사에 참가했다. 경기도 용인에 사는 홍종배 교수가 가양을 태우고 차를 운전하고 와서 참가했다. 석영과 석주는 기차를 타고 진부역으로 왔다. 우리 일행 5명은 11시에 옛골청국장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서 청심대로 이동하였다.
은곡은 청심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은곡은 사정이 생겨서 참가를 못 한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막걸리 2병과 안줏거리를 우리에게 전해주고는 여우재로 돌아갔다. 자상하고 고마운 회원이다. 우리는 낮 1시 10분에 청심대를 출발했다.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커다란 우산을 들었다. 몇 사람은 비옷을 입었다. 비가 세차게 내렸다. 모처럼 비가 내리니 가뭄은 해소되겠으나, 홍수 피해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청심대가 있는 언덕의 남사면에 청심 사당과 열녀비가 있다. 사당의 왼편 아래쪽에 청심대를 세울 때 기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공적비 4개가 세워져 있다.
《평창군지명지》에서는 청심을 관기라고 표현했다. 청심이는 사랑하는 강릉부사를 따라서 한양으로 가고 싶었으나 두 번이나 거절당하자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다. 사랑을 거절당한 청심이는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청심의 마음속에는 배신의 감정이 남아있지 않았을까? 당시의 관기란 어떠한 신분이었을까? 나는 관기 제도가 궁금했다. 요즘에는 인터넷을 이용하면 모든 자료와 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 나는 기생제도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았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구려 시대부터 기녀제도가 도입되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관아에는 기생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기생(妓生)은 예기(藝妓)의 총칭으로서 춤ㆍ노래ㆍ기악ㆍ학문ㆍ그림ㆍ글ㆍ화술 등 모든 것에 능통한 종합 예술인이었다. 중종 때 ‘기생청’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기생을 선발하고 교육했다. 한양과 평양에 기생학교를 두고 15살에서 20살까지의 처녀를 입학시켜 가무ㆍ시ㆍ서화 등을 가르쳐 그들이 접대하는 상류층의 교양과 걸맞게 교육했다.
조선시대 기생은 일패기생, 이패기생, 삼패기생 등 3등급으로 분류되었다.
1) 일패기생: 오직 임금 앞에서만 노래와 춤을 하는 기생이다. 이들은 궁중의 약방(藥房)에 소속되어 약을 달이거나 상방(尙房)에 소속되어 바느질하다가 연회가 있을 때는 노래를 하고 춤을 추었다. 매춘은 거의 하지 않았으며 개인에 따라 유부녀도 있었다.
2) 이패기생: 관기와 민기로 나누는데 관기는 문무백관을 상대하며 민기는 일반 양반을 상대하여 노래와 춤을 춘다. 원칙적으로 매춘하지 않지만, 음지에서 매춘 내지는 성접대를 하기도 한다.
3) 삼패기생: 일반 평민을 상대하는 기생으로 노래와 춤, 매춘을 병행한다.
기생은 급에 따라 할 수 있는 노래와 춤이 제한되었다. 삼패기생은 일패, 이패 전용 노래와 춤을 못 하게 했으니, 자연스럽게 매춘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삼패기생이어도 일단 낮은 수준의 기예는 보장되어 있었으므로 이들조차 아무나 만날 수는 없었다. 삼패기생이라도 만나려면 돈이 꽤 필요했다. 기생은 조선시대의 5가지 신분(왕족, 양반, 중인, 평민, 천민) 가운데서 가장 낮은 천민에 해당하였다.
1907년 경술국치 직후인 1908년에 일제는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을 공포하고, 춤과 노래를 공연하는 '기생'(妓生)과 성매매를 하는 '창기'(娼妓)로 구분 지었다. 기생으로 영업하기 위해서는 경찰청에 신고하여 허가증을 받아야 했으며, 경찰청의 지시에 따라 조합을 설립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기생조합이 설립되었다.
초창기 기생조합은 유명 요릿집과 계약을 맺어 기생의 가무를 중개하고 수수료를 받는 형식이었다. 기생들은 기생조합의 중개로 요릿집과 같은 상업적 공간에서 영업하고 시간당 대가를 받는 형식으로 물질적 보상을 받았다. 경성에서는 1913년 지방 출신의 향기로 남편이 없는 기생을 모아 설립한 다동조합(茶洞組合)과 경성 출신으로서 남편이 있는 기생을 모아 설립한 광교조합(廣橋組合)이 설립되었다.
1915년부터 기생조합이 일본식 표현인 '권번'(券番)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다동조합은 '조선권번'으로, 광교조합은 '한성권번'으로 이름이 바꾸었다. 낙원동에 종로권번이 신설되고 이 세 권번이 경쟁하면서 명창들을 배출하였다. 경성 외에도 광주, 남원, 달성, 경주, 개성, 함흥 등의 지방에서도 권번이 설립되었는데, 특히 평양에 설립된 평양권번이 유명했다.
권번은 주식회사 제도로 운영되었으며 일제가 권번 관리를 주도하였다. 권번이 하는 기능은 모든 교육과정을 수료한 기생들이 요정에 나가는 것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것이었으며, 수수료를 챙기는 것은 물론 기생 양성 과정을 만들고 기생들의 수익을 나누었다. 권번에서는 요릿집에 매일 '초일기' (草日記)라는 이름의 기생 명단을 보내 단골손님이 아니더라도 기생을 부를 수 있게 했다. 물론 예약도 받았는데 일류 명기는 일주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을 지낸 고 장을병 교수가 2008년에 쓴 글에 보면 조선시대 옥소라는 기생이 손님을 다섯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옥소라는 기생은 손님들을 다섯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첫째, 불쌍하여 동정심이 드는 남자는 ‘애부(愛夫)’이고, 둘째, 돈 많고 풍채 좋아 인기 있는 남자는 ‘정부(情夫)’며, 셋째,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잘 만나지 못하는 남자는 ‘미망(未忘)’이고, 넷째, 여자를 지성으로 섬기는 남자는 ‘화간(和姦)’이며, 다섯째, 기생에게 미혹된 바보 같은 남자는 ‘치애(痴愛)’라는 것이다.
옥소의 남성 분류는 기본적으로 사랑의 방향에 따라 셋으로 나누고 있다. 우선 애부와 정부는 기생이 사랑하는 남자이고, 미망은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며, 그리고 화간과 치애는 기생을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가리키고 있다. 애부는 동정심으로 사랑하고, 정부는 세속적인 인기 때문에 사랑하며, 화간은 순정으로 사랑하고, 치애는 기생에게 미혹되어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사랑이다.“
청심에게 강릉부사는 어떠한 존재였을까? 아마도 정부 수준이 아니었을까? 청심은 강릉부사를 깊이 사랑했나 보다. 비록 그 사랑이 평등한 관계는 아니었을지라도. 청심은 강릉부사와 이별하게 되자 슬픔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나 보다. 그런 청심을 열녀라고 치켜세우고 사당까지 만들어서 기리는 것은 남녀를 차별했던 조선시대의 불평등 윤리라고 생각된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청심은 어리석은 여자고, 강릉부사는 무책임한 남자다.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현대에서 600년 전 조선시대 초기의 청심이 이야기는 결코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값어치가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청심대가 있는 곳의 지명은 마평리이다. 청심대를 지나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59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오대천을 건너는 다리가 나오는데, 이 다리의 이름이 청심교이다. 청심교를 건너 오대천의 왼쪽 언덕으로 가서 청심대를 바라보면 김홍도가 청심대를 그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장소가 나온다. 나는 사전 답사 때 다리를 건너가 사진을 찍어 제4구간 답사기에 포함했다. 이날 우리는 청심대 다리를 건너지 않고서 계속 남쪽으로 걸어갔다.
2차선 찻길 따라 조금 내려가면 오대천을 건너는 다리, 마평교가 나온다. 마평교를 건너서 오대천 왼쪽 언덕의 둑길을 따라가니 차가 거의 다니지 않아서 걷기에 편하다.
며칠 전부터 장마가 시작되어 많은 비가 왔기 때문에 오대천 물은 많이 불어 있었다. 이날 오전에도 강한 비가 내렸기 때문에 오대천은 완전히 흙탕물이었다. 오대천 상류에 공사 구간이 한 곳이라도 있으면 비가 조금만 와도 하천은 금방 황토색으로 변한다. 그러다가 비가 그치면 24시간 이내에 맑은 물로 되돌아간다.
이날은 오후 내내 비가 오락가락했다. 소나기가 내리다가 금방 그치고 푸른 하늘이 조금 보이다가 다시 구름이 몰려와 비가 쏟아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우산과 우의를 준비했다. 얇은 우의를 입고 큰 우산까지 드니 옷과 배낭이 젖지 않았다. 먼 산에는 안개가 낀 듯 구름이 낀 듯 아득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