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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이 좋은 날을 사는 것’

<산은 산 물은 물> - 3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주변을 살펴 보면 돈이라는 안경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고, 또한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사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다. 이러한 사람은 산을 ‘광물을 캐낼 수 있는 광산’으로 볼 것이며, 강물을 바라볼 때에 ‘강가에 매운탕 집을 차리면 돈벌이가 될까’하고 생각한다.

 

또한 물을 수자원으로, 나무를 산림 자원으로 보며, 심지어는 사람을 소중한 인격체라기보다는 인적 자원으로 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라고 개명했을 때에 크게 개탄한 적이 있다.) 경제라는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산이 주는 의미, 물이 가진 또 다른 의미를 놓치기 십상이다.

 

산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달리 설명할 길이 마땅치 않다. 그저 산에 들어가 보는 수밖에. 산과 계곡에 관한 재미있는 문자 풀이를 본 적이 있다. 仙(신선 선)이란 사람 인 변에 뫼 산으로, 산에 있는 사람이다. 俗人(속인)이라는 단어에 나오는 俗(풍속 속)이란 사람 인 변에 골 곡(谷)으로서 사람이 산에서 내려와 골짜기에 있는, 곧 다시 말해서 마을 또는 도시에 사는 것을 나타낸다. 사람이 도시를 떠나 산에 들어가면 신선이 되는 것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세 번째 사례로서 이성(理性)의 함정 또는 한계를 들 수 있다. 이성이란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으로서 서양 철학에서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이라는 명저를 남겼다. 중국의 임어당은 일찍이 칸트의 철학 책은 어려워서 3장 이상을 읽지 못하겠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나 역시 서양철학에 대해서는 임어당과 동감하는 바가 많으며, 칸트의 책을 구경은 했지만 어려워서 끝까지 읽지는 못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참된 진리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쉬운 것임을 느끼게 된다.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서양 철학사를 장식하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책을 다 읽어 보아야 이해할 수 있는 진리라면 그러한 진리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진리가 아닐까 한다. 나는 요즘에 점점 동양 철학에 매력을 느낀다. 읽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서양 철학자의 저서들은 노자가 ⟪도덕경⟫ 첫머리에서 지적한 대로 “도를 도라고 하면 참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는 한 구절에 모두 날아가 버리고 만다.

 

특정인을 가리켜서 미안하지만, 나는 처음에는 도올 김용옥 교수를 학자로서 존경하였는데, 요즘에는 오히려 불만스럽다. 도올은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연구를 많이 하지만 그의 저서들은 너무 현학적이어서 오히려 진리를 설명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진리는 의외로 간단하며 쉽지 않을까?

 

어째서 이성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에 방해가 되는가?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몇 년 전인가 매직아이(magic eye)라고 해서 이상한 책이 유행한 적이 있다. 책을 펼치면 그림이 나오는데 여러 가지 이상한 모양의 천연색 무늬가 종이 전체를 채우고 있다. 그림 자체는 우리가 아는 어떤 형태를 나타내고 있지 않다. 그저 무질서한 무늬의 혼합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서 그림을 5센티미터 정도에서 시작하여 점점 멀리하면서 바라보면 어느 순간 3차원의 새로운 형태가 나타난다. 아무것도 없던 그림에서 송아지가 보이기도 하고, 토끼가 보이기도 하고, 글자가 나타나기도 한다.

 

나도 숨겨진 그림을 보기 위하여 오랫동안 노력을 하였으나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성공을 하여 숨겨진 그림들을 볼 수 있었다. 매직아이를 볼 때에 주의할 점은 냉철한 이성을 통하여 보려고 하면 할수록,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흐릿한 눈으로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그림을 바라보아야 한다. 냉철하게 깨어 있는 이성은 매직아이 그림을 볼 때에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성철 스님의 법어에 대한 ‘있는 그대로 보라’라는 주석은, 내가 해석하는 바로는 사물을 볼 때에 우리가 지금까지 갈고 닦은 이성은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제자들에게 “책을 읽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다는데, 그 뜻은 스스로 탐구해서 몸소 체험해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성에만 의존해서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불교에서 선지식들이 본 세상은 매우 아름답고 장엄하며 모든 생명들이 살아 있음을 노래하는 환희에 찬 세상이라고 한다. 이성을 통하여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 속에 숨겨져 있는, 아름답고 환희에 찬 다른 차원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세상을 보려면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현재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교육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가르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그저 잡다한 지식, 암기용 지식만을 가르칠 뿐 아름다운 세상을 보는 데 필요한 감성 교육은 도외시하고 있다. 우리의 아이들은 살아 있는 꽃을 들여다보고 만져 보고 냄새 맡고 느끼는 경험 없이 인터넷에 떠 있는 꽃의 모습과 이름만을 외울 뿐이다. 사람과 꽃과의 접촉이 빠져 있다.

 

현재의 교육 제도는 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결과 대부분의 아이들은 꽃을 좋아하고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며 꽃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라”라는 말에서 ‘본다’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본다는 것은 꼭 눈으로 본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말은 매우 시사적이다. 알아 보라, 먹어 보라, 들어 보라, 가 보라, 와 보라, 살아 보라 등등 동사의 뒤에 보조용언으로 쓰이는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알아 보라’를 영어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 ‘know and see'’ 정도로 어색하게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에서 알아 보라는 표현은 안다는 것보다 본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사물을 지식으로서 아는 것보다는 알고서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 보라’는 우리말 표현은 정확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이다. 있는 그대로 보는 세상은 어떠한 세상일까? 그러한 세상은 안경을 벗어야 보이는 새로운 세상이다. 그것은 마치 햇빛이 비치는 동안에는 우리가 별빛이 찬란한 밤하늘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햇빛이 사라져야 찬란한 우주를 볼 수가 있다. 그러한 세상은 깨달을 수는 있으나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굳이 표현하려 한다면 시나 선문답 같은 비유를 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교의 ⟪화엄경⟫에서 화엄이란 화려장엄한 세상을 말한다. 만공(滿空) 스님은 그러한 세상을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표현하였다. 이 세상을 하나의 꽃으로 비유하고 다음과 같은 법문을 남겼다.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다.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의 꽃

어리석은 자들은 온 세상이 꽃인 줄을 모른다.

그래서 나와 너를 구별하고, 내 것과 네 것을 분별하고,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다투고 빼앗고 죽인다.

허나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아라.

흙이 있어야 풀이 있고, 풀이 있어야 짐승이 있고,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네가 있는 법.

남편이 있어야 아내가 있고, 아내가 있어야 남편이 있고,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부모가 있는 법.

남편이 편해야 아내가 편하고, 아내가 편해야 남편이 편한 법.

남편도 아내도 한 송이 꽃이요, 부모와 자식도 한 송이 꽃이요,

이웃과 이웃도 한 송이 꽃이요, 나라와 나라도 한 송이 꽃이거늘.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는

이 생각을 바로 지니면 세상은 편한 것이요,

세상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고 그릇되게 생각하면

세상은 늘 시비하고 다투고 피 흘리고

빼앗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참 뜻을 펴려면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참새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심지어 저 미웠던 원수들마저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요,

다른 교를 믿는 사람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하나의 아름다운 꽃으로 보는 것을 방해하는 3가지 안경 곧 선입견의 안경, 돈의 안경, 이성의 안경을 벗어야 한다. 우리가 3가지 안경을 벗고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세상은 감탄할 정도로 장엄한 하나의 꽃과 같은 세계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임금님을 보고서 어른들은 옷이 근사하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있는 그대로 보고서 “임금님은 벌거벗었다”라고 외쳤다. 이야기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어른들은 있는 그대로 보지도 말하지도 않는다. 자꾸 여러 가지 안경을 통하여 굴절된 세상을 보고 말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어린 아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유치원에서 이미 다 배웠다는 말이 있다. 들에 나간 어린 아이는 처음 보는 꽃을 발견하면 따져보지 않고 감탄할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새 꽃을 보고서 감탄하는 대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거나 아예 관심이 없을 것이다.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지식을 자꾸 늘려가지만 세상의 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에서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지 않는가? 슬픈 일이다!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새들과 들꽃과 함께 어울려 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릴 수 있겠느냐? 또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지 못하였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느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오 7:19-34)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가장 생태적이고 감동적인 구절이어서 다소 인용이 길어졌다. 불교에서는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며 살아가는 현자(賢者)의 모습을 간단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날이 좋은 날! (日日是好日)’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법어의 결론은 나날이 좋은 날을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