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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대사헌 안숭선과 태조~세조 때 활동한 안지

세종시대를 만든 인물들 - ⑧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15]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들을 살피고 있다. 졸기를 중심으로 안경공, 안순, 안지를 살펴보자.

 

∙ 안경공(安景恭 충목 3, 1347 ~ 세종 3, 1421)

 

세종 이전에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데 이바지한 인물이다. 소개를 대신하여 졸기를 보자.

 

“흥녕 부원군 안경공(安景恭)이 졸(卒)하였다. 경상도 순흥부 사람이었다. 판문하부사 안종원(安宗原)의 아들로 사람됨이 단정하고 근엄하며, 고려의 병진년(우왕 2년, 1376)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번 승진하여 밀직사(密直司) 좌부대언이 되었고, 태조께서 개국할 때 여러 장상(將相)과 같이 추대하여 좌대언으로 승진되고,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에 책정되었다가 관제(官制)가 시행되면서 중추원 도승지로 임명되고, 사헌부 대사헌에 승진하여, 공안부(恭安府)와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고 부원군으로 승진하였다. 일찍이 경상ㆍ전라ㆍ황해도의 안찰사가 되었는데 너그럽고 간단명료하여 까다롭게 굴지 아니하였다. 죽던 해에 나이가 75살이다. 조정 일을 3일 동안 정지하여 조의를 표하고 시호를 양도(良度)라 하였다. 온순하고 착하고 좋아하고 즐겨하는 것이 뛰어나고, 의로운 일을 좇는 마음은 깊었다. 아들은 안순(安純)이다.” (《세종실록 》3/1/10)

 

 

∙ 안숭선(安崇善, 태조 1, 1392 ~ 문종 2, 1452)

 

대사헌, 도관찰사, 병조판서, 예문과대제학을 지낸 좌참찬 안숭선의 졸기를 보자.

 

“좌참찬(左參贊) 안숭선(安崇善)이 졸(卒)하였다. 고려(高麗)의 찬성사(贊成事)인 안축(安軸)의 5세손(五世孫)이다. 집안이 대대로 이름이 나 세력 있는 가문이 되었는데, 안숭선은 본디부터 매우 총명하여 여러 사람 가운데 훨씬 뛰어났다. 처음에 문음(門蔭, 집안의 공으로 벼슬함)으로써 계성전직(啓聖殿直)에 보직되었다가 여러 번 승진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 경자년(세종 2년, 1420)에 문과 장원에 발탁되어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임명되었는데, 일을 당하면 빨리 처리하는 것이 손바람이 날 정도였다.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전직되어 행정의 재간으로써 한 시대에 이름이 나타났다. 사헌부 장령(掌令)과 집의(執義)에 이르렀으나, 나라일에 관한 말을 했던 까닭으로 좌천(左遷)과 파직되었다. 세종(世宗)께서 공녕군(恭寧君)을 북경(北京)에 보냈을 때 안숭선으로써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다. 대호군(大護軍)에 임명되었다가 조금 뒤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으며, 마침내 지신사(知申事, 도승지)로 발탁되어 왕명을 출납함이 공명하고 진실하였다. 특별 대우를 받아서 여러 번 밀지(密旨)를 받았으나 동료들은 참여해 듣지 못하였다. 또 동료들을 속박하여 억제하였으므로 모두 그를 싫어하였다. 계축년(세종 15년, 1433)에 북방을 정벌할 때 조정의 의논이 어떤 이는 옳다고 하고 어떤 이는 그르다고 하니, 세종(世宗)께서 뜻을 결정하지 못하여 계획을 안숭선에게 물으니, 안숭선이 대답하기를,

 

‘갑옷입고 투구를 쓴 무사(武士)는 정벌하자고 하고 문신은 화친하기를 말하고 있지마는, 신(臣)의 헤아린 바로써는 이만주(李滿住)는 죄악이 매우 크니 역적을 치는 군대는 늦출 수가 없습니다.’

 

하니, 세종(世宗)께서 뜻을 결정하였는데, 그 정벌 계획은 모두 그가 주간하도록 하였다. 김예몽(金禮蒙)이 일찍이 경연에서 이 말을 듣고는 물러 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이르기를,

 

‘신하가 임금의 특별한 은혜를 입고서는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였다. 어미 상을 당하여 상복(喪服)을 벗고 나니, 대사헌으로 임명되었다가 공조 참판으로 옮겨졌으며, 경기도관찰사로 전직되었다가 병조판서가 되었다. 평안도에서 백성이 굶주리니 안숭선이 천거되어 도관찰사로 삼았는데, 임지(任地)에 간지 두서너 달 만에 병으로써 사직하였다. 조금 뒤에 예문관 대제학으로 임명되었는데, 이종원(李宗元) 사건이 일어나서 고성현으로 귀양 갔으나, 스스로 사실이 없었으므로 슬퍼하고 통분하여 병이 되니, 세종(世宗)께서 그가 다른 뜻이 없음을 알고서 직산(稷山)으로 양이(量移, 귀양간 사람의 죄를 감하여 서울의 가까운 곳으로 옮겨 두던 일)했다가 조금 뒤에 불러서 돌아오게 하였다. 임금께서 즉위하시니 중추원사(中樞院事)로 임명하였다가 조금 뒤에 의정부 좌참찬으로 발탁되고 병조판서의 일과 세자 좌빈객(左賓客)을 겸하게 하였다. 전날 사람을 임용한 것이 잘못된 일로써 글을 올려 굳이 사양했으나, 임금은 이종원(李宗元)의 사건이 고의로 범한 것이 아니라 하여 마침내 윤허하지 아니했다. 중죄를 얻은 뒤로는 일에 임하여 두려워함이 많았으며 또 병으로써 항상 집에 있다가 졸(卒)하였다. 불사(佛事)를 시행하지 못하도록 하고,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르게 유언하였다. 조정과 민간에서 그의 사람 된 품을 애석하게 여겼다. 안숭선은 지조와 절개가 있으며, 총명하고 예민하여 굳세고 과단성이 있어 시비를 판단함이 흐르는 물처럼 신속히 처리하여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남이 재간이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사랑하여 마지않았으며, 사람된 품이 단정하고 아담(雅澹)하며 온화하고 엄숙하니 사람들이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러나, 과단성이 지나쳐서 좋아하고 미워함이 치우침이 있게 되어 그에게 붙좇는 사람은 반드시 비호(庇護)하려고 하여 추천 발탁함이 틈이 없을 정도였는데, 이런 일로써 마침내 이종원(李宗元)의 화(禍)를 당하게 되었다.

 

문숙(文肅)이란 시호를 내렸으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이 문(文)이고, 마음을 집중(集中)시켜 결단하는 것이 숙(肅)이다. 두 아들은 안훈(安訓)과 안의(安誼)다.“ (《문종실록》 2/4/14)

 

 

 

∙ 안지(安止, 고려 우왕 10, 1384년 ~ 세종 10, 1464년 8월 4일)

 

조선의 문신이다. 태종 14년 (1414)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세종 때 수찬ㆍ예문관 제학 등을 지냈으며 정인지와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세종 28년(1446) 호조참판으로 정조사가 되어 명에 다녀왔다.

 

세종 30년 공조판서, 이듬해 예문관대제학, 단종 3년(1455)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단종 7년(1461) 판중추원사를 거쳐 세조 9년 검교영중추원사(檢校領中樞院事)에 이르렀다.

 

태조 때부터 세종, 문종, 단종을 거쳐 세조에 걸쳐 활동했다. 시에 능했으며 해서를 잘 써 세종의 명으로 태종을 위해 《금자 법화경》을 썼다.

 

안지의 졸기를 보자.

 

“영중추원사(領中樞院使) 안지(安止)가 졸(卒)하였다. 전라도 탐진 사람이다. 문과에 2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 박사로 임명되었다가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집현전 부제학을 지냈고, 이조 참판ㆍ공조 판서로 옮겼다. 《고려사(高麗史)》 사건으로 직첩을 뺏겼다가 세조 원년에 소환하여 지중추원사에 임명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영중추원사 봉조청(奉朝請)(문무 당상관이 나이가 많아 벼슬길에서 물러날 때 그 벼슬을 특별히 그대로 띠고 물러나게 하던 것. 또는 그 이름)으로 되었다. 남쪽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졸(卒)하니, 시호(諡號)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는데, 글을 널리 많이 본 것은 문(文)이라 하고, 온유 강직하여 명대로 살다가 죽은 것은 ‘정(靖)’이라 한다.

 

안지는 충직하고 온순하며 인정이 두터우며 문장을 읽어서 잘 짓고 해서(楷書)에 능하였는데, 무릇 시(詩)를 지을 때 사투리를 섞어서 썼고, 편간 척독(片簡尺牘, 종이대신 대쪽이나 나무껍질)에 모두 시(詩)로써 뜻을 나타냈다. 마음가짐이 유연하여 세정(世情)에 얽매이지 않았고, 집이 매우 가난하고 쓸쓸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형편이었다. 임금이 즉위하여 불러서 벼슬을 주었는데, 그때 안지의 나이가 80살이었으나, 기력이 강건하니, 임금이 기뻐서 시를 지어서 내려 주었다. 안지가 평생 남의 선(善)한 것을 칭찬하고, 오로지 이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세조실록》 10/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