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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세종을 도운 올곧은 한 선비 ‘하연(河演)’

세종시대를 만든 인물들 -⑭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21]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을 살피고 있다.

 

하연과 한상경, 황보인을 보자.

 

 

하연(河演, 우왕 2년 1376년 ~ 단종 1년 1453)

 

하연은 조선 초기의 영의정을 지낸 문신이자, 성리학자, 서예가, 시인으로 문종의 스승이다.

 

하연의 졸기를 중심으로 그의 활동을 살펴보자.

 

“영의정(領議政)으로 잉령치사(仍令致仕, 임금의 영 에 따라 그대로 벼슬에 머묾)한 하연(河演)이 졸(卒)하였다. 하연은 진주 사람이다. 병자년(1396 태조 5년)에 과거에 올라 봉상 녹사(의정부 중추원의 벼슬아치)에 보직(補職)하였다가 뽑혀서 직예문 춘추관 수찬관이 되고 여러 관직(官職)을 더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이르렀다가 승정원 동부대언에 발탁 제수되었다. 태종(太宗)이 하연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경은 이 벼슬에 이른 까닭을 아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경이 대간(臺諫)에 있을 때 의연하게 일을 말하였으므로, 내가 곧 경을 알았다." 하였다.

 

세종이 내선(內禪, 후손에게 양위)을 받자, 지신사(知申事, 밀직사의 정3품 관직)에 제수하였다. 이때 나라에 일이 많았는데, 하연이 조심하고 근신하여 그 사이에서 일이 잘 되도록 힘을 쓰니, 두 임금의 대우가 매우 융숭하여 예조 참판에 제수하고, 대사헌에 옮겼는데 부처의 일을 논하니, 세종이 기꺼이 받아들여서 조계종(曹溪宗) 등 7종(宗)을 혁파하여 단지 선(禪)ㆍ교(敎) 2종만 두고 아울러 주군(州郡)의 절의 제사와 토지를 헤아려 줄였다.

 

뒤에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어떤 일로 파면되어 천안군으로 귀양이었었는데, 얼마 안 되어 불러서 병조 참판에 제수하였다가 형조 판서ㆍ이조 판서에 오르고, 의정부 참찬 겸 판이조사(判吏曹事)으로 옮겼다. 여러 번 승진하여 좌찬성과 좌의정에 이르고 나이가 70에 궤장(几杖, 70살 이상 2품 이상 대신에게 주는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받았다.

 

 

영의정이 되자 문종(文宗)이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고자 하니, 하연이 불가함을 고집하였다. 신미년(1451, 문종 원년)에 늙고 병듦으로써 물러가기를 청한 것이 두 번이었으나 본직(本職)으로 그대로 있게 하였다. 유명으로 불사(佛事)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나이는 78살이나, 성품이 대쪽 같고 어버이 섬기기를 효성으로 하며, 친족에게 화목하기를 인으로써 하고, 옛 친구를 버리지 아니하였다. 또 경축(慶祝)과 조위(弔慰)를 폐하지 아니하고, 글 보기를 즐기고 시(詩)를 읊기를 좋아하며, 재산 모으는 데 힘쓰지 아니하고 여색에 빠지지 아니하여 가정이 화목하였다.

 

관(官)에 있어서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밝게 살피기를 힘쓰고, 일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두 어버이가 모두 나이 80살인데, 무릇 그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면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구경당(具慶堂)을 지어서 세시복랍(歲時伏臘 설ㆍ삼복ㆍ납향)에 반드시 술잔을 받들어 올려서 수(壽)를 칭송하니, 사람들이 모두 영광으로 여겨서 그 일을 노래하고 읊조리기까지 하였다. 어버이가 죽으니 나가고 들어올 때는 반드시 사당(祠堂)에 고하며 또 구경당을 그 아버지가 거처하던 곳이라고 하여 해마다 수리하고 이엉을 덮어서 이름을 영모(永慕)라고 고쳤는데, 아들과 조카들이 기와로 바꾸기를 청하니, 하연이 탄식하기를,

 

"선인의 예전 살던 집을 어찌 고치리요. 또한 우리 후세가 선인의 검소함을 본받게 함이 족하다." 하였다. 의정부에 있은 지 전후 20여 년에 사대부를 예(禮)로 대접하고, 문(門)에서 사사로이 찾아 청탁을 받지 아니하고, 처음에서 끝까지 몸가짐을 삼가며 법을 잡고 굽히지 아니하였으니, 태평 시대의 문물(文物)을 지킨 정승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그 논의가 너그럽고 온화하지 아니하여 대신의 체면을 조금 잃었고 늘그막에는 일에 임하여 어둡고 어지러웠으나, 오히려 한가롭게 세월을 보내면서 물러가지 아니하다가 벼슬을 사양하기에 이르렀다. 또 급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글을 올리니, 이때 사람들이 이로써 작게 여겼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함을 지키기를 하연과 같이 한 이도 적었다. 시호(諡號)는 문효(文孝)인데,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은 문(文)이고, 자혜(慈惠)하고 어버이를 사랑함은 효이다.”(《단종실록》1/8/15)

 

세종을 도운 조선 초의 올곧은 한 선비를 만날 수 있다.

 

 

한상경(韓尙敬, 공민왕 9, 1360 ~ 세종 5, 1423)

 

세종 때 세상을 떴으나 태종 때 주로 활동한 문신이다. 그의 졸기를 보자.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 한상경(韓尙敬)이 졸하였다. 본관은 청주이다. 고려 왕조에 벼슬하여 사선 서령(司膳署令)에 임명되었는데, 임술년 문과에 제3인으로 뽑혀서 예의 좌랑에 임명되고 우정언(右正言)으로 옮겼다. ... 우리 태조가 나라를 세우매, 태조를 추대한 모의(謀議)에 참여하고, 옥새(玉璽)를 받들어 태조에게 올렸으므로, 익대 개국 공신(翊戴開國功臣)이란 칭호를 내리었다.

 

밖으로 나가서 충청도 도관찰사가 되고, 서원군(西原君)에 책봉되었다. 또 경기좌도 도관찰사가 되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매, 상경(上卿, 정일품과 종일품의 판서)에게 이르기를,

 

"내가 큰 왕업(王業)을 계승하였으매, 세상을 다스릴 줄을 알지 못하여 마음속으로 실상 어렵게 여긴다."라고 하니, 상경이 대답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임금이 임금 노릇하기 어렵게 여긴다.’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그 어려움을 능히 아시니, 실로 우리 동방(東方)의 복이옵니다. 그러나 이를 아는 것이 어려움이 아니라, 이를 실행하는 것이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이 말을 옳게 여겨 받아들이고,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에 임명하였다. 태종은 〈명나라〉 황제가 북방을 순행하매, 상경을 보내어 안부를 묻게 하였다.

 

삼공신(三功臣)이 술잔을 올리는데, 상경이 술잔을 들어 올리니, 태종이 이르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처음에 경이 나에게, ‘임금은 임금노릇 하기가 어려운 줄을 알아야 하며, 아는 것이 어려움이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 어렵다.’라고 했는데, 내가 지금도 잊지 않았다."라고 하니, 상경이 대답하기를,

 

"임금께서 이미 신의 말을 잊지 않으셨다고 하니, 다시 한 말씀을 아뢰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은,

"무슨 말인가."라고 하매, 대답하기를,

"시초는 없지 않으나, 종말이 있기는 적습니다."라고 하니, 또 칭찬하였다.

 

상경은 평소부터 풍질(風疾, 중추신경에 탈이 나서 생기는 병)을 앓았는데, 경자년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슬퍼하며 예절을 다했으니, 이로 말미암아 병이 더욱 심하였다. 임금께서 매우 염려하여 대언(代言)을 보내어 고기를 먹도록 명하고, 내의(內醫)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고 위문과 물품을 내림이 그치지 않았는데, 이때 돌아가니, 나이 64살이였다.”(《세종실록》5/3/7)

 

한상경은 세종의 시대를 여는 데 이바지한 문신이라 하겠다.

 

 

 

황보인(皇甫仁, 우왕 13, 1387~ 단종 1, 1453)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1387년(우왕 13)에 출생하였으며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에 급제, 세종 때 장령ㆍ강원도관찰사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세종 20년(1440) 평안도와 함길도 체찰사가 된 뒤 10년 동안 절제사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육진(六鎭)을 개척하였다.

 

좌ㆍ우찬성(左右贊成)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1452년(문종 2) 영의정이 되어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端宗)을 보좌하다가 1453년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김종서와 함께 수양대군에게 살해되고, 아들과 형제 그리고 어린 손자도 이때 화를 입어 모두 살해되었다.

 

1719년 숙종 때 부분적으로 복관(復官)되었으며, 1758년 영조에 이르러 완전하게 복관되어 충정(忠定)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정조 때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포항 구룡포의 광남서원(廣南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그리고 종성(鐘城)의 행영사(行營祠)에 제향되었다.(참고: 두피디아)

 

황보인은 세종 시대에 육진 개척에 큰 공헌을 한 문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