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조금 내려가니 장구목이 입구가 오른쪽으로 나타난다. 여기는 가리왕산 등산로 입구인데, 안내판을 읽어보니 정상까지는 4km 거리이다. 마침 옆에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이 있어서 우리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시계를 보니 낮 2시 50분이다.
여러 사람이 배낭에서 먹을 것을 꺼내 놓았다. 쑥떡, 오이, 초코렛, 와인, 믹스커피 등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커피는 믹스커피만을 마신다. 커피 만드는 데 시간이 들지 않고 간편하기 때문이다. 내 입맛은 매우 싼 입맛이다. 단순한 생활을 추구하는 나의 생활철학에 딱 맞는 것이 믹스커피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믹스커피는 몸에 해롭다고 (근거는 잘 모르겠지만) 먹지 않고 블랙커피만을 마신다. 그래서 이날 나는 뜨거운 물 두 병, 그리고 커피믹스 몇 봉지와 카누(블랙커피 상표) 몇 봉지를 함께 준비해왔다. 우리는 풍성한 간식을 먹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화제는 과거 대학생이었던 시절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흘러간 옛 연도를 계산해 보았다. 내가 1972년도에 대학을 졸업했으니 벌써 51년이 지났다. 반세기가 지난 것이다. 아, 세월이 참으로 덧없이 흘러갔다! 그때 나는 서대문구 홍은동 달동네 방 두 칸 집에서 아홉 식구가 살았다. 장남이자 대학생인 내가 동네 공동수도에서 큰 물통과 물지게로 매일 물을 길어다가 식수와 세탁용수로 사용하였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이다.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박경리 작가와 박완서 작가가 청춘예찬을 거부한 심정에 공감이 간다.
우리는 25분을 쉬고서 3시 15분에 다시 출발하였다. 길의 왼쪽으로 오대천이 길 따라 흐른다. 아니다. 오대천이 먼저 흘렀고, 나중에 사람들이 길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도로가 오대천을 따라 만들어졌다. 이 지역에는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아서 오대천은 자연 상태의 모습을 아름답게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지나간 장구목이 입구에서부터 정선군 북평면 숙암리이다. 우리나라에 북평이라는 지명이 3개가 있는데, 강원도 동해시 북평동, 그리고 전남 해남군 북평면이 있다. 해남 북평면은 우리 일행이며 판소리를 잘하는 해당 오종실의 고향이다. 숙암리(宿岩里)라는 지명은 정선군에서 평창군으로 다니는 길이 나 있었는데, 길손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바위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해서 숙암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숙암 교차로를 조금 지나자 왼쪽에 버스 정류장이 나타난다. 정류장의 투명한 벽에 정선아리랑이 새겨져 있다. 정선아리랑은 진도 아리랑, 밀양 아리랑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아리랑 가운데 하나다. 정선아리랑 가사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버스 정류장 벽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려나
만수산 먹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 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우리나라 지명에 만수산은 3개가 있다. 인천의 만수산, 부여의 만수산 그리고 개성의 만수산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정선아리랑 가사에 나오는 만수산(萬壽山)은 (현) 개성시 북쪽에 있는 개경의 주산을 말한다고 한다. 이 만수산은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하여 이방원이 읊었다는 시조 ‘하여가’에 나오는 만수산과 같다. (정몽주는 하여가에 대한 답으로 단심가를 지어 읊었다.)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 유신들 가운데 72명이 충절을 맹세하고 숨어든 곳이 개성의 두문동이었다. 그러다가 이성계의 회유가 집요해지자 다시 이를 피해 유신 일곱 명이 강원도 정선 땅으로 숨어들었다. 7명의 이름은 전오륜, 신안, 변귀수, 김충한, 고천우, 김위, 이수생이며 이들을 기리기 위한 거칠현(居七賢) 공원이 정선군 남면 낙동리에 있다. 이들이 살았던 곳을 후세에 거칠현동이라고 불렀고 칠현비 비석까지 세웠다.
정선아리랑의 첫 연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려나, 만수산 먹구름이 막 모여든다”라는 고려가 망하는 것을 한탄하며 칠현 가운데 한 사람인 전오륜이 쓴 한시를 우리말로 풀어쓴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정선군 남면 낙동리가 정선아리랑의 발상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오대천 따라 조금 더 내려가자 오른쪽으로 정선가리왕산 케이블카 건물이 나타난다. 가리왕산(고도 1561m)은 정선과 평창의 경계지역에 있다. 옛날 맥국의 갈왕(葛王 또는 加里王)이 이곳에 피난하여 서심퇴라는 곳에 도읍을 정하고 성을 쌓고 머물렀다고 하여 갈왕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북쪽 골짜기에는 갈왕이 지었다는 대궐터가 남아 있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때에 가리왕산 이곳에 알파인 스키장을 만들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산림청에서는 훼손된 숲을 다시 복원할 계획이었는데, 주민들이 반대해서 결국 케이블카를 설치하고 리조트 시설을 추가하여 현재는 관광지가 되었다.
카카오맵에는 케이블카 건물이 ‘숙암역’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나머지 고층 건물들은 정선 알파인 리조트의 숙박시설이다. 카카오맵에서 리조트 건물은 ‘파크로쉬리조트앤웰니스’라고 표시되어 있다. 나는 미국에서 6년이나 살았기 때문에 영어를 어느 정도 해독하는 편인데도,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누가 작명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라는 한글을 너무 푸대접하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
리조트에서 남쪽으로 100m 정도 내려가자 오른쪽 길가에 식당이 하나 보인다. 그 식당의 이름은 재미있게도 ‘맛있네맛있어’이다. 식당 주인은 나처럼 세종대왕을 존경하나 보다. 식당을 지나자 역시 오른쪽에 ‘숙암 농원’이 나타난다. 노원 안에 크고 작은 멋있는 반송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니 반송을 전문적으로 재배하여 파는 농원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