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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는 공연과 전시

간토대지진 때 희생된 조선인을 위한 진혼의 밤

랑코리아 10주년 기념공연, 인문음악회 '비에도 지지않고' 열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26일) 저녁 7시 성남아트리움대극장(성남시 수정구 태평동)에서는 아주 특별한 공연이 있었다. ‘가행(歌行), 비에도 지지않고’라는 제목의 음악회였는데 그 내용을 말하자면 가을밤에 흔히 들을 수 있는 단순한 음악회가 아니라 문학과 어우러진 ‘음악ㆍ문학’의 밤이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거기에 더하나 보탠다면 그 주제가 ‘간토(관동)대지진 100년, 대표적 문학작품을 통한 진혼의 밤’이었으니 주제면에서는 다소 무겁지만, 의미면에서는 이 가을의 숱한 음악회 가운데 가장 뜻깊은 공연이 아니었나 싶다.

 

 

“오늘, 10월 26일은 100년 전에 9월 1일 간토대지진과 간토대학살을 겪고 난 뒤 조선인 사망자를 위하여 동경에서 추도회가 처음 열린 날이라고 합니다. 또한 동아일보 지방판 '대구호'에 동경 유학생이었던 이상화 시인이 신시 <독백>을 발표한 날이기도 하여 가슴에 사무치는 마음으로 <독백>에 곡을 붙여 보았습니다.”

 

이는 이날 공연의 첫 순서로 노래를 부른 주세페김의 말이다. 주세페김은 이상화 시에 곡을 붙이고 노래를 직접 불렀다.

 

나는 살련다, 나는 살련다

바른 맘으로 살지 못하면 미쳐서도 살고 말련다

남의 입에서 세상의 입에서

사람 영혼(靈魂)의 목숨까지 끊으려는

비웃음의 살이

내 송장의 불쌍스런 그 꼴 위로

소낙비같이 내리쏟을지라도-

짓퍼부울지라도

나는 살련다, 내 뜻대로 살련다.

그래도 살 수 없다면 – 이상화 시 ‘독백’ 가운데-

 

 

 

어두운 조명 아래서 들려오는 또렷한 시어(詩語)들이 가슴 속을 파고든다. 노래인지 낭송인지 장르를 알 수 없는 저음의 소리가 대강당을 휘돌아 들더니 이내 무대 위를 휘감는다. 관객들은 모두 숨을 죽인다. 시간은 어느새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시인 이상화가 서있다. 아니, 춤추는 조명 사이로 대구사람 이상화가 도쿄로 갔다가 대구로 돌아오는 환영(幻影)마저 보인다. 첫 무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관객과 가수가 혼연일체가 된 시간이었다. 그러한 숨죽임과 환영은 1시간 반, 공연이 이어지는 내내 반복되었다. 특히 나의 감정은 그랬다.

 

2010년 8월, 그 무덥던 어느 날 나는 국치100년을 맞아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를 거쳐 키타큐슈 탄광을 시작으로 오사카, 나가사키, 도쿄, 치바현에 이르기까지 조선인 강제징용과 학살 현장을 직접 발로 찾아가 본 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이날 이상화 시인의 ‘독백’부터 마지막 프로그램인 정종배 시인의 ‘관음사 보화종류 앞에서’까지 구구절절 가슴에 와닿는 감정으로 음악회를 지켜보았다. 아니, 이런 감정은 나 말고도 한국인이면 모두 느끼는 감정이었으리라. 시종일관 무대는 어둠이 내려앉은 듯 고요했다.

 

 

왜 아니겠는가? 당시 간토대지진 때 유학생 신분으로 이상화 시인이 직접 목격한 ‘길가에 내동댕이쳐지고, 매장되고, 강물에 내버려졌던 조선인들 학살의 참상’을 연상케 하는 절규는 이어진 박성진, 이상훈, 전효혁 성악가가 부른 ‘추도가(상해임시정부에서 불리던 노래)’에서도 그대로 느껴졌다. 이어지는 구미꼬김의 시낭송 ‘무덤(양주동 시)’과 ‘진혼곡(설정식 시)’ 등에서도 우리는 근래 느껴보지 못한 깊은 침잠(沈潛)의 시간을 가졌다. 이러한 겨레의 슬픈 역사는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공연 내내 무대와 객석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무거움만 느껴지는 공연은 아니었다. 강원도 원주에서 올라온 어린이 합창단 ‘참빗친구들’이 부른 반달(윤극영), 오빠생각(최순애) 등이 울려 퍼질 때는 객석에서도 함께 장단을 맞추는 모습이 정겨웠다. 공연 후반에는 치바현 나기노하라 지역에 암매장되어 있던 조선인 학살현장을 노래한 이윤옥 시인의 ‘그대들 누구인가’와 정종배 시인의 ‘쥬고엔 고쥬센(15엔 50전) 시와 ‘광은사 보화종루 앞에서’가 주세페김의 노래로 선보였다.

 

 

15엔 50전 쥬고엔 고쥬센 발음을

주고엔 고줏센 탁한 발음으로 생사가 갈린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희생자 영혼들이시여

15엔 50전 주고엔 고줏센 저 파도 넘어

15엔 50전 주고엔 고줏센 저 바다 건너

15엔 50전 주고엔 고줏센 저 하늘 아래

이제 이제는 그만 그만 외우시고

산을 넘어 숲을 지나 강을 건너 얽매이지 마시고

고개 넘어 들을 지나 내를 건너 미련두지 마시고  – 정종배 시인 ‘쥬고엔 고줏센’ 가운데 -

 

마지막 순서의 정종배 시인의 시 ‘쥬고엔 고줏센’ 노래를 들으며 나는 다시 슬퍼졌다. 일본어공부를 40여 년 하고 있는 나도 어려운 이 발음 ‘15엔 50전(고쥬엔 고쥿센)’!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을 가려내어 학살하기 위해 일본 군경들은 도쿄 거리에서 붙잡은 사람들에게 이 발음을 시켜보아 제대로 된 발음이 아니면 가차 없이 학살했다. 이건 실화다.

 

 

“주세페김과 구미코김 부부 성악가의 음악회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듀오아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지가 25년째라고 들었습니다. 흥행이 쉬운 노래를 찾아서 부르지 않고 특히 독립운동가들을 알리는 노래를 꾸준히 부르는 듀오아임께 25돌 기념 공연을 축하하고 싶습니다. 몇 해 전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삶을 그린 <페치카>를 감명 깊게 본 이후 왕팬이 되었습니다.” - 남승희(둔촌동, 주부)

 

“간토대지진 당시 일본의 군경들이 조직적으로 조선인들을 학살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 사회가 깊은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아 염려됩니다. 오늘 공연을 통해 양심적인 일본 시민들이 조선인학살 추도회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열고 있으며 학살 현장에 추도비를 세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오늘 공연도 ‘생명존엄의 값어치를 되새기고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일본의 반성과 한국의 화해를 통해 밝은 미래로 상생했으면 한다’라는 취지를 듣고 공감했습니다.” -박진수(태평동, 회사원)

 

이진훈 작가(한국미니픽션 작가회, 전회장)의 정감 있는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정종배 시인과 이윤옥 시인이 특별 초대되어 ‘인문음악회’를 빛내주었다.

 

“1985년 대한민국 본국 시민들이 세운 유일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희생자 기림시설인 <보화종루>가 그동안의 지진, 특히 2011년 동일본대지진 때의 충격 이후 현재 붕괴할 위험에 놓여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학살 현장의 목련나무와 관음사 경내 은행나무가 이미 사라졌듯이, <보화종루>도 이대로 두면 그렇게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망각의 100년, 진혼의 밤에 관음사 <보화종루>가 다시 우뚝 일으켜 세워져 진정한 한일 양국의 화해와 평화의 종소리가 오래오래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정중한 마음으로 새로이 창작한 진혼가를 하늘로 향해 올립니다.”

 

이날 행사를 주최한 랑코리아 예술감독 주세페김은 <랑코리아 창단 10돌>을 맞아 단원들과 함께 조선인학살 희생자 기림시설인 <보화종루>의 재건이 순조롭게 이어지길 빈다며 공연의 말미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참 의미 있는 공연이었으며 <랑코리아>와 <듀오아임>의 발전을 비는 마음으로 공연장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