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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던, 아름다운 위인들

《아름다운 위인전》, 고진숙, 한겨레아이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나누는 삶을 살았던 위인들.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지고 있으면 더 가지고 싶고, 좋은 것은 나만 가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고, 모르는 사람들과 좋을 것을 나눈다는 것은 그런 본능에 역행하는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러나 그런 소유의 본능을 이기고, 어려운 이들을 위한 삶을 살았던 인물들이 있다. 그것이 출세에 크게 도움 되는 일은 아니었다. 복지 개념이 없다시피 했던 먼 옛날에는 빈부격차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심지어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인식되지도 않았다.

 

고진숙이 쓴 이 책, 《아름다운 위인전》에 실린 위인들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김만덕, 이지함, 이헌길, 이승휴, 을파소 이 다섯 사람은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다. 자신이 속한 양반 사회나 가진 자들의 세계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세계를 위해 헌신했다.

 

 

책에 실린 다섯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 감동을 주지만, 특히 더욱 눈길을 끄는 사람은 이헌길이다. 이헌길은 천연두(두창)에 걸린 어린 정약용을 구해낸 선비다. 이헌길이 없었다면 우리가 오늘 감탄하는 정약용의 수많은 저작도 볼 수 없었을지 모른다.

 

(p.128)

“아버지, 이 선비님이 저를 살리신 것입니까?”

“그래, 이 분이 없었다면 넌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선비로서 체통도 다 버리고 널 살리기 위해 한달음에 오셨단다. 잘 기억해 두어라. 이 분은 너의 생명의 은인이시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고는 가만히 눈썹을 매만졌습니다. 목숨을 얻은 대가로 눈썹이 세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 이 눈썹은 이 분이 내게 주신 선물이다. 그 무엇보다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라는…’

 

그 뒤로 자신의 호를 ‘삼미자(三眉子)’, 곧 ‘눈썹이 세 개인 사람’이라고 지은 정약용은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았다. 이헌길의 호 ‘몽수’를 따 <몽수전>을 짓고, 이헌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저술을 마무리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헌길의 스승 이철환은 성호 이익의 손자뻘 되는 사람이었다. 이헌길은 스승 이철환의 집에서 그의 배려로 청나라의 의서 《두진방》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두창(천연두, 마마)’와 ‘마진(홍역, 작은 마마)’의 치료법을 적은 책이었다.

 

그때 이헌길은 남몰래 홍역 치료에 도전하고 있었다. 홍역과 비슷한 증세가 나타나는 환자면 어디든 달려가 살펴보고, 저잣거리에 떠도는 비법도 모조리 실험해 보며, 책이란 책은 샅샅이 구해 읽었다. 그러던 차에 접한 《두진방》은 마침내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를 완전히 풀어 주었다.

 

어느새 이헌길은 두창과 마진(홍역) 가운데 마진은 완벽히 치료할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이헌길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아픈 이라면 발 벗고 나서 헌신적으로 치료해 주었다. 본인이 왕족 출신의 지체 높은 양반이라는 점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마진을 치료하는 비법 또한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자신의 의술을 집대성한 한 권의 책을 남겨놓았다. 바로 《마진기방(麻疹奇方)》이었다. 주위의 눈을 피해가며 어렵게 얻은 비법인만큼, 백성들이 더 이상 마진을 겁내지 않고 자신보다 더 훌륭한 의사가 우연히 자신의 책을 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남긴 책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마침내 그 책의 값어치를 알아본 이가 나타났다. 바로 이헌길이 목숨을 구해준 정약용이었다. 이헌길이 쓴 <마진기방>과 수많은 책을 연구한 정약용은 또 한 권의 역작, 《마과회통》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책머리에 이렇게 썼다.

 

(p.162)

가까운 때에 이헌길이란 분이 있어, 명예를 바라지 않고 뜻을 오직 사람을 구하는 데만 두었고, 마진에 대한 수많은 책을 두루 읽고 익혀 어린 생명을 건진 것이 만여 명에 이르렀다. 나 또한 그분에 의해 ‘사람을 살리는 길’에 대한 가르침을 얻었다. 그 덕에 보답하기 위해 그분의 책 《마진기방》을 비롯하여 중국 책 수십 종을 얻어 그 방법들을 자세하게 밝히고자 한다.

 

이렇듯 수많은 이의 생명을 살리고, 마진 치료법을 아낌없이 전수했던 이헌길이었지만 그에겐 명예도, 벼슬도 없었다.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조차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명예에 초연한 삶을 살았고, 오늘날 이름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백성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한없이 낮춘 까닭에, 신분을 중시한 양반들에게 따돌림당하고 ‘마진이나 연구하는’ 한심한 양반으로 폄하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살았던 삶의 진정한 값어치를 알아봐준 이는 정약용, 한사람뿐이었을 수도 있다.

 

이 책은 이렇듯 아름다운 삶을 살았으되 역사에 잘 남아있지 않은, 남아있더라도 오늘날 널리 알려지지 않은 다섯 사람을 따뜻한 시선으로 불러내는 책이다.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공동체에 주려고 했던, 그 지난한 일을 계속 했던 다섯 사람의 이야기가 참 따뜻하다.

 

추운 겨울날, 이들의 따뜻한 마음을 거울삼아 작게나마 공동체를 위한 봉사활동을 해보면 어떨까? 진정 인간을 위할 줄 알았던 사람들, 그들은 진정한 ‘위인’이었다. 인간을 향했던 그들의 마음이 더없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