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어이 자네는 언제나 철이 드나?"
어릴 때 자주 듣던 말이다. 무슨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했을 때 타박 겸 꾸중으로 듣는 말인데 나는 이 말을 몸에 철분이 부족해 생기가 없고 정신이 좀 흐릿흐릿하다는 뜻인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철부지라는 비슷한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철부지(不知)', 곧 '철을 모른다'라는 뜻일 터여서 철이라는 것이 무슨 몸속의 영양소가 아닌, 계절을 의미하는 '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철이 바뀌어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철부지'인 것이고, '철새'라는 말도 '철에 따라 오고가는 새'라는 뜻이니 우리말 '철'은 계절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갰다.
그런 철새를 최근에 눈앞에서 보고 왔다. 부산의 서남쪽 낙동강 하구 을숙도 철새공원 안에 있는 낙동강하구에코센터에서였다.
낙동강 하구를 바라보는 전시관의 대형 유리창을 통해 낙동강 하구에 넓게 형성된 모래섬들이 눈앞에 보이고 그 섬 주위에 모래들이 얕고 평평한 모래톱 혹은 사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앞으로 무엇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일종의 벤치 같은 것들이 죽 서 있는 것이다. 그 위에 보니 가마우지 같은 새들이 편하게 앉아있다. 바로 눈앞애서 철새들이 아주 편하게, 평화롭게 쉬고 있다. 전시관 안에서 사람들이 자기들을 보던 말던 아무 신경도 안 쓰고 새들은 횃대 위에서 혹 물가를 살피거나 먼 하늘을 보거나 혹 서서 졸고 있다. 철새들의 평화로운 공원이라고나 할까?
을숙도는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동양에서 가장 큰 철새도래지였다. 196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고 과거에 을숙도는 경작지, 분뇨처리장, 쓰레기매립장, 준설토적치장 등으로 이용되다가 1987년 낙동강하구둑이 완공되면서 거대한 섬공원이 됐다. 그만큼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져서 철새들의 숫자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수십 가지 철새들이 특히 가을 겨울에 많이 오간다. 마침, 우리가 갔을 때는 여름 끝자락이라 가마우지들이 많이 보였지만 이 일대에는 이 밖에도 이름도 모르는 많은 철새의 보금자리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도시 속에서 살며 새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없는 현대인들에게, 바로 코 앞에서 이들이 전혀 인간을 의식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특이하고도 색다른 기쁨이었다. 맨눈으로도 보이고 망원경을 통해서는 더욱 잘 보이는 이들 철새는 도시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 갇혀 사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한여름 시원한 얼음계곡에 들어가는 듯한 체험이었다.
곧 이 을숙도의 진객(珍客)인 큰 고니가 이곳을 찾는다고 이곳 에코센터 해설사께서 설명해주신다. 큰 고니야말로 동화에 나오는 백조, 바로 그 새다. 이 백조들이 수십 마리가 모래톱을 중심으로 지내다가 가는데 그 그림을 이번에 보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나중에 다시 온다는 약속을 마음속으로 해본다.

낙동강 하류의 이곳 철새공원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어주는 물이 강에서부터 바다로 들어가면서 만나 다양한 생태계를 이루고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도 국토의 남쪽 끝에 있다 보니 서울 위주로 살아온 우리가 클 때는 와보지 못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철새 도래지인데다가 철새들과 하구 습지의 생태를 관찰하기 가장 좋은 장소, 땅과 하늘과 바닷속에 사는 생명체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이런 공간을 그래서 멀리 수도권에 사는 우리 손주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 이곳에서 우리 손주들이 생명의 소중함,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지속 가능한 공생의 삶을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이곳 에코센터는 동물들의 생태적응도 도와주는 곳이어서, 지난 2023년 6월 에버랜드에서 태어난 큰 고니 한마리가 이 에코센터의 물새류대체서식지로 이송돼 야생 적응 훈련을 마치고는 지난 4월에 부산을 출발해 함경북도를 넘어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역까지 2천3백 킬로미터를 날아가 야생으로, 성공적으로 돌아간 일도 이런 생태복원의 한 사례다.
그런데 전시관 안에서 새들을 보다가 문득 유리창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이 일어난다. 동물의 세계에서 철새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철에 따라 오고가며 최적의 환경을 찾아 살아가는 새들을 의미하는데 인간 사회에도 철새가 있지 않은가? 인간 철새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리저리 주인을 찾아 옮겨다니는 사람들일 터인데, 우리나라처럼 정치적인 격변이 심한 나라에서 정권이 바뀌는 것은 당연히 있을 일이지만 그 틈에 사람들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세상의 물을 흐리는 것을 보는 것은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도 생존을 해야 하기에 이익을 위해 자기의 직업이나 모시는 사람, 생각 등을 바꿀 수는 있을 것이지만, 금도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인간들도 철새와 그 형편이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창밖 넓은 자연에서 한가하게 쉬고 있고 때때로 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가는 저 새들을 전시관 안에서 보면서 갑자기 우리가 오히려 전시관 안에 갇혀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새들을 본다고 하지만 새들은 오히려 왜 인간들이 저렇게 유리창 안에서 자기들을 보려고 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갰다. 그러니 일상생활과 샹활규칙에 걷힌 우리 인간들과 새들을 비교하면 누가 더 행복한 것인가? 누가 누구를 부러워하랴?
그런 것을 생각하면 그런 구애를 받지 않고 마음 놓고 날아다니는 저 새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남미 페루의 음악을 미국의 대중가수 사이먼과 가펑클이 1970년에 포크송으로 바꿔 발표해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철새는 날아가고'라는 노래 2절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차라리 저 멀리 배를 타고 떠나겠어요
여기 있다가 가버리는 백조처럼
인간은 땅에 매여 있다가
가장 슬픈 소리를 세상에 들려주죠
가장 슬픈 소리를 말입니다,
9월이다. 가을이라는 철이 돌아오고 있다. 유리창 밖 자연 속에서 한가롭고 자유로운 철새들의 삶을 보며 이들의 평온을 깨트리려는 인간의 탐욕을 생각하고, 그 탐욕이 인간과 자연 사이를 파괴하지 않도록, 그 탐욕이 인간 사회 자체를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낙동강 철새도래지에서 우리들도 철이 들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어떤 철이 들고 어떤 깨달음을 다시 얻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