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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말 '정상'에 빼앗긴 우리말 '마루'

[≪표준국어대사전≫ 안의 일본말 찌꺼기(19)]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 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냐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정지용 고향’- 

가곡으로도 널리 불리는 정지용 시인의 고향이라는 시에는 오늘도 뫼 끝에라는 말이 나온다. 만일 이 부분을 정지용 시인이 산 정상에 올라라고 했으면 말의 맛은 떨어졌을 것이다. 이처럼 말에는 말의 맛이 있다. 뫼라는 좋은 우리말이 있지만 요즘 사람들은 거의 이 말을 잊고 산이란 말을 쓴다. 그것도 산정상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 요즘 정상 대신 마루라는 표기가 늘고 있다(왼쪽) 그러나 아직도 정상이라고 써둔 곳도 있다.

그런데 얼마 전 북악산에 오르면서 보니 백악정상이란 말 대신에 백악마루(북악마루)라는 말을 발견하고 무척 기뻐 사진까지 찍어 온 적이 있다. 정상이란 말은 일본말로 일본국어대사전 大辞泉에 보면, “ちょうじょう頂上】1 などのいちばんいところいただき。2 最高状態していること最高地位またその로 되어 있다. 우리말로 번역할 필요 없이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정상(頂上) : 1 산 따위의 맨 꼭대기. 2 그 이상 더없는 최고의 상태. 3 한 나라의 최고 수뇌라는 뜻풀이인데 일본사전 짝퉁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산마루, 산꼭대기라는 우리말을 밀어내고 산정상이라는 일본말이 들어오기 이전에 우리는 무엇이라고 이 말을 썼던 것일까? 숙종실록 50, 37(1711 신묘)에 보면,  

안동(安東)의 관묘(關廟)는 만력(萬曆)15293) 무술년15294) 에 진정영 도사(眞定營都司) 설호신(薛虎臣)이 세운 것으로, 석상(石像)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성(府城) 내의 북산(北山) 정상(頂上)에 있었으며, ()를 세워 동정(東征)한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병오년15295) 에 서악사(西岳寺)의 동대(東臺)로 옮겨 모셨습니다.(安東關廟, 萬曆戊戌, 眞定營都司薛虎臣所建, 有石像初在府城內北山之, 立碑以記東征之役, 丙午移安西岳寺東臺)  

위 예문에서 원문에 이 국역본에서는頂上으로 되어 있다. 국역하는 사람들이 산마루,산꼭대기로 번역하지 않고 일본말 정상을 써놓고 미덥지 않아 일본한자 頂上이라 쓴 것이다.  

여기서 잠시 우리 토박이말 마루를 연구한 일본 산악인을 소개한다. 산사나이 다니유우지(谷有二)씨는 일본산 이름에 마루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것을 수상하게 여겨 평생을 이 마루라는 말의 뜻을 찾아 헤맨 끝에 이 말이 높은 산꼭대기를 가리키는 조선말임을 알고 <조선어로 풀어보는 일본 산 이름 수수께끼>로 정리하여 일본산악잡지 산과계곡,溪谷에 연재하기 시작한다. 이어서 1983년에는 일본산악전승의 수수께끼라는 한 권의 책을 낸다. 유우지 씨는 여기서 고백한다. 한국에서 집을 지을 때 지붕 꼭대기를 가리키는 용마루를 들어 마루는 높은 곳을 가리키는 한국 토박이말임을 깨달았다고 말이다.  

지금 한국 사람들은 마루라는 토박이말을 버리고 정상이란 말을 쓰지만 유우지 씨는 거꾸로 일본 산 이름에 붙어있는 마루를 연구하고 있다. 우리 토박이말 마루는 일본말에서도 마루, maru’라고 발음하며 한자로는 을 쓴다. 유우지 씨는 은 원래 둥근 모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산정상을 뜻하는 산마루도 평지에서 보면 둥글게 솟은 형태라 한자로 이라고 표기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단자와산(丹沢山)은 도쿄에서 특급 오다큐선을 타고 1시간 정도 달리면 만나는 산으로 일본 100 명산에 꼽히는 크고 작은 봉우리로 이뤄진 산이다. 유우지 씨는 단자와산에 있는 해발 1601미터의 히노키보라마루(檜洞丸) 말고도 오오스기마루(大杉丸)를 포함하여 20여 곳의 산봉우리에 한국말 마루()’ 가 붙어있다고 했다. 또한 일본 전국에 1,000미터 급 이상은 거의 한국토박이말 마루()’가 붙어있다고 봐도 좋다고 단언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필자의 졸저 사쿠라 훈민정음, 인물과사상사에 상세히 나와 있다. 

   
▲ 산마루와 산꼭대기가 같으냐고 묻는 질문에 횡설수설하고 있다.

산마루를 버리고 산정상을 사뭇 써오다 보니 높은 곳을 가리키는 말 마루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국립국어원에 궁금증을 하소연하고 있다. 한 번 보자. 이 질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질문자는 산마루=산꼭대기로 알고 있는데 국립국어원 쪽의 답변은 아리송하다. 산등줄기가 가장 높으면 산마루=산꼭대기이고 낮은 등줄기는 산마루란다. 그리고 잘 모르면 네이버사이트에 가보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있다. 국민은 어딜 가서 궁금한 한국말을 물어봐야 하는 것일까? 

[그린경제 / 한국문화신문 얼레빗 = 이윤옥 문화전문기자]
 

**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요즈음은 한 분야에 입문하여 10년만 공부해도 “전문인”이 되는 세상이다. 일본어 공부 35년째인 글쓴이는 대학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아직도 글쓰기가 두렵고 망설여진다. 그러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우리말 속의 일본말 찌꺼기를 풀어내는 글’을 쓰기 시작했더니 “그거 좋다”고 하여 ‘국어사전 속 숨은 일본말 찾기’라는 부제의 책《사쿠라 훈민정음》을 2010년에 세상에 내어 놓았다. 이 책 반응이 좋아 후속편으로 2편이 곧 나올 예정이다. 내친김에 일반인을 위한 신문연재를 하게 되었다. ‘말글을 잃으면 영혼을 잃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애정을 갖고 이 분야에 정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