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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한복판 증상사에 "고려대장경" 있는 까닭은? <1>

원나라,송나라,고려대장경을 모셔두고 있는 증상사(增上寺,죠죠지)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경장(經藏, 대장경을 모셔 두는 전각)에는 원래 하나만 수장(收藏)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우리 증상사에는 송판(宋版), 원판(元版), 고려판(高麗版) 대장경을 모셔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도쿄 증상사(增上寺)에서 특별히 받은 “경장안내”에는 이런 설명이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참으로 진기한 보물을 그것도 3개씩이나 모셔두고 있다니 대단한 절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일본말로 죠죠지(增上寺)라 부르는 증상사는 도쿄 한복판에 있다. 도쿄의 상징으로 일컫는 도쿄타워 바로 밑에 우리의 대장경이 모셔져 있는 절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증상사를 찾은 날도 고려대장경이 이곳에 모셔진 것을 모르는 한국인 관광객을 만났다. 증상사 본당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며 한국말을 나누는 우리 일행에게 성균관대학의 철학과 3학년이라는 남학생이 다가와 사진 한 장을 부탁한다.

   
▲ 고려대장경이 모셔져 있는 도쿄 증상사 본당(대웅전)

“많이 둘러보았느냐. 도쿄에서 며칠 째냐?...”등등 낯선 땅에서 동포를 만나는 일은 혈육을 만나는 것 이상으로 반갑다.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을 앞두고 있다는 이 남학생은 겨울방학을 맞아 혼자서 일본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서서 몇 마디 나눴지만 일본말이 서툴면서도 철학과 학생답게 이웃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증상사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겨우 “도쿄핸드가이드”책이 고작이었다.

 “도쿄핸드가이드”는 도쿄도청에서 만든 것으로 62쪽짜리 한글판 수첩모양의 안내책자이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있음인지 어디서나 손쉽게 구해서 손안에 쥐고 도쿄관광길에 나설 수 있으니 일본말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도쿄 거리는 두렵지 않을 것이다. 깨알만한 글자로 도쿄와 수도권의 볼거리, 먹거리, 간단한 일본어 등등 짜임새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 특징인 이 책 14쪽에는 “죠죠지(증상사)”에 대한 안내문이 단 3줄로 쓰여 있다.

 

   
▲ 도쿄도에서 만든 한국어판 안내책자 핸드가이드. 14쪽에 깨알 같은 글씨로 죠죠지(증상사)를 설명하고 있으나 고려대장경 이야기는 없다.

“간토지방에서 정토종 교학의 전당이 된 사철. 도쿠가와이에야스와 당시 이 사철의 주지스님이 사제관계를 맺음으로써 보리소가 되었다. 본당 안에는 본존 아미타여래반좌상, 삼문 등 꼭 볼만한 문화재가 곳곳에 있다.”

 이 절에 대해서는 이게 전부이고 찾아가는 길이 적혀있을 뿐이다. 그것도 군데군데 “사철” “보리소” “삼문” 같은 한국인들이 알기 어려운 번역문이 눈에 띈다. 이것이 외국인을 위한 증상사 안내의 전부이다. 성균관대학 남학생이 증상사를 찾은 것은 순전히 이 책자에 의지한 것이지만 이런 빈약한 정보를 가지고 증상사를 찾는 들 큰 의미를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바로 본당(대웅전) 가까이 “경장(經藏)”건물에 천여 년 조상의 숨결이 느껴지는 고려대장경이 모셔져있지만 알지 못한 채 본당 건물 사진하나 찍고 돌아가는 게 현실이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만일 죠죠지(증상사) 안내문에 “이곳에는 고려대장경이 있습니다”라는 한 구절만 써 두었어도 한국인 관광객들의 감회는 남다를 것이지만 어찌해서 고려대장경 보관사실을 드러내지 않는지 알 수 없다. 관광객 중 불교신자라면 보시금도 두둑히 낼 텐데 말이다.

고려대장경이 증상사에 와 있는 곡절

 고려대장경이 무슨 곡절로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더불어 송나라, 원나라 대장경은 또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무슨 인연으로 한국 절에 있어야 할 것이 이곳 도쿄 증상사 창고(말이 경장이지 창고)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어야 하는지 안타까운 마음에 답사 회원들은 창고처럼 생긴 경장 밖에서 발길을 떼지 못했다.

불교신자도 아니고 지금이 고려시대도 아니건만 왜 우리는 고려대장경이란 말에 감격하는 것일까? 그것이 대관절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회원들은 저리도 경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일까?  대장경이 안치된 경장 주변에는 홍매화가 한창이었다. 세계적으로도 오자(誤字)없는 완벽한 대장경으로 정평이 나있는 고려대장경은 지금 우리 눈앞에 있건만 굳게 닫힌 경장 문은 열리지 않는다. 경장 밖의 무심한 붉은 매화는 아무 뜻도 모른 채 세세연년 피고지고 계절은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을 뿐이다.

“대장경은 보여 드리지 못합니다만 자료는 드릴 수 있습니다” 증상사를 찾아가기 전에 우리는 증상사 종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혹시 대장경을 볼 수 있는지와 자료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종무소 측의 답은 대장경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과 자료를 얻으려면 증상사 출판사의 아키야마(秋山)씨에게 물어보라고 소개해주었다. 전화 응대를 해준 출판사의 아키야마씨는 매우 친절한 사람이었다.

마침 우리가 찾아간다는 날은 출타 중이라면서 대신 누런 봉투에 증상사에 관한 자료를 담아 다른 직원에게 맡겨놓고 가겠다는 전갈을 받아 직접 만나지는 못했으나 가져간 한국산 전통과자를 메모와 함께 건네고 왔다.

 증상사는 3국(고려국, 송나라, 원나라)의 대장경을 보유한 절 답게 따로 출판부서를 두고 있을 만큼 대장경에 대한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종무소에 전화 했을 때도 그렇고 출판사와 통화를 했을때도 자꾸만 “왜, 무엇을 알고 싶느냐?”는 경계의 빛이 역력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키야마 씨가 건네준 누런 봉투 속의 고려대장경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건네 준 게 다행이었다. 하코네신사의 경우에는 한반도와 관련된 내용을 문의 했을 때 “우리와는 무관합니다”라며 차갑게 전화를 끊은 것에 견주면 말이다.

 

   
 

“1482년 4월 아시카가장군의 국사(國使)인 영조(榮助)일행은 조선 경성에 건너가 성종 임금을 뵙고 국서를 전달하였으며 답례로서 경상도에 있던 고려판대장경 등을 얻어 7월 오사카 사카이항으로 귀항했다. 당시 고려판 대장경은 나라의 원성사에 안치 되었다.”이는《大藏經請來二合船殘錄》에 나오는 말로 “대장경을 얻어”라는 표현이 보이지만 이는 자칫 한국 측에서 순순히 내준 것 같으나 실상은 다르다.

 한국의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은 목판본이 1,516종에 6,815권으로 총 8만 1,258매이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속장경(續藏經)은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된 뒤 1236년(고종 23) 당시의 수도였던 강화에서 시작하여 1251년 9월에 완성되었다. 이것은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거의 없기로 유명하다.

   
▲ 해인사 장격각(위)과 일본 도쿄 증상사의 경장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장경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 우왕 14년(1388) 포로 250명을 돌려보내주면서 처음 요청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 효종 때까지 무려 83회의 대장경 요구가 있었다. 대장경을 요구하는 사신은 주로 승려들이었으나 국왕이 직접요구하거나 지방 호족까지 대장경을 달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조정은 큰 골머리를 앓았다는 기록이 조선왕조 실록에 많이 남아 있다.

 태종 때 4회에 걸친 대장경 요구가 있었고 정종 때에도 3번이나 대장경을 달라고 떼쓰는 일본 때문에 조정에서는 일일이 대응 할 수 없어서 고심 끝에 핑계거리를 만들기를 조선은 불교를 숭상하지 않아서 이제 더 이상 대장경을 인쇄하지 않아 대장경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거나 필요에 따라 조금씩 주기도 하였다. 시달림이 클 때에는 신하들이 아예 대장경 판본을 내어 줘버리자는 의견도 나왔는데 정말 아찔한 이야기였다고 박상진 교수는 《다시보는 팔만대장경판 이야기. 운송신문사. 1999》에서 밝히고 있다.

 일본에서 끊임없는 고려대장경을 요구한 까닭은 무엇일까?  

 

다음 이야기  <도쿄 한복판 증상사에 "고려대장경" 있는 까닭은? 2> 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