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조선 정부가 주려고 하지 않는 대장경을 자기들이 손수 만들면 되지 무엇 때문에 구걸한단 말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일본은 입만 열면 일본불교의 우수성을 입증하려고 안달을 해오고 있다. 국보1호인 광륭사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만 해도 신라에서 건너 간 불상임이 여러 문헌에 의해 입증이 되었음에도 아직도 일부 학자는 일본사람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우기고 있는 실정이다.
538년 백제의 성명왕 때 불교를 전해준 이래 불상과 수천 종의 불교경전은 물론이고 뛰어난 승려들이 건너가 사천왕사니 법륭사니 하는 절을 지었음에도 절의 안내서에는 이런 사실(史實)을 적어주지 않고 있다. 마치 모든 것을 처음부터 스스로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불교문화에 앞장 선 나라라면 왜 대장경을 만들지 못했을까?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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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 성종 16년 9월 16일 |
팔만대장경이 아니라 팔십만 대장경이라도 만들 일이지 구차하게 조선정부에 와서 단식투쟁을 하면서까지 고려대장경을 얻어 가려고 한 것을 보면 15세기까지도 일본불교 수준이 높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가 요구하는 바는 대장경 판인데 전하(세종)께서 주신 것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면 우리 국왕 뜻에 맞지 않을 것이고 저희는 견책을 당할 것이 뻔합니다. 임금 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경판을 하사하신다면 임금의 은혜를 잊지 않겠나이다.”
“연전에 우리나라에서 요구한 대장경 인판을 귀국에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찰과 신사에는 본받을 것이 없습니다. 이제 귀국의 특사가 돌아가는 편에 부탁드리오니 반드시 7천권을 모두 갖춘 대장경 인쇄본을 부쳐 주시면 밝은 태양 아래서 거듭 볼 것입니다. 이웃나라의 변하지 않는 그 어떤 서약이 이와 같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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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문에서 고려대장경이 신(新)경장 가는 길 |
이는 1443년 11월 18일 (세종 25년) 일본국 사신 중 광엄(光嚴)등 29명이 왔을 때 우리 조정에 올린 글이다. 또한 세종 6년 (1424년) 1월 2일 자에는, “우리들이 조선에 온 것은 대장경을 얻기 위해서이며 만일 경판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돌아갈 수 없다. 차라리 여기서 식음을 전폐하고 죽어 버리겠다”고 단식 투쟁을 하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1월8일 윤인보등을 보내 이들을 타이르고 밀교대장판, 주화엄경판대장경 1부를 보내 달랬다는 기록이 보인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무례라면 무례고 뻔뻔하다면 뻔뻔한 일임에도 대장경을 요구했던 것은 오로지 자기네 절의 위상을 높이고자 함이었다. 그 좋은 예가 일본국왕 왕비의 서신이다. 그녀는 승려 규주(圭籌)편에 서신을 보내기를 “새로 절을 짓고 그 절에 대장경을 안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사은(四恩) 공덕을 쌓으려하나 그 책을 얻을 수 없어서 귀국에 가서 이를 구하려고 합니다. 삼가 청컨대 그 간절한 뜻을 불쌍히 여기시어 경전 전질을 갖추어 7천권을 보내주시면 보내주소서” 세종 4년 (1422) 11월 16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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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상사로 옮기기 전 고려대장경이 있던 곳 나라(奈良) 원성사(圓成寺) |
이러한 잦은 대장경 요구에 조선 정부는 “지금 찍어 놓은 게 바닥이 났다. 종이를 보내면 찍어 주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일본쪽에서 대장경을 찍어달라고 1416년 (태종 16년) 10월 13일에 일본에서 종이와 먹을 가지고 와서 대반야경을 인쇄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종이가 대장경을 인쇄할 수 없을 정도로 품질이 형편없어 특별히 종이를 따로 제조하여 인쇄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조선 조정에는 끊임없는 대장경 구걸 행렬이 이뤄졌음에도 일본 쪽 기록에는 “얻어왔다”고 쓰고 있다. “얻어 온 것”과 “구걸 한 것”은 분명 다른 것이련만 차마 구걸해서 갖다 놓은 것이라고는 쓰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일본의 유명한 절마다 얻어다가 놓은 게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일본 절에 갖다 놓았다가 절이 불타면서 재로 사라진 대장경은 또 얼마나 되는 것인지도 파악할 길이 없다. 소장하고 있는 절들은 쉬쉬하고 있고 더 이상 불교국이 아닌 조선에서는 없어도 그만인 물건이었으니 통탄스러운 일이다.
고려대장경을 아끼지 말고 일본에 주라고 한 노사신
1485년 9월 16일 조선왕조실록에는 노사신(盧思慎)의 상소가 눈길을 끈다. “대장경은 이단의 책이므로 비록 태워버린다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더욱이 인접한 나라에서 구하니 마땅히 아끼지 말고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장경 1건을 만들려면 그 경비가 매우 많이 들어서 쉽사리 조달할 수가 없습니다. 요 전번에는 대장경이 국가에 무익하였기 때문에 왜인들이 와서 구하면 문득 아끼지 않고 주었으나 지금 몇 건 남아있습니까? 다 주고나면 또 달라는 억지에 골치가 아플 것입니다.”그러니까 주더라도 조금씩 주자는 말이다. 싹 주어 버려도 아깝지는 않지만 한꺼번에 다 주고 나면 다시 만들어 주는데 돈이 드니까 조금씩 주자는 말이다.
한국의 “대장경”은 불교국가에서 유교국가로의 전환에서 생긴 희생양이다. 고려대장경이 모셔져 있는 도쿄 한복판 증상사(增上寺)의 경장은 지금 비어 있다. 그리고 지금의 경장 뒤에 작은 규모로 창고 비슷한 경장을 지어 놓았는데 이른바 신경장(新經藏)이다. 그 속에 고려대장경이 안치 되어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대장경이 증상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 증상사에 있는 고려대장경은 처음에는 나라(奈良)의 원성사(圓成寺)에 있었다. 원성사는 1026년에 창건된 절로 무로마치시대 오닌의 난(応仁の乱 1466년)때 불타버린 것을 주지 영홍(榮弘)이 재건하였는데 영홍은 절의 위상을 높이고자 대장경이 필요했을 것이다. 당시의 일본 절들은 “대장경”을 만들 기술을 갖고 있지 못했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고려의 대장경을 자신의 절에 안치하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이러한 노력은 한국 절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안치 하려는 노력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홍도 예외는 아닌지라 원흥사에 자주 드나드는 권력자 아시카가장군에게 대장경을 갖고 싶다고 말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에 아시카가장군은 조선에 국사 파견 때에 영홍의 소원을 들어줄 양으로 대장경을 성종임금에게 요청했을 것이다. 이에 성종은 경상도의 한 절에 있는 대장경을 일본사신 영조(榮助) 일행에게 건네주었다.
이런 사연으로 원성사에 건너온 고려대장경은 120여 년간 이곳에 있다가 1602년 8월 도쿠가와(德川家康)장군에게 당시 쌀 235석을 주고 팔아 버렸다. 이렇게 팔린 고려대장경은 도쿠가와장군이 도쿄 증상사에 보시 형태로 건네주게 된다.
도쿄 증상사는 도쿠가와 막부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증상사는 1393년 정토종제8조성총(浄土宗第八祖聖聡)에 의해 세워졌으며 원래는 지금 장소가 아닌 관동의 무사시국 (武蔵国豊島郷貝塚)에서 발원하여 관동지역 발전과 더불어 성장한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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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상사의 3대 장경 중 고려대장경 설명 자료 |
증상사는 도쿠가와 장군이 권력을 쥐고 에도막부(江戸幕府)를 열었을 때 도쿠가와 집안의 보리사(菩提寺) 곧 기도절로 막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게 된다. 1598년에 현재 자리로 절을 이전하여 해탈문, 경장, 본당 등을 짓고 대장경을 안치하는 등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1616년에 도쿠가와 정권을 세운 1대장군 이에야스(徳川家康)는 75세로 운명하면서 이곳에 무덤을 만들 것을 명하여 이후 경내에는 6명의 장군과 부인 등 모두 38명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으며 나머지 장군들은 우에노에 있는 관영사(寛永寺)에 묻혔으며 닛꼬시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사당(日光東照宮)이 있어 도쿠가와 정권을 흠모하는 많은 일본인들의 참배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이곳에는 14대 장군의 부인으로 비극의 황녀로 불리는 가즈노미야(和宮 親子内親王)의 무덤이 있어 눈길을 끈다. 군사정권에 황실을 넘겨 준 천황가는 사무라이정권 700여 년간 거의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다. 가즈노미야 공주 역시 힘없는 왕실가를 그대로 대변해주는 인물이다. 가즈노미야에게는 이미 청혼한 남자가 있었다. 황족이었다. 그러나 사무라이 정권은 이 약혼을 파기하고 공주를 서울로 압송하여 14대 장군의 부인으로 삼는다. 천황가 딸의 신분으로 사무라이 정권 권력자에게 강제 정략결혼을 당한 뒤 32살로 죽어 묻힌 증상사에는 기구한 황실가의 여인을 추모하는 발길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고려대장경은 일본대장경의 저본(底本)이었다.
증상사의 3대장경은 도쿄도지정중요문화재 미술공예품 중 서(書)분야 지정되었으며 증상사의 경장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 송나라 대장경은 13세기 전반 것으로 5356개 5847권이며 원나라판은 13세기 말 것으로 5386개 5931권이며 고려판은 13세기 중기 것으로 1259개 6531권이 수장 되어있다. 이들 대장경은 명치시대에 간행된 <축쇄대장경>, 대정․ 소화시대에 간행된 <대정신수대장경>의 저본으로 사용되었으며 명치초기의 폐불훼석(廢佛毁釋)의 수난을 잠시 겪었으나 에도시대부터 현대불교학의 연구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해왔다.”
일본이 대장경을 만들 능력이 있었다면 구태여 1388년 고려말 우왕 때부터 조선효종 때까지 83여회에 걸친 “대장경 구걸”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한편, 유교이념을 근본이념으로 삼은 조선이 아니고 불교의 전통을 이었다면 오늘날과 같이 고려대장경이 증상사 창고에서 좀 먹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대를 잘 못 만난 탓이라고 해야 할까? 국가의 운명도 변화를 겪듯 한민족의 문화유산인 고려대장경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증상사의 대장경 보관소인 경장에 쌓인 먼지가 깨끗이 털려 나가는 날, 제자리를 떠난 대장경도 햇빛을 보게 되리라!
지금 증상사에 가는 사람들은 수장고(収蔵庫) 겉에서만 가슴가슴 졸일 뿐 발걸음을 돌려야 한다. 우리 일행은 증상사 부처님께 합장하는 마음으로 절을 나왔다. 나무관세음보살! 고려대장경이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