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흔들거리는 로프웨이에서 잠시 아래 계곡을 바라다 본다. 천길만길이나 되는 유황 계곡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활화산이 뿜어내는 열기를 로프웨이 속에서도 느낄 수 있다. 펄펄 끓는 유황불은 곧잘 지옥을 연상시키지만 오늘날은 유황불도 무섭지 않다. 지금처럼 유황불을 저 아래 발밑에 내려다보는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유황은 이미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어쩌면 하코네신사의 입장도 그런 것 아닐까? 고대문헌에 나오는 고마산(高麗山)의 권현(權現)도 부정할 만큼 이제 두려운 것이 없어졌는지 모른다.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頼朝)에 의해 막부정권이 설립된 이래(1192년) 대대로 정권 수호 기도처가 되었고 풍신수길, 덕천가강 시대를 거쳐 명치 정부 때까지 줄곧 어려움 없이 신사를 경영하다 보면 그 옛날 조상신을 기억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 하코네신사로 가려면 이 아시노코 호수를 배로 건너야야한다. 저 멀리 한척의 배가 오고 있다.
더군다나 명치정부의 대표적인 한국 흔적 지우기에 희생된 가나가와현 오이소의 고마신사(高麗神社)가 다카쿠신사(高來神社)로 바뀌어 버린 것처럼 하코네신사 역시 자의든 타의든 “고구려” 관련을 드러내 놓지 않는다는 비밀 서약이라도 했는지 모를 일이다. 오죽 한반도의 영향을 밝히기 싫으면 지워버리기로 작정한 것일까? 이해가 안가는 일이겠지만 이해해야한다. 다만, 잊지는 말아야 한다.
하코네로프웨이는 우리를 잠시 유황의 계곡 오와쿠다니에 내려놓았다. 구로다마고(까만달걀)로 유명한 곳이다. “구로다마고” 1개를 먹으면 10년 장수한다는 속설을 놓칠세라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좁은 기념품 가게는 초만원이다. 까만달걀은 유황온천물에 쪄서 겉이 새까만 달걀을 말한다. 5개를 담아 700엔에 팔고 있는데 불티나게 팔린다.
달걀 1개에 우리 돈으로 2,000원꼴이다. 장사도 그런 장사가 없다. 유황온천이 뿜어내는 구린내 나는 골짜기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계 대책이었을 까만달걀은 이제 기업이 되어 있었다. 유황냄새와 피어오르는 연기와 관광객들로 오와쿠다니는 포화상태였다. 후지산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인만큼 오와쿠다니는 관광코스 중 단연 인기코스라 그런지 전 세계에서 찾아온 관광객 이 6,000만 명이 넘어서고 있다는 커다란 기념 표지도 달아 놓았다. 오늘도 오와쿠다니로 오르는 로프웨이는 초만원일 것이다.
▲ 하코네신사 원궁(元宮)은 옛날 고구려신을 모시던 곳이며 이곳에서는 지금도 원궁제를 해마다 지낸다.
후지산이 바로 건너편에 손에 잡힐만큼 가까운 거리에 보이지만 바람이 몹시 차다. 후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송두리째 날려 버릴 듯한 강하고 거센 바람이다.
화산과 지진활동이 쉼 없이 일어나는 불안한 지질 대에 속한 일본이지만 때로는 이처럼 활화산도 훌륭한 관광자원이라니 불행 중 다행인지 모르겠다. 오와쿠다니는 마침 불어오는 바람으로 유황이 끓어오르는 곳까지는 진입이 금지된 채 구린내 나는 유황냄새만 맡은채 오와쿠다니를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하코네신사를 향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계곡을 넘어야 갈 수 있는 곳에 하코네신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쌌지만 후회 할 것 같아 장수달걀 한 개씩을 나눠 먹고 부지런히 모토하코네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한 선착장으로 가는 로프웨이에 몸을 실었다. 모토하코네에서 오와쿠다니가 중간 지점으로 여기까지는 오르막길이고 종점인 도겐다이(桃源臺)를 향하는 길은 내리막길이었다.
로프웨이는 숙달된 직원들의 지시에 따라 타는 것으로 내려갈 때는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이 골고루 타게 되었다. 갑자기 8인용 로프웨이 속은 세 나라 말들이 섞이기 시작했다.
얼굴은 비슷한데 제각기 탄성 소리도 다르다. 웃음소리도 다르고 카메라에 넣는 풍경도 다르다. 한중일 3국은 고대나 현재나 떼려야 뗄 수없는 관계다. 우리들은 좁은 로프웨이 속에서 서로 눈인사를 나눴다. 서로 잘 지내야 하는 사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착역에 가까이 이르니 죽죽 뻗은 삼나무 숲이 양탄자처럼 깔려있다. 일본말로 스기(杉)라고 불리우는 삼나무는 일본땅에 적합한 것인지 어딜 가나 삼나무가 빼곡하다. 특히 하코네 검문소인 세키쇼 근처의 수백 년 된 삼나무 숲은 그 자체가 명물일 만큼 유명하다. 삼나무 숲을 사뿐히 내려앉는 한 마리 학처럼 로프웨이는 우리를 도겐다이역에 내려놓는다.
숙소에서 새벽같이 일어나서 신주쿠로 나와 8시 열차를 타고 달려왔건만 아직도 하코네신사까지는 멀었다. 눈앞에 펼쳐진 호수를 건너야 갈 수 있는 곳이다. 40여분 배를 타야하는 선착장에 도착하니 방금 전에 배가 떠나 버렸다. 배도 출출하던 차에 우리는 다음 배가 뜰때까지 점심을 도겐다이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여름이라면 호수주변을 걸어도 좋으련만 한겨울이라 어찌나 바람이 센지 선착장 레스토랑에서 한발을 떼지 못한 채 카레를 단체로 시켜먹었다. 일본 음식이 별로 입에 안 맞아 고생하던 회원들도 카레만큼은 맛나게 먹었다. 시장이 반찬이란 말을 실감케 해주는 시간이었다.
▲ 아시노 호수를 달리는 해적선(왼쪽),하코네산 아래 붉은 도리이 뒤쪽에 하코네 신사가 있다(오른쪽)
커다란 통유리 너머로 아시노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식당에 앉아 우리는 배가 오기를 기다렸다. 호수의 물살은 찰랑거리는데 마음은 몹시 출렁거렸다. 잘 지어진 선착장 건물은 2층 레스토랑을 빼고는 앉아 있을 만한 공간이 없었다. 배를 타기 위해 긴 줄을 서야하는 1층 대기실도 마찬가지였다. 행여나 줄을 빼앗겨 자리를 앉지 못할까봐 2중 3중으로 서있는 관광객들은 불평한마디 없이 40분을 꼬박 서있어야했다. 불현듯 한국 은행의 번호표 생각이 났다.
금세기 발명품 중에서 몇 안가는 명발명품이 번호표 같다. 그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 꼬박 줄을 서야 했을 것이다. 하코네신사로 가는 아시노호수 선착장에서 번호표 없는 원시풍경과 맞닥트리고는 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대기실 주변을 두리번 거려보았다. 우리가 기다리는 배이름이 해적선이다. 아름다운 호수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누가 지은 것일까?
해적이란 남의 것을 훔치고 그 훔친 것으로 배를 채우고 치부 하는 사람들 아닌가? 왜 하필 해적선이라고 붙인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언뜻 우리가 찾아갈 하코네신사 유래가 떠 올랐다. “우리신사와 고구려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라며 하코네신사 신관이 쌀쌀 맞게 전화를 끊던 일이 떠올랐다. 고대한반도의 많은 유물 유적을 손아귀에 넣은 뒤 슬쩍 자기네 것인 양 위장하고는 한반도와의 관계를 부정하는 하코네신사와 해적선과는 함수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기발한 해석을 하는 회원 덕에 우리 일행은 한바탕 웃었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었다. 우리가 찾아가는 하코네신사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아시노호수 너머로 건너가기 위해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적선이 드디어 대기실 통유리 저 멀리에 모습을 나타냈다.
▲ 해적선 선착장과 버스졍류소 옆에 있는 하코네신사를 알리는 커다란 다란 도리이(왼쪽) 하코네신사 경내 휴게소에서 김치 파는 음식점 사진(오른쪽)
“오후 4시가 좀 지나서 오다와라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흐려 있던 하늘은 아무래도 비를 뿌릴 것 같았다. 우리는 곧장 시청으로 가서 오다와라 향토문화관장으로 있는 향토사가인 나카노게이지로 씨를 만나고자 했으나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언제 돌아올지 몰라 향토문화회관으로 직행했다.”
김달수 씨가 하코네로 가는 날은 비가 내렸나 보다. 김달수 씨는 재일 소설가이자 역사학자로 그가 1970년부터 1991년까지 21년간 써내려간 《일본 속의 조선문화, 일본어판》은 일본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때까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한반도의 우수한 문화가 일본 속에 깊게 뿌리 박혀 있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시절 발로 방방곡곡을 뛰며 찾아낸 보물 같은 역사의 조각들을 구슬 꿰듯이 꿰놓음으로써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일본 속의 문화와 역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각 일간지에 연재되고 방송에서도 대대적으로 소개되는 초석을 만들어 놓은 분이다.
한국에는 아직 일본어판의 완역판이 없는 대신 한 권으로 압축한 《일본열도에 흐르는 한국 혼》이란 책이 1993년 동아일보사에서 나와 많은 한국인에게 일본열도의 역사현장을 소개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고대한국유적 탐방여행과 하코네신사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 라고 궁금히 여길 독자를 위해 김달수 씨는 나카노씨의 《하코네산 개발과 고구려문화》를 들어 차분히 설명하고 있다.
▲ 하코네신사의 목조남신상과 여신좌상(왼쪽), 교토 광륭사에 있는 진하승 부부상(오른쪽)
“고구려인은 오이소(大磯)와 고자군(高座郡)을 중심으로 살아오다가 차츰 주변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의 주거지였던 곳으로 생각되는 유적이 지금까지 지명과 풍속으로 곳곳에 남아있다. 하코네산은 옛날엔 대수도장(大修道場)이었고 또 지금의 단자와산괴도 그 산이름은 고대 한국어로 붙여진 것이다. “단자와”란 고대 한국어로 깊은 골짜기의 계류를 가리키는 것이고 하코네는 신선이 사는 성산의 의미를 지닌다.”라고 소개하면서 고마가다케(駒ヶ岳) 정상에는 지금의 하코네신사의 내전(內殿)인 고마가타(駒形)신사가 있고 그것은 한국계 신사라고 말한다.
또 그는 일본에서 고마(高麗)는 고구려를 말하며 고마(駒, 망아지), 고마게타(駒下駄, 일본 나막신), 고마가다케(駒ヶ岳, 산이름), 고마이누(狛犬, 신사나 절 앞에 사자 비슷한 한 쌍의 석상)등에 붙는 “고마”로 소리 나는 말들은 고마(高麗) 곧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 하코네신사 본당 오른쪽에 있는 두 신사, 왼쪽이 고마가타권현 (남신상)을 모시는 곳이고, 오른쪽이 노젠권현(여신상)으로 이 두신은 고구려 신이다.
해적선 안에서 미리 준비한 하코네신사의 새빨간 도리이가 선명히 나와있는 책자를 보고 있는 사이 오후의 은빛 물결이 출렁이는 아시노호수 위를 해적선이 미끄러지듯 달려가 하코네신사가 있는 모토하코네로 우리를 실어다 주는데, 걸린 시간은 40분.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로 아시노호수와 하코네산 주변의 역사와 문화를 일본어로 방송해주고 있었지만 하필이면 배 후미 쪽에 자리를 잡은 탓에 모터소리가 커서 뭐라 하는지 메아리만 칠뿐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저 선실 창에 스쳐 지나가는 경치를 바라볼 뿐이었다. 먼발치에 모토하코네의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올 즈음 왼쪽으로 새빨간 도리이가 호숫가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안내책자에 나오던 사진과 똑같이 선명한 빨간 도리이 편액에는 일본의 45대 수상(首相)인 요시다 (吉田茂)씨의 글씨로 “평화”란 두 글자가 적혀있다. 이 도리이는 아시노호수의 명물로 각종 안내책자의 대표적인 사진으로 올라있다.
모토하코네 선착장에 내리면 바로 눈앞에 커다란 붉은 도리이가 눈에 띈다. 여기서부터 하코네신사가 시작 된다는 뜻이다. 하코네신사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 상가지역으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가야 한다. 2차선 도로가 좁아지는 듯한 곳에 정면으로는 신사입구 도리이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커다란 신사안내판이 신사의 유래와 함께 각종 제사일 등이 큼지막하게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신사의 규모가 제법 크다는 것을 나타낸다.
경내에 들어설 때는 4시가 채 안 된 시각이지만 벌써 해가 기울고 있었다. 일본은 해가 일찍 뜨고 일찍 진다. 관광지 등의 사진을 찍으려면 일찍 서둘러야 한다. 한국보다 1시간여나 빨리 해가 지는 것 같다.
삼나무의 울창한 나무들 때문인지 그렇지 않아도 침침한 경내가 더욱 음침하다. 경내에는 아직 관광객과 참배객들 모습이 눈에 띈다. 울창한 삼나무 숲 외에는 여타 다른 신사와 특이한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단지 어디선가 느껴질지 모르는 한반도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진도견이 마약류를 찾느라 킁킁대듯 우리는 잘 가꿔 놓은 신사 경내를 두리번거렸다.
▲ 해거름의 평화 도리이 풍경(왼쪽), 마츠리를 하는 배를 넣어두는 창고(오른쪽)
그때 저 멀리 매점 쪽에 가 있던 답사단원이 소리친다. 차림표에 김치를 판다는 것이었다. 신사 매점에서 김치를 판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일반 식당에서도 안파는 김치를 왜 이곳 신사에서 파는 것일까? 한국인이 많이 온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코네신사와 고대 한반도와 관련된 것을 아는 걸까? 고대 조상의 발자취를 찾다가 들어가 먹는 밥 한 그 릇과 김치 한 접시. 도쿄 시내에서도 어려운 일이 하코네신사 경내에서 가능하다니 부정해도 이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한반도 관련이 아니냐는 회원의 말이 참말일 것 같다.
우리 것은 우리가 기록해야, 일본인들은 기록 안해줘
지금처럼 하코네신사를 알리는 책자에서 빠진 고구려 역사는 현재 일본의 정서를 그대로 말해준다. 이러한 일본인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잘 기록해주길 바라는 것 자체가 연목구어인지 모른다. 우리 것은 우리가 기록하고 우리가 보존해야 할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참배객이 많은 신사라 그런지 각종 전각이 말끔하고 정원도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았다. 우리는 그곳을 지나 최신식 건물인 미술관을 들어가기로 했다. 마침 “하코네신사 신앙과 미술”이라는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2층과 3층에 진열된 것들은 별로 특이한 게 없었는데 다만 우리의 시선을 끄는 한 쌍의 조각상이 있었다. 보존이 극히 양호한 헤이안시대의 작품으로 목조남신상과 여신좌상이 그것이다. 이 두 신상(神像)을 보는 순간 우리는 교토 광륭사의 신라인 부부상인 진하승(秦河勝, 하타노가와카츠) 부부상과 빼닮은 모습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교토의 광륭사를 지은 사람들은 하타씨(秦氏)들이다.
과연 이 두 신상(神像)은 누구일까? 이에 대한 특집 좌담회를 소개한 《有鄰》 第469号(2006년)에서 가나가와현립 역사박물관 전문학예원(神奈川県立歴史博物館専門学芸員)인 우스이(薄井和男)씨의 말을 빌리면 “제작연대는 알 수 없지만 작풍(作風)으로 보아 헤이안 말인 10세기에서 11세기 전반으로 본다. 특히 남신상은 이와 같은 종류의 신상(神像) 중에서 보존상태가 아주 좋으며 몸 전체의 채색과 머리의 검은 관의 조화가 두드러지며 어딘가 위엄이 있는 얼굴에 눈썹이 두껍고 눈을 살짝 뜨고 있다.
옆에서 보면 코가 상당히 크고 보기에 따라서는 이국적이며 가나가와현에서는 극히 이례적인 모습의 상(像)이다. 여신상(女神像)은 머리에 쓴 머리장식 형태가 특이하고 옷도 불교색이 짙은 가라가타(唐形) 복장이다. 전국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으로 본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스이 학예원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크기는 불상에서 말하는 3척(약 90 센티)에 해당할 정도의 좌상이다.
▲ 본전 경내에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기를 소원한다.”라는 내용의 에마(소원 비는 나무 판) 가 붙어 있다. 고구려신의 효험이 있길 바래본다.
원래 신상(神像)은 불상처럼 큰 것은 없기 때문에 신상조각으로서 본격적인 작품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두 신상은 무슨 신상일까? 어쩌면 하코네의 옛 산악신앙 속의 신상이 아닐까? 여신(女神)은 노젠권현(能善権現)、남신(男神)은 고마가타권현(駒形権現)이라고 하는 게 적합할 것 같다.” 우스이 학예관은 “~적합 할 것 같다”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미 노젠과 고마가타권현은 고구려 신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우스이 박사 말처럼 하코네는 신산(神山) 고마가다케(駒岳)를 주축으로 한 고대산악 신앙영지(古代山岳信仰の霊場)로써 출발한 신사이다. 하코네신사 경내에는 이 두 신을 모시는 신사가 있다. 신사 본전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로 가야 이 신사를 갈 수 있다. 주로 방문자들은 본전에서 왼쪽으로 나가기 때문에 자칫하면 이곳을 놓치기 쉽다. 1,300여 년 전 고구려의 신을 모시는 곳이지만 안타깝게도 일반인들은 이곳이 신사 경내에 여럿 있는 신사의 하나인 줄 알고 지나치기 쉽다.
우스이 박사는 이 두 신상이 “고마(高麗, 고구려를 뜻함)인 임을 암시하지만 광륭사의 하타씨 부부일지도 모른다고 단원들은 입을 모았다. 서부교토를 개척하고 794년 간무천황(50대)을 도와 헤이안시대의 초석을 세운 사람들이 하타(秦)씨 일족이다. 7세기 이후 강력한 호족으로 성장한 하타씨 일족은 황실과 깊은 유대를 맺으며 이후 무사시노 개발(지금의 관동지방)에 눈을 돌리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하코네 개발에 경제권을 제공 했을 것이다. 물론 하코네신사도 그 수혜를 입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고마운 그들의 모습을 조각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닐까? 단원들의 상상력은 역사를 뛰어넘고 고답적인 문헌을 뛰어넘어 가장 근접한 역사의 진실에 접근한다. 일본의 숱한 기록과 문헌에 고대한반도인의 대활약이 기록되어 있건만 일본인들은 그것들을 덥기에 급급하다. 그러면서 세월이 천여 년이나 흘렀다.
지금 사람들은 그저 관광휴양지로 하코네를 둘러만 보고 있다. 붉은 도리이가 선명한 사진을 찍어 관광지 하코네를 인터넷에 올리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그곳은 한반도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이끼 낀 삼나무 기둥뿌리조차도 한반도의 정서가 서려 있는 곳이다. 아시노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가슴에 들여보라. 해거름 물가로 나와 하코네산의 정기를 기억해보라.
어둠이 깔리는 하코네 신사를 그윽히 바라다보라. 어디선가 아름다운 고구려의 전설이 들려올 것이다. 고구려는 결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나라가 아니다. 우리 눈앞에 펼쳐져있는 고마가다니(駒ヶ谷) 산이 그걸 말해 주고 비록 “고마(高麗”라고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고마가타권현((駒形権現)과 여신 노젠권현(能善権現)이 우리 앞에 있지 않은가?
기왕이면 고구려 신을 모시는 사당이라고 밝히면 좋을 것을 숨기고 있는 하코네신사 경내를 회원들은 서성인다. 저녁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어 도쿄로 돌아가야 하는 시각이지만 아쉬운듯 신사 안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위안이라면 나라(奈良) 동대사의 가라구니신사(신라계 신사) 같은 푸대접이 아니라서 그나마 위안을 삼았다.
동대사를 지은 행기스님은 한반도계 스님이고 그 터전은 고대 한반도와 밀접한 곳이지만 가라구니신사는 거의 형식만 남아 있던 것을 회원들은 기억하면서 어두컴컴해지는 삼나무 숲을 걸어 나왔다. 아름드리 삼나무 숲의 긴 사열은 마치 용감무쌍하던 고구려 병사들이 고국에서 온 사랑스런 후예들을 위해 길게 서서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 같았다. 오! 고구려인들이여!
.*찾아 가는 길
신주쿠에서 오다큐센 (小田急線)의 ‘로망스카’를 타고 유모토역(湯本驛)에서 내린다. 여기서 하코네신사로 가는 길은 버스로 가는 방법도 있으나 대부분 유모토 역에서 출발하는 등산열차라 부르는 협궤열차를 타고 케이블카와 해적선을 타고 가는 것이 고정코스다. 1일 프리패스를 사면 하코네신사까지 표를 사는 번거로움 없이 다닐 수 있다. 도쿄에서 당일답사를 하려면 신주쿠에서 아침 8시 정도는 차를 타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