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정석현 기자] 국립청주박물관(관장 윤성용)은 조선시대의 거유(巨儒) 우암 송시열(1607~1689)의 탄신일(12월 14일/음력 11월 12일)을 맞아 올해 새로 들여온 ≪만동묘 중수기 현판≫을 12월 12일부터 12월 22일까지 특별 공개한다. 천안의 한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2013년 8월 입수하여 그 동안 기초 조사 및 보존처리 과정을 거쳤다.
≪만동묘 중수기 현판≫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만동묘를 중수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약 100년 만에 사림(士林)의 본향으로 돌아 온 귀중한 문화재다. 이 현판은 가로 123cm, 세로 80cm로 상당히 크며, 6개의 판자를 연결하고 그 안에 글씨를 새겨 넣었다. 또 테두리에는 틀을 대어 현판의 위엄을 더하고, 테두리 안쪽 면에 꽃무늬를 그렸지만,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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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동묘중수기현판 사진-앞 |
만동묘, 조선 성리학의 중심
만동묘(萬東廟)는 1689년(숙종 15) 우암 송시열이 사사(賜死, 임금으로부터 사약을 받아 죽음에 이름)될 때 제자 권상하에게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 준 명(明)의 신종(神宗)과 병자호란 때 의를 지킨 의종(毅宗)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것을 당부하여 건립된 사당이다.
대의명분과 심성을 중요시 하는 우암의 사상이 깃든 곳으로, 우암을 제향하는 화양서원(華陽書院)과 함께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중심이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어필로 사액하기도 하였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기도 하였으나 1874년 고종의 왕명에 의해 다시 부활되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일제 항거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만동묘, 역사의 수난을 이겨내다
일제는 항일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만동묘를 1908년 헐고, 1937년에는 1747년(영조 23)에 세운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 만동묘 건립 내용 명기)를 쪼아대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아가 1942년에는 중수한 건물과 위패, 제구 등을 모두 불태워 완전히 철거하였다. 이러한 수난을 겪으면서도 충청도 일대의 유림들은 존화계(尊華稧)를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만동묘중수기현판≫은 존화계에 참여했던 충청도 지역 유림들이 만동묘를 중수하며 그 뜻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항일의 구심점으로 만동묘를 중수하고 일제에 타협하지 않았던 충청도 일대 유림들의 올곧은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현판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미생물 방제 처리를 마쳤고, 향후 정밀한 보존처리와 분석 작업을 거쳐 지역문화의 자긍심을 알리기 위해 상설 전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