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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금석문 톺아 보기] 성혼묘갈(成渾墓碣)

[그린경제/ 얼레빗 = 정석현 기자] 1589년(선조 22년)에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에 건립된 성혼(成渾)의 묘갈이다. 묘갈의 찬자는 김집(金集)이고 윤순거(尹舜擧)가 글씨를 썼다.

묘갈에 따르면 성혼(1535∼1598년)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우계(牛溪)이다. 아버지는 현감 수침(守琛)이고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판관 사원(士元)의 딸이다. 1551년(명종 6년)에 생원·진사의 양장(兩場) 초시에는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1554년에는 같은 고을의 이이(李珥)와 사귀면서 평생지기가 되었으며, 1568년(선조 원년)에는 이황(李滉)을 뵙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선조대 학도들의 교육에 힘을 쏟으며 여러번 관직을 사양하다가 이이의 권유에 의해 이조참판에 특배되기도 하였다. 이이가 죽은 뒤에는 서인의 영수 가운데 중진 지도자가 되었다.

   
           성혼 선생 무덤

1589년 기축옥사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조판서에 복귀했는데,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억울하게 죽자 동인의 화살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임진왜란 시인 1594년에는 비국당상(備局堂上)·좌참찬에 있으면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명나라의 명군 철군과 대왜 강화 요구에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자고 건의하였다가 선조의 미움을 샀다. 그 후 걸해소(乞骸疏)를 올린 후 사직하고 1595년 2월 파산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죽은 뒤 1602년에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에 복관사제(復官賜祭)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1681년(숙종 7년)에 문묘에 배향된 후 1689년에 출향(黜享)되었다가 1694년에 다시 승무(陞黛)되었다. 제향서원으로는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이 있다.

저서로 『우계집』6권 6책과 『주문지결(朱門旨訣)』 1권 1책, 『위학지방(爲學之方)』 1책이 있다. 선조대 붕당정치가 시작된 즈음부터 이이와 함께 서인세력의 영수였던 성혼의 행적과 가족관계 뿐 아니라 선조대 붕당정치의 전개과정을 알 수 있는 묘갈이다.


*연대:1589년
*묘비:높이 130cm, 너비 65cm, 두께 22cm
*시도지정문화재 - 경기도 기념물 제 59호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

<촐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