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정석현 기자]
찌는 듯한 이내는 자욱하게 날리는데 / 蒸嵐吹去暗
한줄기 햇볕 맑게 비치누나 / 流景照來淸
춤추듯 나는 것은 숲 속의 경색이요 / 飛舞林間色
우르릉 울리는 소리 땅속에서 나는 듯 / 轟騰地底聲
고사가 숨은 자취 아직까지 남았으니 / 高棲猶有跡
진경에는 다시 정이 많구나 / 眞境更多情
어찌하면 허공을 나는 방술 얻어 / 安得凌虛術
조용한 곳 찾아 이 생애를 보낼까 / 幽尋度此生
이는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지은 “폭포에서 회암의 시에 차운하다”라는 시다. 시와 문장에 뛰어난 고봉을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퇴계 이황과 주고 받은 <사칠왕복서(四七往復書)〉로부터 비롯되는데 이는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쟁단(爭端)을 제공하여 한국 사상사의 가장 큰 흐름의 시원(始源)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고봉과 퇴계 이전에 사단과 칠정에 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체계화된 것은 이 두 사람 사이의 논변으로부터 보고 있다. 고봉과 퇴계에 이어 율곡(栗谷)과 우계(牛溪) 사이에 논쟁이 벌어져 이것이 《사칠서변(四七書辨)》으로 묶였으며, 성호(星湖)의 《사칠신편(四七新編)》, 우담(愚潭)의 《사칠이기변(四七理氣辨)》, 한수재(寒水齋)의 《사칠이기변》, 대산(大山)의 《사칠설(四七說)》, 한주(寒州)의 《사칠원위설(四七原委說)》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의 관련 저술이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 빙월당 전경 (문화재청 제공)
고봉은 중종 22년 (1527) 11월 18일에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송현동(松峴洞)에서 태어났다. 고봉의 아버지 물재(勿齋) 기진(奇進)은 아우 복재(服齋) 기준(奇遵)과 함께 유학하였다. 그러나 복재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죄를 받는 것을 보고 세상에 대한 마음을 끊은 데다 부인마저 돌아가자 복제(服制)가 끝난 뒤 광주로 내려와 살았다.
고봉은 7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수학하여 9살에 《효경(孝經)》을 읽고 손수 베꼈으며 13살 때까지《대학(大學)》을 비롯하여 사서를 익히고, 《고문진보(古文眞寶)》와 《사략(史略)》, 《한서(漢書)》를 읽었다. 17살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 하고 《심경(心經)》을 읽으면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모색한다. 이후 20살에 향시(鄕試)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하고 21살에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그 뒤 46살 되던 (1572년)해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으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숨질때까지 조선의 석학으로서의 굳건한 입지를 세웠다.
전남 광주시 광산구 광곡길 133 (광산동) 에는 고봉 기대승(1527∼1572)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빙월당 (氷月堂)이 있다. 원래 이곳은 기대승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박상·박순·김장생·김집 등 조선의 명신들을 함께 배향하고 있는 ‘월봉서원’의 강당이었다.
월봉서원은 그가 죽은 뒤 그를 추모하기 위해 큰아들인 기효승이 선조 11년(1578) 세운 것으로 정조가 ‘빙월당’이라 이름을 지어 내렸다.
앞면 7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며 앞면과 오른쪽 반 칸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1980년 새로 세운 사당과 그의 저서를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 내·외삼문이 높다란 대지 위에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
*1979년 8월 3일 지정
*문의:광주광역시 광산구 문화공보과 062-960-8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