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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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철을 모르는 어린 마음에도 당신 얼굴에 나타나는 심각한 표정에 압도되어, 과연 내 남편은 한 가정보다도 더 큰 무엇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이구나 하고 당신 무릎 앞에 엎드린 일이 있지 않습니까?” - 가신 임 단재의 영전에, 박자혜
숙명여자대학교 숙명역사관에서 당신의 이름을 처음 보았습니다. 신채호의 아내, 박자혜.
국사책에서 ‘근우회’, ‘단재 신채호’, ‘나석주’, ‘의열단’은 눈에 익을 정도로 많이 보았는데, 왜 당신의 이름은 제게 너무나 낯설게 느껴질까요. 그러한 점에서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이렇게 몇 자 적어봅니다.
당신은 3.1운동을 하다 부상당한 동지들의 모습에 나라 잃은 울분을 느끼게 되고 이필주 목사와 함께 ‘간우회’를 조직했을 뿐 아니라 홀로 노량진까지 왕래하며 동맹파업을 추진했고, 나아가 간호사들을 설득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습니다. 또한 많은 독립 운동가들과 만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독립 운동을 도모하기 위하여 혈연단신으로 북경열차에 오르게 됩니다. 이러한 행동은 1900년대 초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 지식이면서 조선총독부 의원 간호부 소속에 산파라는 전문직으로서의 안정된 삶을 살고 있던 당신에게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을 압니다. 이는 당신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지켜나가고, 그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성격 때문이었겠지요. 그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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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선생과 박자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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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서 신채호 선생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지만 그 어떤 것보다 독립운동을 먼저 생각했던 신채호 선생님이었기에 당신은 풍찬노숙 속에서 일제의 날카로운 감시를 받으며 남편 없이 홀로 아이들을 키워내야 했습니다. 당신도 다른 여성들처럼 한 남자의 아내로서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안락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신혼 생활 2년이라는 짧은 만남을 끝으로 15년간 남편을 기다렸고, 자식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아버지의 이름을 선뜻 알리지 못했으며, 일제의 감시와 통제로 목숨까지 위태로웠습니다.
특히나 자식이 죽는 순간엔 얼마나 통탄스러웠을까요. 하지만 당신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기보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꺾이지 않는 더 크고 확고한 독립의지로 남편의 의열단 일을 도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나석주 폭탄 투탄사건’이 있지요. 더해서, 신채호 선생님이 당신에게 필요로 하는 책을 보내 달라 했을 때, 빠듯한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자신의 처지에서 능력껏 협조했던 당신. 당신이 만약 그 책들을 구해 보내주지 않았다면 시대에 남을 역작이라 평가되는 ‘조선상고사’를 우리가 지금 이렇게 볼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지금의 우리는 몇이나 알까요. 여전히 국사책에는 신채호, 나석주 선생님의 이름만 등장할 뿐, 당신의 이름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조국을 위해 여성으로서의 삶을 모두 버린 당신의 희생을 보상해주기는커녕 이름이 호적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신채호 선생님의 법적 부인이 아니라고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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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혜 선생의 근황을 소개하는 신문기사,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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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당신의 이름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니, 왜 모두가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조차 ‘독립운동가, 박자혜’라는 이름 석자 대신 신채호의 아내라는 호칭을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언론, 역사 등 다방면에서 이름을 남긴 ‘신채호’ 선생님이 있기까지 후방에서 조력해준 당신의 노고를 왜 모두들 알지 못할까요, 왜 알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실제로 신채호 선생님에 대한 자료는 무수히 많은 반면 당신에 대한 연구 자료는 1-2개뿐으로 너무나 제한적이었습니다. 이는 과거 남존여비 유교적 사상의 영향으로 아직까지 남성중심사회가 유지되고 있고, 그 때문에 여전히 남성중심으로 역사가 조명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을 포함한 어머니 또는 아내로서 역할을 했던 여성들의 헌신적인 원조와 숭고한 희생이 없었다면 남성들의 독립운동 또한 불가능했을 텐데 말이지요.
하지만 저는 빛이 있는 자리에는 항상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빛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해 어둡게 곁을 지키는 그 그림자가 박자혜 선생님, 당신이라는 것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당신의 삶을 돌이켜 보았을 때 결코 행복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삶보다 동지의 아픔, 나아가 나라의 아픔까지 품은 당신은 조국광복이 이루어진 지금의 모습을 보고 어느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며 만족하고 계시겠지요. 그래서 당신은 어느 누군가 말했듯 ‘독립을 낳은 산파’인가 봅니다. 독립운동가 박자혜 선생님, 그 이름 석 자를 마음속에 새기면서 이렇게나마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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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세윤
숙명여대 독어독문학과 재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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