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물이 모여 큰 강물을 이루고, 티끌 모아 태산도 이룩한다하거든, 우리 민족이 저마다 죽기 한(恨)하고 마음에 소원하는 독립을 외치면 세계의 이목은 우리나라로 집중될 것이요, 동방의 한 작은 나라 우리 조선은 세계 강대국들의 동정을 얻어 민족자결문제가 해결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1919년 4월 5일 해주 만세 운동 때 쓰기위해 옥운경을 비롯한 해주 기생들이 직접 한글로 쓴 독립선언서 내용이다.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오늘 해주 기생(海州 妓生) 일동이 해주 종로에 집합하여 만세를 부르고 남문에서 동문을 경유하여 서문으로 시위행진하였는데 해중월, 벽도, 월희, 향희, 월선, 화용, 금희, 채주 등이 다른 남자들과 함께 체포되다." 이는 <매일신보,每日申報> 1919년 4월 5일치 기록이다.
이에 앞서 1919년 2월 말, 문응순(예명 月仙), 김성일(예명 月姬)은 고종의 인산(因山, 태상황, 황제, 황태자, 황태손과 그 비 들의 장례)을 보기 위해 상경하여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고종의 인산을 보고 해주로 돌아왔다. 해주의 만세운동은 3월 1일과 3월 9일에 이어 4월 5일에 크게 일어났는데 이날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기생들은 옥운경, 김해중월, 이벽도, 김월희, 문향희, 문월선, 화용, 금희 등으로 이들은 모두 현장에서 잡혀가 해주 지방법원으로 넘겨져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 해주 만세운동에 앞장 선 옥운경 (그림 한국화가 이무성)
특히 4월 5일 만세 운동에서 옥운경을 비롯한 해주 기생들은 남문 쪽을 향해 나가며 태극기를 흔들고 전단을 뿌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소식을 듣고 모인 군중들이 3,000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 만세 행렬은 재판소를 거쳐 동문으로 들어와 다시 종로로 향했으며 해주종로경찰서 앞에 이르자, 돌을 집어 유리창을 부수면서 강력한 만세시위를 벌였다.
황해도에서는 해주, 서흥, 연안, 신주, 재령, 안악, 옹진을 중심으로 강력한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이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가운데 여성들의 활약이 눈부셨는데 특히 해주 기생들의 만세운동 참여는 타 지역과 견줄 수 없을 만한 것이었다.
▲ 수원 만세운동에 앞장 선 김향화 (그림 한국화가 이무성, 시 이윤옥)
“저 풀을 보라. 들불이 다 불사르지 못한다. 봄바람이 불면 다시 살아난다. 어찌 우리 2천만 국혼만이 그런 이치가 없겠는가! 이것이 내가 우리나라는 반드시 광복하는 날이 있다고 믿는 이유이다. (가운데 줄임) 3월 23일에는 기녀 독립단이 국가를 제창하고 만세를 부르면서 남강을 끼고 행진하니 왜경 수십 명이 급히 달려와 칼을 빼어 치려하자 기생하나가 부르짖었다. ‘우리가 죽어 나라가 독립이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자 여러 기생들은 강기슭을 따라 태연히 전진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박은식 선생은『한국독립운동지혈사』“진주기녀독립단” 에서 기생들의 독립운동을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나라의 존망을 앞두고 기생들도 그냥 바라다보지만은 않았다고 역사는 전한다. 진주뿐이 아니다. 해주에는 옥운경, 문재민 등이 있고, 수원에는 김향화와 33인의 기생들이 독립만세 운동에 앞장서는 등 전국적으로 기생들의 항일독립운동은 거셌다.
▲ 해주 만세운동에 앞장 선 문재민 (그림 한국화가 이무성, 시 이윤옥)
이날 해주에서 시위를 주도한 옥운경은 체포되어 1919년 9월 9일 해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을 받고 해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