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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김상옥 의사 서울 시가전 승리의 날 92주년"

서울 효제초등학교서 기념식 열려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오늘은 92년 전인 1923년 김상옥 의사의 "일제하 서울 시가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날이다. 1대 1천. 일제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의사를 상대로 정예기마대와 무장경관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체포 또는 사살을 명하였다. 그러나 김상옥 의사는 쌍권총만 지닌 혈혈단신으로 일경 16명을 처단하고 남은 한방으로 자결하였다.

   
▲ 김상옥 의사

“그 애(김상옥 의사)가 자랄 때 온갖 고생을 했어요. 옷 한 가지 변변한 것을 못 얻어 입히고 밥 한술도 제대로 못 먹였으며 메밀찌꺼기와 엿밥으로 살았지요. 어려서 공부가 하고 싶어 '어머니 나를 삼 년만 공부시켜 주세요' 하던 것을 목구멍이 원수라 그 원을 못 풀어 주었습니다. 낮에는 대장간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을 하는데 시간이 급하여 방에도 못 들어가고 마루에서 한 숟갈 떠먹고 갈 때 그저 ‘체할라 체할라’ 하던 때가 엊그제인데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 아들의 주검 앞에서 흐느끼는 어미의 심정을 어찌 다 말로 하랴.

 그런 아들 김상옥 의사([1890∼1923)는 야학을 통해 민족의식을 싹 틔우게 되고 급기야는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한 최일선에 서서 그간의 소극적인 방법을 달리하여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투쟁을 모색하다가 동지들을 모아 암살단을 조직하게 되는데 혁신단(革新團)이 그것이다.

 암살단은 김상옥을 중심으로 윤익중, 신화수, 김동순, 서병철 등으로 이들은 독립자금모집과 무기수송, 관공서 폭탄 투척 등을 계획한다. 이들의 주된 표적은 일제 총독과 고관을 비롯하여 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하는 것으로 이 계획의 효과적으로 해내려고 대한 광복회의 양제안, 우재룡 등의 동지와 적극적인 유대관계를 가지고 무력투쟁을 펼쳤으나 1차 목표로 전라도 등지의 친일파 척결을 위해 일본경찰이나 악명 높은 헌병대 습격을 감행하였다.

   
▲ "김상옥 의사 서울 시가전 승리 92주년" 기념식 모습

 

   
▲ 인사말과 축사를 하는 이들 /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장 정진태, 서울북부보훈처장 문태선, 광복회 서울지부장 기구환, 국회의원 정세균(왼쪽부터)

또한, 1920년 8월 2일 미국의원단이 동양각국을 시찰하는 날을 잡아 이들을 영접하러 나간 일제 총독과 고관 등을 처단하기 위해 직접 상해 임시정부에 가서 이동휘, 이시영, 안호 등과 협의한 끝에 권총 40정, 탄환 300여 발을 가져와 이들 시찰단의 조선 방문 때 거사를 도모했다. 미국 시찰단은 여행 목적이 관광이었지만 이때는 제1차 대전이 끝나고 일제가 대륙침략을 추진하던 때로 미국의 아시아 극동정책 특히 만주를 포함한 소련과 일본과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식민지 한국인의 처지에서 미의원단에게 일제의 침략전쟁을 인식시키고 결과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게 함과 동시에 세계여론에 호소하려는 게 그 목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들은 제2의 3·1운동과 같은 거족적인 민족운동을 일으키기로 맘을 먹었다. 그러나 미국 의원단의 서울 도착 전날 일부 동지들이 잡혀가는 바람에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하게 된다.

   
▲ 참석자들에게 인사를 하는 김상옥 의사 후손들

 이곳에서 다시 김상옥은 김구·이시영·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지도와 소개로 조국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1921년 일시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과 정탐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다시 1922년 겨울 의열단원으로 폭탄·권총·실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동지 안홍한·오복영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거사의 기회를 노리다가 이듬해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일본의 식민지 척결과 독립운동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일제는 정예기마대와 무장경관 1,000여 명을 풀어 김상옥을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으며 삼엄한 수색 끝에 포위된 김상옥은 그들과 대치하면서 몸에 지닌 권총으로 구리다(慄田)외 일본경찰 15명을 사살하고 자신도 마지막 남은 한 방으로 순절하였으니 그의 나이 34살이었다.

장한 아들을 키운 어머니 김점순 여사도 아들의 거사에 목숨을 걸고 도운 독립운동가이다. 국가는 아들 김상옥 열사에게 1962년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어머니 김점순 애국지사에게는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 효제초등학교 들머리에 있는 순국선열 김상옥 의사비(왼쪽)와 김상옥 의사 어록비

오늘 김상옥 의사 치열하게 총격전을 벌였던 곳 현 효제초등학교 강당에서는 (사) 김상옥 의사 기념사업회 주최로 "김상옥 의사의 일제하 서울시가전 승리 92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 공적>

 1913년 경북 풍기에서 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
·1920년 암살단을 조직하고 일제 고관 처단 등을 추진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1923년 일경과의 전투 끝에 자결 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