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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편지]민족교육의 선구자 나의 아버님 “학산 윤윤기” 선생을 그리며 -윤종순-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보고 싶고 그리운 아버지 어머니!

학산 윤윤기 선생

입춘이 지나니 겨울 추위가 한풀 꺾인 느낌입니다. 이제 봄인가 싶지만 바깥세상은 아직도 한 겨울인 듯 어수선하기만 합니다. 아버지 품안에서 한없는 재롱과 어리광 한번 부리지 못한 채 어느새 일흔다섯해의 봄을 맞는 둘째딸 종순이가 아버지 영전에 이렇게 붓을 들어 편지를 올립니다. 평생을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동분서주 하시며 민족교육의 올곧은 길을 향해 뛰시던 아버지를 대관절 무슨 죄로 쉰 한 살의 나이에 철사 줄에 묶인 채 처참한 생을 마감해야 했는지 아버지 나이를 훌쩍 넘게 살아오고 있는 이 여식은 그 때 일만 생각하면 참담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옥돌은 가루로 만들어도 색을 변하게 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항상 조선인임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셨던 아버지의 제자들은 이제 백발이 성성하지만 지금도 또렷하게 아버지에 대해 회상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조선인들은 옥처럼 푸른빛을 간직한 채 험난한 일제강점기를 헤쳐 나와 기필코 조국을 되찾았으며 아버지가 바라던 8.15 해방날 학교 운동장에 모든 사람이 모였을 때 5세된 저도 끼어서 함게 만세를 외쳤습니다. 북, 장구, 꽹가리, 고깔 모자 등 춤도 추며 기뻐하시던 그때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아버지께서는 3년간 후배와 뜻있는 젊은 선생께 학교를 맡기시고 서울과 중국을 드나들며 불철주야 뛰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국경을 넘나들며 쓴 7편의 자필한시중 한편의 한시와 번역

2013년 10월 22일은 광주교육대학에서 아주 뜻 깊은 행사가 있었습니다. 일제침략기에 민족교육의 선구자이신 아버지의 속 깊은 뜻을 기리고자 후배들이 아버님의 흉상을 만들어 그 제막식을 여는 자리였습니다. 구릿빛 모습의 아버지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저는 한 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어요 이는 아버지가 1950년 7월 21일 보성군 미력면 예재 고갯길에서 처참하게 운명하신 날로부터 65년만의 일이요, 훈도(교사)로 교육자의 길을 걸으신 날로부터 꼭 9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학문을 산처럼 이루겠다는 아버님의 호 학산(學山)이야말로 당신의 오십 평생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으로  일제강점기 당국의 눈을 피해 민족교육과 민중계몽을 실시하고 몽양여운형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한 민족주의자였으며 한국 최초로 무상교육기관인 ‘양정원’을 설립하여 남녀노소 모두에게 배움의 문을 연 근대교육의 선구자셨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읍니다.

2007년 한길사에서 『민족의 참 교육자 학산 윤윤기』라는 책이 세상에 선을 보였을 때 저는 아버지의 많은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제자들로부터 아버지의 투철한 국가관과 교육관을 세세히 들을 수 있어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활을 보는 듯 기뻤습니다.

 아버지는 1939년 일찍이  신학문을 배워  훈도(訓導, 교사)의 길을 걸으셨지만 그 때는 이미 나라를 빼앗긴 뒤라 황국신민 양성을 위한 총독부의 지침 하에서 조선인의 민족교육의 절실함을 깨닫고 일제의 눈을 피해 한글과 국사를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셨으니 그것은 목숨을 내건 일이였지요. 첫 부임지인 안양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교사(校舍)도 없는 천포간이학교에 부임한 아버지는 오지에 지역민들의 학교부지를 기증받아 사재를 투입 학교를 세우고 정규과정은 물론  중학교 진학반, 판임관 준비반, 취업반, 부녀자 야학반까지 꾸리는 등 밤낮 없이 교육에 매진했다고 제자들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규정에도 없는 책, 공책, 학용품 등을 제공하셨다는 것과 무료 의술활동, 어려운 집에 임산부가 출산하면 쌀과 미역을 사서 보내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제자들을 통해 아버지의 따스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운 아버지!

아버님은 1939년 천포간이학교를 떠나 점점 더 가혹해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마음껏 민족교육을 펼치기 위해 사설학교 설립을 결심하셨지요. 당시는 15년만 근무하면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는 일왕의 은급(恩級)을 받을 수 있었으나 그것을 뿌리치시고 사표를 낸 뒤 사재를 털어 뜻을 같이하는 봉강 정해룡 선생과 지역민의 노동봉사로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에 무상교육기관인 양정원을 세우셨습니다. 양정원은 모두에게 열린 학교로 단 한 푼의 월사금도 받지 않는 파격적인 무상교육과 무료치료를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한국최초의 무상학교라고 일컫습니다.

식민지 하에서 민족교육이라는 말 자체가 나올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아버지는 그 어떤 난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으셨고.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경제권을 확보하고자 광산업에 손을 대어 생긴 돈을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셨지요. 그 치열한 삶속에서도 중국을 드나드시며 독립운동에 참여 하신 것을 보면 정말 아버지는 신출귀몰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하셨는지요

어렵사리 찾은 해방의 기쁨도 잠시, 나라는 극심한 좌우 혼란기를 맞이했으나 아버지는 분란을 막고 좌우가 하나로 어우러진 통일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여운형 선생과 뜻을 함께하며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ㆍ근로인민당ㆍ시국대책협의회(시협) 등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이념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민족만을 생각하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고 제자들은 말합니다.

1950년 6ㆍ25전쟁이 터지자 아버님은 당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좌경성향의 친지들을 챙기며 보호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좌와 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올곧게 한길을 걸어온 자신의 삶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고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익 경찰은 그런 아버님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고 1950년 7월 21일 참살이라는 극단의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우리 가족의 비통함을 무어라 말해야 할까요

아버지!

얼마나 원통하고 고통스러우셨습니까? 철사 줄에 묶여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형상의 주검을 보아야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더구나 어머니는 임신 중이셨으니 그 한 많은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버지 학살 이후 어머니도 오래지 않아 집도 없이 사시면서 아버지의 생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견디다 못해 생활고로 인한 병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막내 유복녀와 두 남매를 저에게 맡기시며 유언하신 말씀 약속한대로 저는 이십칠세의 나이에 두 동생의 가장이 되어 교육시켜 장가 시집 보내어 잘 살고있어요. 어머니께서 어린 두 남매 두고 눈을 감지 못하고 신신당부 하신 막내아들도 착한 아내 만나 잘 살구요 유복녀도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남편 만나 잘 살아요 저도 장손 며느리 자리가 그렇게 어려운줄 몰랐으나 이겨냈고 책임과 함께 바르게 살았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제 인생의 등불이셨고 언제나 제 마음속에 함께 자리하셨습니다. 돌아보면 어떻게 그런 일들을 이겨냈을까 스스로 대한 생각도 들지만 어머니 아버지 삶에 견주면 이무것도 아닌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런 개인사적인 일보다도 사실 부끄러운 것은 그토록 원하시던 통일조국을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분단 70년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진 채 통일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지금 저는 너무도 절망스럽기만 합니다.

학산 윤윤기선생 흉상 제막식

존경하는 아버지, 어머니!

벌써 제가 올해 일흔 다섯살입니다. 아픈 곳도 생기고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지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아버지의 삶을 잊지 않고 조금이라도 그 뜻을 이어가려고 제2의 독립운동가들에 끼어 작은 힘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제 저의 소원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통일된 조국에서 단 하루라도 살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지금 통일의 길은 너무나 멀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낙담하거나 실망치 않고 살아가렵니다. 그것은 아버지깨서 살아생전에 꿈꾸던 세상이었으며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을 실천하신 것도 통일된 하나의 조국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것이었음을 믿기에 저 역시 포기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립고 또 그리운 아버지, 어머니!

얼마 전 ‘국제시장’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거기에 대사 한토막이 떠오릅니다. “저 열심히 살아왔지요” 라는 말 말입니다.

저 역시 이 말을 아버지 어머니께 여쭈며 붓을 놓으려합니다.

2015년 입춘 다음 날

불효녀 종순 올림

 

   
 
 
     
 

윤 종 순 

민족교육의 선구자 학산 윤윤기 선생 딸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