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조신성 선생은 1873년 평북 의주에서 약 60리 떨어진 비현역 근처에서 출생했다. 선생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간 버린 상태였으며, 어머니는 선생이 9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고아가 된 선생은 고모와 함께 살다가 16세에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남편은 가산을 탕진한 후 아편을 먹고 자살해 버렸다.
어린 시절과 결혼생활이 모두 불우했던 선생은 이에 낙담하지 않고 새로운 인생의 길을 찾았다. 곧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근대적인 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배움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가지게 되었다. 24세 되던 해 이화학당과 상동 소재 교원양성소를 졸업한 후 상동 소재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28세 되던 해에는 이화학당 사감으로 재직하였다. 이 때 이준과 함께 한국 최초의 조선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 후 그는 도일하여 일본 간다( 神田) 성경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귀국 후 부산규범여중학교, 평양진명여학교에서 교육사업을 하였다.
▲ 조신성 선생
1919년 3.1운동 이후 선생은 맹산독립단을 주도적으로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과 군자금 모집을 위해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독립단 활동을 하는 도중 독립단원들이 일제 경찰에게 붙잡히자 선생은 경찰의 팔을 붙잡고 군도를 빼앗아 던져서 이들을 달아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선생은 공무방해죄로 징역 6개월을 언도 받았다. 그 후 옥고기간이 끝날 즈음 1921년 11월 다시 맹산독립단 사건으로 선생은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옥고 기간이 끝난 후 선생은 평원군 한천에서 사숙을 세워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대동군 대평에서 취명학교를 운영하였다. 1928년에는 평양에서 근우회 평양지회를 조직하고 평양 여성들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동년에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1930년에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근우회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자 선생은 평양에서 여성들을 위한 실업운동과 교육운동에 매진하였다.
1930년 12월 여성실업장려회를 조직하였으며, 1932년에는 평양여자소비조합조직준비회를 개최하여 여성 경제기관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취명학교와 고육원을 운영하면서 불우한 어린이들을 위하여 교육운동에 힘썼다. 고육원을 설립하기 위해 그는 황해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4백여원을 확보하였다.
선생은 평생을 민족의 독립과 여성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헌신하였다. 평생을 일년 내내 산동주 치마저고리 한 벌을 빨아 입을 정도로 몸소 검약한 생활을 실천하였으며, 한 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선생에 대해 동아일보 기자였던 오기영은 “공을 위해서는 사를 돌보지 않고 사를 넣을 줄 모르는 지나친 결벽이 사람을 설복시킬 줄 알지마는 감읍시키는 능을 피울 줄 모른다”고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험난한 항일운동에서 지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갔던 것은 선생의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 때문이었다.
선생은 해방이 된 후 북한정권의 수립과정에서 소외되자 월남을 단행하였다. 그 후 선생은 대한부인회 부총재를 역임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난, 1953년 부산 신망애 양로원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남한에서의 쓸쓸한 삶을 마감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는 2007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고인의 공훈을 기렸다.
<자료: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