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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청년운동을 통해 민족구원을 실현한 '신홍식 선생'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감리교 목사이자 민족운동가인 동오 신홍식 (申洪植, 1872. 3. 1 ~ 1939. 3. 18) 선생은 한국기독교사는 물론 민족운동사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인물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민족운동을 벌인 이들이 적지 않았으나 부흥사 출신은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가 3.1운동 당시 기독교 대표 16인 중의 1인으로 선정되어 감리교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에 서명하여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신홍식 선생은 1872년 3월 1일 충청북도 청주군 문의면 문산리에서 부친 신기우(申驥雨)씨와 모친 최살랍(崔撒拉)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양반가문에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사람들로부터 신동 또는 천재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13세 때 시율(詩律)을 지었으며, 16세 때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할 정도로 한문수학에 남다른 탁월성을 드러냈다.

 그는 1887년에 부친이 별세하며 가정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 가운데서 1891년에 결혼하여 분가한 신홍식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어머니를 모시며 25세 때까지 당시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 사회적 출세의 통로였던 과거(科擧) 공부에 매달렸다.

 그러나 20대의 창창한 그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은 가난과 신분 질서였다. 그는 과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사회적 변동 속에서 분주하게 서울을 오가며 그는 과거를 준비했으나, 당시 현실은 실력보다는 뇌물이 통하던 시대였다. 극심한 가난으로 몹시 어려운 삶을 꾸려가던 신홍식 선생으로서는 도저히 이런 부패한 현실에 적응할 수 없었다.

이와 더불어 그를 더욱 절망시켰던 것은 서출(庶出)이라는 당시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신분 관념이었다. 갖고 있는 재능이나 실력과 아무 상관없이 단지 서출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을 천시하고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차별을 정당화하는 봉건적 현실에서 남다른 총기와 재능이 있던 신홍식은 큰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신홍식 선생

 1904년 무렵, 기독교에 입교하며 급격한 변화를 보이며 새롭게 길을 찾은 신홍식은 입교한 지 2년 만에 선교사에게 유능한 인재로 발탁되어 목회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1906년부터 그는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교회 권사로 목회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애국정신 고취에 투신하게 되었다. 1909년에는 충청남도 청원군 직산면 직산교회의 전도사로 전임되었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로 감리교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신학수업에 나섰고, 1913년 6월 제2회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중 대표로 연설을 하는 등 신학수업과정에서 이미 그의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10년대 목회자로서 활동하며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신홍식이 일제 강점기 전 민족적 항일운동이었던 3.1운동에 민족대표(民族代表)으로 참여했다가 투옥되었고, 이후 약 3년 만에 풀려나는 고초를 당했다.

 재판 심문과정에서 신홍식은 자신이 3.1독립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했던 이유로 일제의 주권탈취와 한국강점에 따른 민족적 모순의 증대에 있음을 당당하게 밝혔다. 목회자로 종교활동에 전념하고 있던 그는 1910년대 무력을 기반으로 하는 일제의 가혹한 차별 등을 겪으면서 국권을 상실한 민족적 비애를 절감하게 되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민족의 독립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역사적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으며, 당시 기회가 있다면 독립활동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굳은 항일의지(抗日意志)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죽어가는 민중을 살리고 파멸에 임한 사회를 개조하는 운동으로 절제운동을 인식한 그는 1920년대 이후에는 그 방법으로 금주, 금연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통해 그는 파멸에 처한 조선민중을 살리고자 하는 운동을 실천했다. 또한 그가 어떤 운동보다 큰 관심과 열정을 갖고 펼쳤던 것은 청년운동이었다.

청년이 우리의 미래라는 인식아래 그는 죽어가는 민족과 혼란에 빠진 교회를 살리는 청년들의 변혁적 실천을 요청했다. 청년들에게 선지자가 되기를 힘쓰며, 구원을 가져올 해상에 구름이 될 것을 역설하는 등 청년운동을 통한 민족 구원을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염원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잘 드러내 보여주었다.

 이밖에도 선생은 농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농촌경제의 악화와 농촌교회가 피폐현상이 심해지자, 1920, 30년대 한국기독교계가 연합해 심혈을 기울여 펼쳤던 대표적인 민족운동이었다. 목회 초기부터 농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였기 때문에 이런 농촌운동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1929년 감리사로 재직하던 원주지방에 농촌계몽 강연회를 개최하고, 토지 매입을 주된 활동으로 하는 농무사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이어 원주지역에서는 농민들의 문맹퇴치와 의식계몽의 농촌계몽운동을 직접 펼쳐 나갔다.

 절제운동, 청년운동, 농촌운동 등과 같은 사회적 활동을 통해 민족실력양성운동을 벌여 나갔으며, 흥업구락부의 가입과 활동을 통해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일제 강점 아래서 교회가 조선 기독교의 교회가 되기를 강렬하게 원했고, 이 일에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일관되게 걸어간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는 2006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선생의 공훈을 기렸다.

 

 

<주요공적>

 

○ 1917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로 민족운동
○ 1919 3·1운동 민족대표로 독립선언
○ 1921 흥업구락부와 적극신앙운동으로
~1938 민족의식 고취

 <자료: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