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들판이 비어간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듬성듬성 누런 늦벼가 성성하더니 이제 밭에 푸른색이라곤 무, 배추밖엔 남지 않았다. 풍요가 황량으로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리 오래지 않음에 마음이 소소해져, 마당에 나와 서리 맞은 꽃씨를 받으며 새삼 “남는 것”과 “남기는 것”에 대한 생각에 잠긴다. 꽃이 꽃씨를 남기듯 세상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열매를 남긴다. 그 가운데 사람이 가장 다양한 열매를 맺는데, 훌륭한 학업으로 후학들에게 맑은 산소 같은 열매를 남기는 사람, 불길 같은 예술혼으로 영롱한 열매를 남기는 사람, 성품이 온화하고 사랑이 깊어 향이 아름다운 열매를 남기는 사람이 있다. 이 열매는 식물의 열매든 사람의 열매든 지나온 날들이 새겨져 있다. 머리에 서리가 내리면 인생의 가을도 깊은 것인가? 초겨울로 접어드는 초로의 길목에서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본다. ‘나’라는 잡초는 마지막에 어떤 열매를 남기고 스러질까? 막상 생각해보니 딱히 내세울 만한 게 없다. 소장음반을 내세우자니 나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고 내용도 더 알찬 이가 여럿일 테고, 음악활동 역시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이가 많고 많을 것이다. 글 실력 또한 남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됫박 막걸리 - 김상아 그는 해방촌만 그렸다 등에는 막냇동생, 머리엔 광주리, 손에는 보따리를 든 어머니의 모습이나 남대문 시장에서 고단을 지고 돌아오는 지게꾼 아버지의 남루한 작업복 “신문이요, 석간, 석간신문이요”를 밤늦도록 외치는 신문팔이 형의 목소리를 그렸다 그는 절망을 그리지 않았다 가끔은 변두리에 가서 ‘야매 똥퍼*’를 해도 월세가 밀리고 동생들 기성회비도 밀려도 아버지 제사 한 번 제대로 못 모시고 꼬부라진 어머니 약 한 첩 못 지어드려도 그의 그림엔 어두운 따스함이 숨어 있었다 그의 화실은 삼각지에 있었다 허름하여 세가 싼 곳이지만 가난이 벼슬인 그는 가장 퇴락한 공간을 얻어 테레핀 냄새로 수리를 했다. 유난히 불빛이 많은 밤이었다. 삼각지 로타리를 돌아가는 불빛들은 죄다 이태원 쪽으로, ‘문안에’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교회 성가대들이 찬송가로 얼은 하늘을 깨고 다니는 통금 해제된 그 밤에 우리는 주머니를 털어 ‘라면땅’ 한 봉지와 막걸리 한 되를 받아와 마주 앉았다 “아껴 마셔라. 배갈 잔에 따라라” 배갈 잔이 아니라 소주병 뚜껑에 따랐어도 어차피 모자랄 술이었다 “우린 할 수 있지? 자, 이 수돗물이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미 꾸 라 지 - 김 상 아 세상이 속도와 효율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오 더디고 답답해 보여도 찬찬함과 세세함도 필요한 것이지 효율과 성과를 따지는 사람은 돈벌이 체질이고 보잘 것 없는 것도 아끼고 하찮은 것도 살피는,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장인(匠人)의 길을 걷는다오 걸작의 명장은 그런 사람의 몫이지 그렇다고 내가 명장이란 말은 아니고 나는 떨어져 홀로 난 순 하나도 귀히 여기기에 좀 더딜 뿐이라오 마행처 우역거( 馬行處 牛亦去) 말이 가는 곳엔 소도 가는 법이지 더디 가면 그만큼 많이 볼 수 있다오 고사리를 자기의 반도 못 꺾었다는 마눌님의 핀잔을 이번 한번은 잘도 빠져 나왔다만은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사월은 분홍 세상이었다. 얼음새꽃, 고들빼기꽃, 구릉대꽃이 깔아놓은 노란 멍석 위에 진달래, 산벚꽃, 개복숭아꽃, 살구꽃이 흐드러져 노을마저 분홍으로 물들였었다. 그 분홍 사월이 가니 이젠 층층나무, 이팝나무, 때죽나무, 찔레꽃 같은 흰 꽃들이 오월을 뒤덮는다. 봄비치고는 제법 많은 비가 내리는 덕택에 참으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꿀맛 같은 망중한(忙中閑)이다. 취나물, 동박 잎에 부추겉절이를 얹어 싼 삼겹살에다 아내가 빚은 청주까지 한 잔 곁들이니 이 맛이 그 맛이요, 이 세상이 바로 내 세상이다. 우리는 길게 다리를 뻗고 내친김에 영화도 한 편 감상했다. 옛날 영화를 쭉 검색하다가 빨간 냄새가 나는 제목이 있어 눌러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1972년에 제작된 <꽃 파는 처녀>라는 북한영화였다. 구닥다리 “꼰대”라서 북한영화가 버젓이 돌아다닌다는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한동안 지남력* 상실상태로 있다가 정신을 차려 격세지감(隔世之感)으로 보았다. 1930년대가 시대배경인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어느 고장인지 알 수 없으나 그리 크지 않은 저잣거리에서 “꽃분이”라는 한 처녀가 꽃을 팔러 다니는 장면에서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1) 그러면 봄이 온 것이었다. 분홍 아지랑이로 버디기재 마루가 가물거리고 강 건너 큰골 장끼소리 빨랫줄 타고 내 귀에 꽂히면. 그러면 봄이 온 것이었다. 마른버짐 얼굴에 뭉게뭉게 피어나고 기계충* 꽃 까까머리에 빨갛게 피어나면. “할머이, 제비는 운제 와?” 이제 제비만 돌아오면 될 것 같았다. 나의 이 간절한 소망이 하늘에 닿아 하늘님이 제비에게 박씨를 물어다 주라고 시킬 것 같았다. 그러면 뜬구름으로 떠도는 아부지도, 돈 벌러 서울로 간 어머이도 돌아와 온 식구가 오순도순 한 군데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리똥 앉은 꽁보리밥은 더는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2) 제비가 와야 한다. 홍매화 지는 창가에서 내다보니 아직은 메추라기와 직박구리 같은 겨울새나 텃새들만 보이지만 밭가에 냉이꽃 피고 개구리 소리 들려오니 제비도 곧 오겠지. 그래야 제대로 갖춰진 봄이라 할 수 있겠지. 과연 우리 집 처마 밑에 집을 지을까? 우리가 거들어 줄 방법은 없을까? 쑥국이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다며 눈이 동그래진 아내에게 숟가락을 손에 들고 아침부터 제비 얘기만 해댔다. (3) 그래, 어쩌면 그때 이미 나는 은하수를 건넜는지도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너, 김진성 형 알지? CBS. 그리고 진이 형, 이진. 어제 모처럼 만에 만났다. 얘기 끝에 네 얘기도 했다. 대단하다고 하더라.” 그의 목소리가 많이 달라졌다. 젖은 솜이불처럼 그를 짓누르던 깊은 좌절이 벗겨지고 있었다. 그는 한때 스타 방송작가였다. 유명 방송사의 라디오 간판 프로들이 그의 펜 끝에서 나왔다. 그런 그가 공교롭게도 나와 거의 같은 시기에 “파산”이라는 혹독한 통과의례를 치르게 된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잘 몰랐다. 그저 내가 가지고 있던 물질적인 걸 모두 잃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리고 잃은 물질이야 열심히 다시 뛰면 만회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 믿음은 옳았다. 하지만 그 믿음의 실현을 위해선 무서운 의지가 필요했다. “형. 우리 노가다 판이라도 나갑시다. ‘나 죽었소.’하고 한 몇 년 종잣돈 만들어 다시 시작합시다.” 내 말에 솔깃하여 관심을 두는 듯했으나 그는 끝내 용기를 내지 못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뭐가 떨어질지, 언제 내가 저 까마득한 바닥으로 떨어질지 몰랐다. 콘크리트 두들겨 깨는 소리가 귀마개를 뚫고 들어와 고막을 찢었다. 희뿌연 분진으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멸치 장수 그가 북평장에 온 건 꽤 오랜만이었다 장사가 시원찮아 쉬었는지 다른 장엘 다녔는지 알 수 없지만 걸걸한 호객 소리나 깎아 주는 체 받을 거 다 받는 너스레는 여전했다 그에게 달라진 게 하나 있기는 했다 본디부터 아내였는지 안 보이는 사이에 얻었는지 알 수 없지만 허리춤에 여인네를 하나 소문 없이 꿰차고 있었다 여인은 꼼짝도 안 하고 한 곳만 바라보거나 낚시 의자에 앉아 졸기만 했다 배냇병인지 살다가 탈이 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흥정 중에도 곁눈질로 여인네를 챙기곤 했다 무표정하기만 한 여인은 좋아서 따라왔는지 억지로 끌려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손길이 싫지는 않아 보였다 좌판 자리를 말끔히 비질하는 그가 다음 장에 또 올지 말지는 알 수 없지만 늘 다정히 보듬고 살기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그땐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늘 벙거지를 눌러쓰고 다녔고, 옷이며 신발이며 온몸에 때 국물이 흘러내렸다. 가뜩이나 어눌한 말재주에 동문서답을 해대기 일쑤이니 같이 얘기하려면 웬만큼의 참을성은 바탕에 깔아야 했다. 그는 경기도 어디쯤 가서 파지를 주우며 산다고 했다. 내게 올적엔 어떤 때는 한참을 걸었는지 옷을 털면 금방이라도 먼지가 풀썩일 것 같았다. 그런 그였지만 밥걱정은 안 한다고 했다. 막걸리가 주식이니 밥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주독이 쌓여 그런지 거무튀튀한 얼굴에 군데군데 쌀알 같은 게 돋아 있기도 했다. 머릿속에 환등기가 켜졌다. 흑백사진이 여러 장 지나갔다. 그래도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철옹성인 줄 알았던 18년 절대권력이 무너졌다. 아직은 곳곳에 왕조숭배사상이 남아 있던 터여서 하늘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줄 알고 벌벌 떠는 사람도 많았다. 당장이라도 김일성이가 쳐내려올 것 같고 수출길이 막혀 공장이 멈추고 다 굶어 죽을 것 같은데도 세상은 여전히 굴러가고 있었다. “3김 시대”가 오는 듯했으나 어느 귀신이 채 갔는지 “3김”의 3자조차 증발해 버리고 영문 모를 총성이 서울 밤하늘을 가르는 가운데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길 잃은 고라니 - 김 상 아 길을 잃는 꿈을 꾸곤 했다 진창길을 허우적대거나 벼랑에 매달려 바둥거리거나 길이 없어져 갈팡질팡하다 깨곤 했다. 때론 길을 잃고 싶기도 했다 사막 뿔살무사처럼 낮에는 모래 속에 숨었다가 신기루를 찾아 하염없이 달빛 속을 걷고 싶었다 칸첸중가* 어느 골짜기도 좋고 안데스의 한 비탈길이라도 좋았다 정치가 없고 모순이 없고 부조리와 불평등이 없는 곳 이긴 자와 진 자, 먹는 자와 먹히는 자가 없는 곳이라면 외치*가 되더라도 찾아내고 싶었다 길 잃은 고라니야 너는 길을 잃어 도시에 들어왔다만 아무래도 나는 저 별꽃밭으로 나가 길을 잃어야겠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프록시마b행성이나 대마젤란은하 어느 행성쯤에서 그리운 이들과 새로운 터전을 일궈야겠다 *칸첸중가 ㅡ 히말라야산맥에 있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외치 ㅡ 알프스에서 냉동상태로 발견된 선사인에게 붙여진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