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1. 1500년 만에 제 빛 찾은 금동관모ㆍ금동신발 1,500여 년 전 백제 장인의 손길로 빚어냈던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이 아름다운 옛 자태를 되찾았습니다. 2006년 3월 전남대학교 박물관(임영진 교수팀)에 의해 발굴됐는데 전남 고흥 안동 고분에서 발굴했던 금동관, 신발과 갑옷 등 유물 180여 점이 보존처리를 마치고 지난 6일 공개된 것이지요. 이 귀중한 유물들은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센터에서 4년간 첨단기기를 써서 작업한 끝에 원형을 살려낸 것입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고깔 모양의 모자인 높이 23.2㎝의 금동관모입니다. 금동판을 일일이 도려내어 만든 정교한 잎사귀 모양의 뚫음 무늬(투조문)로 가득 덮여있지요. 징(스파이크)이 달린 금동신발의 경우 윗면이 ‘凸’(철)자 모양, 바닥면은 마름모꼴 뚫음무늬로 수놓았습니다. 심하게 녹슨 탓에 안의 흙을 남긴 채 겨우 복원했다고 합니다. 철판을 잇대어 만든 높이 35㎝의 판갑옷과 챙 달린 철제 투구도 눈길을 끄는데 판갑옷은 철판을 사람 몸의 곡선에 맞게 구부려 가로로 대고 쇠못으로 연결하여 만든 갑옷이며, 철제 투구에는 챙이 달린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작은 삽 모양의 옛 농기구인 살포도 있습니다. 살포
1830. 서울 청량리 숭인원은 대한제국의 슬픔을 담고 있다 사적 361호로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204-2에 있는 숭인원(崇仁園)은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아들 이진(1921~22)의 묘입니다. 영친왕은 형인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태자가 되었으나 11세에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습니다. 원래 약혼녀가 있었지만 일제에 의해 강제로 파혼당하고, 1920년 일본 왕실의 나시모토 마사코(梨本方子, 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하였지요. 조선 황실의 후손을 끊어놓으려는 일제는 일본 어의에게 불임녀라고 판정받은 마사코와 혼인시켰지만 1921년 8월 18일에 아들 진(晉)이 태어났습니다. 1922년 4월 26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생후 8개월 된 황손 진을 순종에게 보이고 혼인보고도 할 생각으로 동경에서 귀국했습니다. 이들 영친왕 부부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날인 5월 11일 8개월 된 아기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아기의 입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고 하여 독살일 거라 했지만 일제는 배앓이로 죽었다고 공식발표를 했지요. 이에 대해 일본의 피가 절반 섞인 황손을 인정할 수 없다 해서 독살했다는 설과 일제가 황실의 손을 끊으려 독살했다는 설
1829. 아버지 뫼가 보이는 십리 밖에서 말을 내린 김주신 내일은 어버이날입니다. 우리는 옛적 효도를 했던 사람들 얘기를 많이 듣지요. 효도는 임금에게 바치는 충성에 우선된다고도 합니다. 중국 24 효자에 속하는 초나라 현인 노래자(老萊子)는 나이 70살에 아이 옷을 입고 아이 같은 장난을 하여 부모를 즐겁게 했습니다. 그런 효자가 숙종 때에도 있었지요.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아버지 김주신은 아버지 김일진이 세상을 뜬 뒤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모셨는데 뫼에 계신 아버지를 뵈러 갈 때 멀리 십리(4km) 정도 떨어진 송강고개에 당도해 아버지의 뫼가 보이면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김주신(1661~1721)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하경, 호는 수곡으로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자라면서 아버지가 없는 것을 한으로 여겨 글공부에 전념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밤 늦도록 글 읽는 것을 안쓰럽게 여기자 김주신은 밤늦은 시간에는 목소리를 낮추어 어머니의 걱정을 덜었을 만큼 어머니에 대한 효도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무덤을 만들 때는 비석을 소등에 얹어 실어 날랐는데 소가 숨이 차서 혀를 빼물고 헐떡이는 것을 보고 너
1828. 조선 숙종 때 고택 사라질 위기에서 구하다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는 300년 된 고택이 있습니다. 그 고택은 조선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의 아버지 김주신이 아버지 김일진에게 제사지내며 살림을 했던 영사정(永思亭)입니다. 영사정은 부엌과 곳간 사이의 판자벽이 커다란 자귀로 툭툭 쳐서 거칠게 다듬은 판자라는 점, 대청마루에서 뒤꼍으로 난 문은 판자를 붙여서 만든 양여닫이문인데, 문짝 가운데에 문설주가 서 있는 아주 희귀한 구조라는 점과 함께 300년 한옥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사정은 오래된 목조건물인데다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폐가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김주신의 후손들은 문화재로 지정받으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번번이 퇴짜를 맞아 포기하고 개축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소중한 고택은 우리 곁에서 사라질 뻔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이 영사정을 발견한 문화재건축기술사인 한겨레건축사사무소 최우성 소장은 온몸을 던져 이 영사정이 사라지는 것을 막아냈습니다. 문화재청에 탄원을 내고 알 만한 사람들을 모두 찾아다니며 호소하기도 했지요. 또 국회도서관을 뒤져 30년 전에 영사정의 모습
1827.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가 쓴 언문 글 세편 우리 문학사에서 발견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한문으로 된 것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글로 된 작품은 매우 드물다는 것이지요. 그런 가운데 몇 년 전 발견된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가 쓴 세 점의 작품 ≪션군유사(先君遺事)≫, ≪션비유사(先妣遺事)≫ 그리고 “뉵아육장” 등 세 작품이 든 자료는 그래서 귀중합니다. 먼저 ≪션군유사≫는 이원왕후가 돌아가신 아버지 경은부원군 김주신이 살았을 때의 일화를 적은 것입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김주신은 궁중을 드나들 때 몸가짐을 조심하여 궁인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또 임금의 특별한 배려를 사양하고 법도를 지켰지요. 그리고 딸을 특별히 사랑했지만 욍후가 된 뒤에는 신하의 예로 깍듯이 모셨다고 합니다. 이어서 ≪션비유사≫는 인원왕후의 어머니 곧 김주신의 아내인 가림부부인 조씨가 살았을 때의 일화를 쓴 작품입니다. 가림부부인 조씨 역시 딸이 왕후가 된 뒤 근신하고 궁중 드나듦을 삼갔습니다. 또 집안 사람들에게 궁중으로부터 선물을 받지 못하도록 단속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왕후인 딸에게도 법도를 지키고 선물을 받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그밖에 한 자료는 제목이 없는데 ‘시
1826. 오목해시계에 12지신을 그려넣은 세종의 마음은?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알다시피 1443년 세종임금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습니다. 그런데 그 훈민정음을 창제한 까닭은 어리석은 백성의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었지요. 만일 지식계층인 사대부를 위한 것이라면 한문에 익숙해 있기에 굳이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세종은 백성과의 소통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전 두 번이나 백성과 소통하기를 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효도를 가르치는 “삼강행실도”를 만들어 보급한 것이고, 또 하나는 오목해시계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혜정교에 놓아둔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 글자가 아닌 그림으로 소통하려 한 것입니다. 특히 오목해시계 곧 앙부일구(仰釜日晷)는 그저 해시계가 아니라 그 안에 12지신 그림을 그려넣어 한문을 모르던 백성도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한 백성 사랑의 한 표현입니다. 곧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던 오목해시계는 임금이 백성과 시간을 공유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시계를 지배층만 독점하지 않고 글을 모르는 무지렁이 백성도 알게 한 것이죠. 이미 한글창제 9년 전 세종은 글자로 소
1825. 조선시대의 통신수단이었던 봉수와 연대 봉수(烽燧)는 횃불[烽] 연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시절의 통신시설입니다. 봉수를 군사 목적으로 사용한 것은 고려시대 때부터였지요. 봉수는 산꼭대기에 만드는 것이고 연대(煙臺)는 바닷가에 만드는 것으로 임무는 같지만 이름이 서로 다릅니다. 봉수와 연대에서 평시에는 불이나 연기를 1개, 외국 배가 나타나면 2개, 그 배가 뭍(육지)으로 가까이 오면 3개, 뭍으로 침범하면 4개, 싸우게 되면 5개를 올리는 “5거법”을 썼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잘 볼 수 있도록 밤에는 횃불을 밝히고, 낮에는 연기를 피웠으며,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려 불이나 연기로 통신할 수 없을 때는 봉군(봉수 군사)이나 연군(연대 군사)이 달려가서 연락을 했지요. 또 봉수와 연대 주변 백 걸음 안에서는 봉화로 잘못 아는 것을 막으려고 무당의 굿이나 마을 제사 등을 못하게 했습니다. 봉수는 일반적으로 돌로 쌓지 않고 둥글게 흙을 쌓아 올렸고, 밑에는 도랑을 만들어 물이 빠지게 했지요. 반면 연대는 적과 대치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바닷가 싸움에 유리한 언덕에 네모나게 돌로 쌓았습니다. 각 봉수에는 6명의 별장과 12~36명의 봉군이, 연대에는
1824. 도쿄 증상사에 고려대장경이 있는 까닭 일본 도쿄에 가면 도쿄타워 가까이에 증상사(增上寺, 죠죠지)라는 절이 있습니다. 이 증상사 안의 신(新)경장 건물에는 고려대장경이 있지요. 이곳에 고려대장경이 있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성종실록 183권, 16년(148년) 9월 16일 기록에 보면 노사신의 상소가 눈길을 끕니다. “대장경은 이단의 책이므로 비록 태워버린다 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더욱이 인접한 나라에서 구하니 마땅히 아끼지 말고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장경 1건을 만들려면 그 경비가 매우 많이 들어서 쉽사리 조달할 수가 없습니다. 요전번에는 대장경이 나라에 무익하였기 때문에 왜인들이 와서 구하면 문득 아끼지 않고 주었으나 지금 몇 건 남아있습니까? 다 주고 나면 또 달라는 억지에 골치가 아플 것입니다.” 말하자면 싹 주어 버려도 아깝지는 않지만 한꺼번에 다 주고 나서 다시 달라고 떼를 쓰면 만드는데 돈이 드니까 대장경을 달라고 할 때마다 조금씩 주자는 말이지요. 이 무렵 일본은 무사들이 권력을 잡았던 시절로 그들은 자신들의 번영과 안전을 위해 절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에 사신을 보내면 으레 수준 높은 고려대장경을 달라고 졸
1822. 도자기에 그림을 그릴 때 쓰던 물감은 무엇이 있을까? 도자기에 그리는 그림은 무엇으로 그릴까요? 만일 일반 물감을 쓴다면 도자기를 고온으로 구울 때 남아 있지 않겠죠. 그래서 도자기에 그림 그릴 때는 특별한 물감을 씁니다. 그 특별한 물감은 물체에 색을 입힐 수 있는 색소로 물에서 녹는 염료와 달리 물이나 기름, 알코올 등에 녹지 않는 성질이 있지요. 또 녹을 방지하고 광택이 나게 하며, 칠이 벗겨지지 않도록 합니다. 우리 겨레가 전통적으로 도자기에 써온 물감에는 철화물감, 동화물감, 청화물감이 있습니다. 먼저 철화물감은 녹슨 쇠붙이에서 녹을 긁어모아 찰흙을 조금 섞고 불에 구어 만들지요. 이 철화는 물에 풀어 붓으로 찍어 그림을 그리는데 갈색, 적갈색, 흑갈색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철화는 유약 속으로 조금 퍼지는 성질이 있어 섬세한 묘사는 어렵지만 대신 굵고 힘찬 표현에 좋습니다. 굵직한 매화줄기, 넓적한 포도잎, 듬직한 바위산 등을 그릴 때 아주 효과적이지요. 붉은색을 내는 동화는 구리의 녹으로 만드는데 진사라고도 부릅니다. 붉은색을 내는 동화지만 그림을 그린 뒤 가마에서 구울 때 가마에 공기를 많이 넣어주면 푸른색을 띠고 부족하게 하면 피처
1821. 고조선의 뛰어난 합금기술이 만들어낸 청동검 고조선의 유물 중 대표적인 것은 청동검입니다. 그 청동검으로 미루어 볼 때 고조선은 아주 뛰어나 합금기술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과학으로 확인하면 주석은 13%~19%였을 때 가장 단단하다고 하지요. 그런데 고조선의 청동검에는 주석이 정확하게 13%~19%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고조선보다 후대인 진시황의 무덤에서 발굴된 청동검은 주석비율이 21%가 넘는다는 걸 생각하면 대단한 합금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게지요. 그뿐만 아니라 고조선의 청동검에는 6% 정도의 아연이 들어 있습니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에 아연을 더함으로써 청동을 쉽게 만들 수 있고, 주석에는 없는 탄성을 더해주어 밖으로부터의 충격이나 휨에도 견딜 수 있는 새로운 청동검을 만들 수 있었지요. 또 칼에 등을 만들어 칼이 들어간 곳을 따라 공기가 쉽게 들어갈 수 있게 했고, 피홈을 만들어 피가 흘러나오도록 했습니다. 이는 공격할 때에 살상력을 높여주는 것인데 당시로써는 최첨단무기였다고 하지요. 역사왜곡의 주범 일제와 친일사관을 가진 사학자들로 인해 우리 역사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한민족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은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