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명대학교 평생교육원 수강 안내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상명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한국문화 강좌가 시작됩니다. 다만, 지난해의 내용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의식주 등 개괄적인 내용은 빼고 일반인들이 흥미롭게 생각할만한 내용이 많아졌습니다. 예를 들면 “춤을 같이 추는 사람 동무, 부부금슬을 일컫는 악기는”, “아픈 허리엔 구운 기와, 밥에 뉘가 나오면 누구 탓?”, “과거장의 거벽과 사수, 보쌈을 당한 선비, 상인들의 복가지타기”, “일본 국보 1호 광륭사 미륵상의 야릇한 미소 의미는?” 등입니다.얼레빗 독자 여러분의 많은 수강신청 기다립니다. 고맙습니다. 참고 : 강좌 시간이 맞지 않으신 분은 가능한 시간을 보내주십시오. 일정한 수강생이 되면 별도로 시간을 만들겠습니다.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김영조 드림=============================================================2010학년도 제1학기 상명대학교 평생교육원 신입생 모집1. 모집기간 2010년 2월 16일(화) ~ 개강 때까지2. 교육장소 대학로 동숭동 캠퍼스(과정에 따라 장소가 다름)3. 모집방법 과목별 선착순 마감4. 수업기간 2010년 3월 9일(화) ~ 6월
1770. 한복 바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님 설날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는 한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프로그램에는 우리나라 한복 학자 중 내로라하는 분들이 출연했더군요. 모델을 앉혀놓고 한복 설명을 하는데 남자 바지 끝에 묶는 대님 설명을 대수롭지 않게 하고 있었습니다. 한복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시청자들이 혹시 잘못된 상식으로 받아들이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보았습니다만, 한복의 대님은 그날 방송에서처럼 아무렇게나 적당히 편리한 단추나 찍찍이를 달아 입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 방송에서는 입는 사람이 편리한 식으로 고쳐 입으면 된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있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참에 우리는 대님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대님을 매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안다면 대님은 생략할 수도 적당히 바꿀 수도 없는 것입니다. 원래 바지 대님은 겨울철의 부목 구실과 밖의 찬 기운을 막아줄뿐더러 몸의 기운이 밑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땅 위의 음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구실을 해줍니다. 음양으로 볼 때 남자는 양인이라 음기의 땅 위를 걸어다니는 동안 음기를 많이 받게 됩니다만 이때 대님을 맴으로써 이를 막을 수 있지요. 또한, 대님
1769. 구정이 아니라 설날이라 불러주세요 구정이란 "舊正"으로 신정 곧 "新正"이 양력설을 말하는 데 견주어 음력설을 그렇게 한때 불렀습니다. 이는 일본제국주의 영향이며 그들은 명치 이후 음력을 버리고 양력을 쓰면서 우리나라 고유의 음력설을 이중과세라 하여 중지시키고 자기네 명절을 따르도록 한데서 생긴 말입니다. 수천년 내려오던 우리 겨레의 최대 명절인 설은 에 설날, 대보름, 한식(寒食), 삼짇날, 단오, 한가위, 중양절(음력 9월 9일), 팔관회(음력 10월 15일), 동지를 ‘구대속절(九大俗節)’로 지낸다 했고, 조선시대에도 설날, 한식, 단오, 한가위를 4대 명절로 꼽을 만큼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오래된 전통이었습니다. 중국 사서인 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도 신라인들이 설날 아침에 서로 인사하며, 임금이 신하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고, 이 날 일월신을 배례한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조선총독부는 1936년 ≪조선의 향토오락≫이란 책을 펴낸 이후 우리말, 우리글, 우리의 성과 이름까지 빼앗고 민속놀이를 금지했지요. 또 이들은 민족정신을 없애려 한 맥락에서 우리의 설날을 ‘구정’이라고 깎아내렸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저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아직도 우리는
1768. 설날에 예법에 맞는 세배 해보세요 며칠 뒤면 우리의 큰 명절 설날입니다. 이 설날의 가장 중요한 세시풍속은 절 곧 세배겠지요. 하지만, 절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에 엉터리로 절하는 이가 많습니다. 먼저 여자의 세배는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어깨너비 정도로 손을 내려뜨리며 절을 하는 것이 바른 예법입니다. 양손을 어깨 폭만큼 벌리고 손가락은 모은 채 약간 바깥쪽으로 향하게 한 뒤 서서히 몸 전체를 굽힙니다. 갑자기 목만 떨어뜨려서는 안 되며 머리는 땅바닥에 닿을 듯 말 듯하게 하지요. 이것을 우리는 평절이라고 하는데 혼례, 회갑 등 큰일을 뺀 나머지 곧 명절을 비롯하여 평상시는 평절을 하는 것입니다. 남자의 절은 큰절, 평절 구분이 없습니다. 또 손을 잡는 법을 '공수법(拱手法)'이라 하며 남자는 왼손을 오른손 위에 포개고 여자는 반대로 오른손을 왼손 위에 포갭니다. 그리고 흔히 세배를 하면서 세배를 받는 어른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처럼 명령투의 말을 하는데 이것은 예절에 맞지 않습니다. 세배를 한 뒤 일어서서 고개를 잠깐 숙인 다음 제자리에 앉지요. 그러면 세배를 받은 어른이 먼저 덕담을 들려준 후 이에 화답하는 예로 겸손하게 얘
1767. 양괭이 물리치기와 설 세시풍속 몇 가지 며칠 있으면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명절 설이 다가옵니다. 그 설에는 예로부터 재미있는 세시풍속이 전해 옵니다. 그 가운데 특히 “양괭이 물리치기”는 어른들도 재미있어합니다. 양괭이는 한자로는 야광귀(夜光鬼)라고도 하는데 이 귀신은 설날 밤, 사람들의 집에 내려 아이들의 신을 두루 신어보고 발에 맞으면 신고 가버립니다. 그러면 그 신의 주인은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귀신이 무서워 신을 감추거나 뒤집어놓고 잠을 잤지요. 그리고 체를 마루 벽이나 장대에 걸어 두었습니다. 그렇게 해두면 야광귀가 와서 아이들의 신을 훔칠 생각을 잊고 체의 구멍이 신기하여 세고 있다가 닭이 울면 도망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풍속으로는 ‘원일소발(元日燒髮)’도 있었습니다. 원일소발은 남녀가 한 해 동안 빗질할 때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빗상자 속에 넣었다가 설날, 해가 어스름해지기를 기다려 문밖에서 태움으로써 나쁜 병을 물리친 풍습입니다. 그밖에 새해의 시작 설날에는 길흉을 점치는 풍속도 있었습니다. 설날 꼭두새벽 거리에 나가 맨 처음 들려오는 소리로 한 해의 길흉을 점친 것은 '청참(聽讖)
1766. 미륵사 석탑, 일제에 의해 콘크리트 범벅이 되었다 국보 제11호 미륵사 석탑(彌勒寺 石塔)은 백제 말 무왕(재위 600∼641) 때에 세워졌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이 탑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탑으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입니다. 그런데 이 석탑은 지금 수리가 한창이지요. 일제에 의해 콘크리트 덩어리가 덕지덕지 발라진 이 석탑은 모두 해체하여 보수하여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으로 첫 작업이 시작된 지 벌써 9년이 되어갑니다. 해체작업이 이리 오래 걸리는 것은 이 석탑에 가해진 상처가 그만큼 크고도 깊었던 탓입니다. 그것은 치과용 전동 드릴까지 동원하여 조심스럽게 떼어낸 콘크리트 잔해물만 무려 백여 톤이 넘는 분량이라는 사실이 증명합니다. 100년 전 이른바 일본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기록한 ‘조선유적조사약보고서’에는 미륵사 석탑(서탑)이 긴급수선이 필요한 유물이라며, 여기에는 “수리비 약 5만 원, 응급수리비 약 2천 원”이 든다는 의견을 덧붙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1915년 12월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응급수리공사가 진행되었는데, 바로 그때 이 미륵사 석탑
1765. 종묘제례악을 시작할 때와 끝낼 때 쓰이는 악기 종묘제례악을 연주할 때에 쓰이는 독특한 악기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축(祝)”이란 악기는 종묘제례악에서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종묘제례악을 끝낼 때 쓰는 “어(敔)”라는 악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축과 어 두 악기는 짝이 됩니다. 우리나라의 악기는 앉아서 연주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어와 축은 방대라는 받침대 위에 올려놓으므로 서서 연주하지요. 축은 네모진 나무 상자 위판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나무 방망이를 세워 상자 밑바닥을 내려쳐서 소리를 내지요. 축은 양의 상징으로 동쪽에 자리 잡고, 겉면은 동쪽을 상징하는 청색으로 칠하며 사면에는 산수화를 그립니다. 축을 치는 수직적인 동작은 땅과 하늘을 열어 음악을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어는 나무를 엎드린 호랑이의 모습으로 깎아 만든 악기지요. 호랑이의 등에는 등줄기를 따라 꼬리 부분까지 27개 톱니를 길게 박아 놓았습니다. 둥근 대나무 끝을 아홉 가닥으로 쪼갠 채(籈竹-견죽)로 호랑이의 머리를 세 번 치고는 꼬리 쪽으로 한번 훑어 내립니다. 이러기를 세 번 한 다음 박을 세 번 울려 음악을 끝내는 것이지요. 어는 서
1764. 설날에 온 식구가 윷놀이를 즐기면 어떨까요? “동방의 풍속이 예로부터 세시를 중히 여겨 / 흰머리 할아범, 할멈들이 신이 났네. / 둥글고 모난 윷판에 동그란 이십팔 개의 점 / 정(正)과 기(奇)의 전략전술에 / 변화가 무궁무진하이. / 졸(拙)이 이기고 교(巧)가 지는 게 더더욱 놀라우니 / 강(强)이 삼키고 약(弱)이 토함도 미리 알기 어렵도다. / 늙은이가 머리를 써서 부려 볼 꾀를 다 부리고 / 가끔 다시 흘려 보다 턱이 빠지게 웃노매라.” 위 시는 고려말-조선초를 살다간 큰 학자 목은 이색이 쓴 ≪목은고(牧隱藁)≫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색(1328-1396)에게 시(詩)는 일상이었는데 무려 6천여 수에 전해집니다. 이 목은의 시가 수록된 ≪목은고≫는 원래 아들 이종선이 펴냈지만, 현재 온전하게 전하는 전집은 인조 4년(1626)에 목은의 10대손 이덕수가 목판으로 펴낸 판본이 가장 널리 알려졌습니다. 위 시는 이웃 사람들의 윷놀이를 구경하면서 쓴 것입니다. 이 시로 미루어보면 윷놀이는 고려시대에도 많은 사람이 즐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목은은 윷놀이를 “변화가 무궁무진하다”라고 표현합니다. 또 “졸이 이기고 교가 진다.”라고 하여 서툰
1762. 나라밖으로 빠져나간 문화재 10만여 점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나라밖에 흩어져 있는 한국 문화재의 현황파악을 위해 각국 소재 한국 문화재 목록화 작업과 학술조사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나라밖 한국 문화재는 기존에 알려진 76,143점에서 31,000여 점 더 늘어난 107,857점(18개국 347개 박물관/미술관/도서관 등)으로 확인했습니다. 이번 확인작업에서는 그간 정확한 목록 확인 없이 알려진 것들은 빼고, 현지조사와 도록, 소장처 제공 목록 등을 통해 분명히 확인된 것만 집계했지요. 이번에 늘어난 31,000여 점은 그동안 활발히 진행된 일본, 미국지역의 책을 통한 조사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각국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는 일본이 도쿄국립박물관 등에 61,000여 점, 미국 스미소니언 프리어 미술관 등 27,000여 점 순이며, 크게 나누면 고고미술품 54,000여 점과 책 53,000여 점 등입니다. 이처럼 나라밖으로 빼돌려진 것 중 특히 의궤,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등 중요한 국보급 책들을 빼앗아간 프랑스는 이것들을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또 이토 히로부미 등이 일제강점기 때 싹쓸이해간 것들은 우리 겨레가 신성시한
1761. 조선시대 종이로 은을 만든다는 도사 예나 제나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옛날 서양에서 있었다는 연금술도 그런 것의 하나일 테고, 요즘 간간이 말썽이 나는 피라미드판매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조선시대 제20대 경종 임금 때에도 있었습니다. 거문고를 타면 검은 두루미가 와서 앉는다 하여 현학도사라 불린 이태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속리산 석굴에서 왔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이야 속리산하면 유명한 관광지로 웬만한 사람이면 한 번쯤은 다녀올 만한 곳이지만 당시는 한양에서 멀기도 했고, 호랑이가 나오던 심산유곡이어서 그곳에서 도를 닦았다 하면 누구나 존경의 눈으로 바라볼 법했지요. 그는 자신이 둔갑술에 능하고, 백 리 밖의 사실을 능히 알아내며, 귀신을 부려서 어떤 물건이든 가져올 수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은이 필요하다고 하자 “귀신을 부려서 은화를 얻으려면 붉은 도장이 찍힌 종이가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붉은 도장 곧 관리의 도장을 찍힌 종이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때 이 현학도사를 따르던 사람 중 공조에 속한 선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