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0. 통한의 코영수증을 보셨나요? 풍신수길은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수많은 조선 사람의 코를 베어 오게 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풍신수길은 부하들을 조선에 보내 장수들에게 일일이 코영수증을 써주고 베어진 코를 받아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면 풍신수길은 일본에 앉아 역시 일일이 그 숫자를 센 뒤 장수들에게 감사장을 써 보냅니다. 그런 다음 풍신수길의 명으로 일본 온 나라를 자랑스레 순회한 뒤 교토에 묻습니다. 그 무덤이 지금 교토시 국립교토박물관과 풍신수길 신사 옆에 있지요. 하지만, 영수증엔 분명히 코를 받았다고 쓰여 있는데 지금 일본은 물론 한국도 모두가 “귀무덤”이라고 합니다. “코무덤은 너무 야만스럽다.”라며 “귀무덤”으로 왜곡한 일본에 한국도 모두 그냥 따라갑니다. 평범한 약사 신분에도 일본 곳곳의 자료창고를 뒤져 많은 코영수증과 코감사장을 입수해온 고 조중화 씨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게 생겼지요. 정유재란 때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교토 하늘에 떠돕니다. 참고 :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 조중화, 학민사, 1996
1649. 민족이 아니라 겨레로, 설명은 쉽게 우리가 흔히 쓰는 “민족”이란 말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입니다. 이해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민족”을 토박이말로 바꿔 놓으면 “겨레"입니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우리는 “겨레”라는 말을 자주 쓰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민족”이란 한자말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해버렸습니다. 여기서 “겨레”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봅니다. 사전은 “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민족”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런데 같은 핏줄을 이어받지 못했다면 애초에 “민족”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말대학원장”을 하시는 김수업 선생님은 ”한 곳에 오래도록 살면서 같은 말과 삶으로 이루어진 동아리”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참 쉽죠? 남에게 잘난 체를 하려는 속셈이 아니라면 “민족”이 아니라 “겨레”를 쓰고 설명도 이렇게 쉽게 말해야만 합니다. 참고 : ≪우리말은 서럽다≫ 나라말, 2009
1648. 아까마츠(적송)를 아시나요? 소나무를 두산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솔·솔나무·소오리나무라고도 한다. 한자어로 송(松)·적송(赤松)·송목·송수·청송이라 한다.”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 옛 문헌에 나타나는 소나무의 한자 이름은 송(松), 송목(松木)입니다. 대신 “적송(赤松)”은 우리 한자말이 아니라 일본에서 아까마츠(あかまつ)라고 소리 내는 일본 이름이지요. 경북대 임산공학과 박상진 교수는 ≪산림≫ 2002년 5월호 “일본 광륭사 목조반가사유상의 재질”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은 대한제국 융희 4년(1910) 농상공부대신 조중용이 ‘농상공부 고시 9호’로 공시한 화한한명(和韓漢名)대조표에서 소나무란 이름을 쓰지 말고 적송(赤松)을 쓰라.’라고 한 이후 비판 없이 그대로 쓰고 있다.” 이를 보면 소나무처럼 버젓이 토박이말이 있는데도 마구 일본말을 가져다 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647. 고려청자 장물아비 이등박문을 아십니까? 서울에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군림한 1906년에 서울에 왔던 미야케라는 일본인이 쓴 회고기 “그때의 기억-고려고분 발굴(도굴)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 예술적인 감동으로 고려청자를 모으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대개는 일본으로 보내는 선물감으로 개성 인삼과 함께 사들이는 일이 많았다. 이등박문 통감도 누군가에게 선물할 목적으로 굉장히 수집한 한 사람이었는데, 한때는 그 수가 수천 점이 넘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하지만, 고종임금도 이등박문이 고려청자를 보여주자 이 나라엔 없는 물건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조선사람들은 고려청자를 몰랐습니다. 조선사람들은 조상의 묘에 손을 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기에 일본인의 도굴이 아니면 고려청자가 나돌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등박문이 싹쓸이해간 고려청자도 결국, 도굴된 것이며, 이등박문은 장물아비가 틀림없지요.
1646. 원자를 가르친 교재로 쓴 동몽선습 조선 명종 때 학자 박세무가 쓴 ≪동몽선습(童蒙先習)≫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천자문》을 익히고 난 후의 아이들이 배우는 초급교재로, 앞에선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의 오륜(五倫)을 설명하였지요. 그 뒤를 이어 중국의 삼황오제에서부터 명나라까지의 역사와 조선의 단군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사를 간단하게 썼습니다. 특히 단군, 주몽, 이성계, 왕건, 마의태자 등의 인물들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우리의 역사에도 접근할 수 있게 합니다. 이 책은 완전하게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벗 어 난 것은 아니지만 조선의 역사를 독립적으로 쓴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 또 동몽선습은 어린이 교육을 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교과서라는 점에서 귀중한 가치가 있다고 얘기하지요. 이 책의 중요성을 깨달은 영조 임금은 왕세자를 가르치는 책으로 뽑았고, 친히 서문도 썼습니다. 1541년(중종 36)에 쓴 저자의 친필사본(親筆寫本)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지요.
1645. 낮은 음역의 남도민요와 높은 음역의 서도민요 민요는 크게 남도민요, 경기민요, 서도민요로 나눕니다. 그런데 말소리나 민요 모두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낮은 평야지대에서 높은 산악지대로 갈수록 음역이 높아집니다. 또 남도 소리가 뱃속에서 뽑아 올려 목과 가슴을 울리는 탁한 발성으로 낮은 음역에서의 효과를 보는 반면에 서도 소리는 비성(鼻聲) 곧 콧소리와 두성(頭聲) 곧 머리소리로 내게 됩니다. 이렇게 남도니 서도니 하는 구분에 따라 서로 다른 발성을 쓰다 보니 소리 훈련을 오랫동안 받은 사람일수록 서로 다른 민요를 부르기는 참 어렵습니다. 서도민요 창법은 콧소리로 얕게 탈탈거리며 떨거나, 큰 소리로 길게 뻗다가 갑자기 속소리로 가만히 떠는 방법 등으로 애절한 느낌을 줍니다. 이와는 달리 남도민요는 극적이고 목을 눌러 소리를 내는 창법을 많이 쓰고 있으며 심하게 떠는 소리 곧 요성(搖聲)과 꺾는 음이 특징적이지요.
1644. 일본 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상”은 국보 1호 아니다 “국보(國寶)"는 말하자면 나라의 보물입니다. 2008년 2월 10일 안타깝게도 우리의 국보 1호 숭례문은 연기 속에 사라져 버렸고 지금 복원 중입니다. 그런데 일본 교토 광륭사(広隆寺, 코류지)의 목조미륵보살반가상은 신라 또는 백제인이 만든 것이라 해서 우리도 일본에 가면 만나보려고 애씁니다. 그 목조미륵보살반가상을 광륭사 안내 책자에는 일본 국보 1호라고 써놓았지요. 하지만, 일부 누리꾼은 예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진실을 알아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그냥 “국보”일 뿐 “국보 1호”는 아닙니다. 일본 문화재를 관리하고 있는 “문화청”의 해석을 빌리면 이 불상이 국보 중 조각부분 목록에 처음 올랐다는 의미일 뿐 가장 중요한 국보라는 뜻의 1호라고 표현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한 가지 더 예전에는 1호였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말도 잘못된 것입니다. 일본의 국보는 1897년의 고사사보존법제정(古社寺保存法制定), 1950년의 문화재보호법시행령에 따라 관리돼왔지만 광륭사 미륵상이 국보 1호가 된 적은 없습니다.
1643. 일본 코닌천황과 백제여인 고야신립의 사랑이야기 조선시대 영조 임금은 천한 무수리 출신인 어머니 신분에 한이 맺혀 어머니가 죽은 뒤 소령원을 지어 장사지내고 시간 날 때마다 찾아가 어머니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연과 비슷한 일이 일본에도 있습니다. 일본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헤이안시대(794~1185)의 기초를 다진 50대 간무천황(桓武天皇)을 낳은 백제여인 고야신립(高野新笠) 이야기지요. 간무천황의 아버지는 황족이었지만 일찌감치 왕위계승에는 관심을 끊은 채 술로 지새며 보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만난 여인이 백제여인 고야신립이었는데 이 여인은 신분이 낮다 하여 정실이 되지 못했고, 천황의 딸과 정략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다 그는 후계자 없이 죽은 48대 천황을 이어 무려 62살의 나이로 권좌에 오르는데 바로 코닌천황(光仁天皇)이지요. 하지만, 곧 정실부인과 그 아들을 유배 보내고 대신 사랑하는 여인 고야신립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습니다. 이후 아들은 천황이 되자 어머니를 곧바로 황태부인으로 올렸고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교토 히라노신사(平野神社)에 모시고 극진히 제사를 지냈지요.
1642. 우리나라 고유 들꽃 단양쑥부쟁이 자취를 감춘다 “이름 알면 보이고 이름 부르다 보면 사랑하느니 / 사랑하는 눈길 감추지 않고 바라보면 / 꽃잎 낱낱이 셀 수 있을 것처럼 뜨겁게 선명해진다. / 어디에 꼭꼭 숨어 피어 있어도 너를 찾아가지 못하랴 / 사랑하면 보인다. / 숨어 있어도 보인다.” 정일근 시인은 이렇게 “쑥부쟁이사랑”을 노래합니다. 쑥부쟁이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인데 한국·일본·중국·시베리아에 분포하고 습기가 약간 있는 산과 들에 자랍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단양쑥부쟁이”는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식물로, 쑥부쟁이 종류 중에 가장 드물게 발견되며, 우리나라에만 있지요. 과거에는 단양에서 충주에 이르는 남한강변 자갈밭에 널리 자라고 있었지만 1980년 충주댐 건설 때문에 물에 잠겨 사라지고, 현재는 여주 바위늪구비에서만 유일하게 자랍니다. 따라서 바위늪구비가 4대강 정비에 의해 물에 잠기면, 단양쑥부쟁이는 이 지구 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고 하네요. 참고 : "멸종위기종 `단양쑥부쟁이`의 마지막 외침", 유기훈(환경연합 시민기자)
1641. 편지를 꽂아두는 고비,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가구 옛 조선 사대부들이 쓰던 가구 가운데는 “고비”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비는 방이나 마루 벽에 걸어 놓고 편지나 종이 말이 같은 것을 꽂아두는 살림살이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물건으로 온돌문화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지요. 오동나무 같은 가벼운 나무에 매화·대나무 등을 조각합니다. 또 대나무살로 엮어 쾌적하고 시원한 느낌을 주는 죽고비도 문인 사대부들이 즐겨 썼다고 하는데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다지요. 기름종이를 여러 겹 겹쳐서 고비 형태로 만든 것은 “빗접고비”라고 합니다. 고비는 선비의 서재에 걸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규모가 작고 화려하게 치장한 여성용 고비도 있습니다. 또 고비는 '考備' 또는 '高飛'로 쓰기도 합니다만 고비는 토박이말이며, 한자는 소리만 따다 쓴 취음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사군자문고비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죽제고비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