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안성 봉업사터(경기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148-5) 찾아가기 전에 죽산향교 들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름에 반쯤 가려진 비봉산 자락이 유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좋은 가람 하나쯤은 있을 만한 곳이란 생각이 든다. 폐사지 근처엔 송문주 장군 동상과 라이온스 클럽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있어 묘한 부조화를 이룬다. 봉업사는 양주 회암사, 여주 고달사와 더불어 고려시대 경기도 3대 절로 꼽히는 거대 사찰이었다고 한다. 초겨울의 폐사지는 황량하다. 공터에 서 있는 껑충한 당간지주가 더욱 을씨년스럽다. 두 개의 당간지주 사이로 오층석탑이 보인다. 그래도 이 두 유적이 남아 있어 상호 소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오층석탑은 경기도의 대표적인 고려 전기 석탑이다. 탑은 높이가 6m로 여러 장의 크고 넓적한 돌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단층기단을 두고 5층의 탑신을 올렸다. 전체적으로 우뚝하고 늠름한 모습이 인상적인데 상륜부가 없어진 것이 아쉽다. 하지만 이만하기도 다행이란 생각으로 마음 다독이며 그곳을 떠나왔다. (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에서는 쇠를 주조(鑄造)하여 기구를 만들어 이름을 측우기(測雨器)라 하니, 길이가 1척(尺) 5촌(寸)이고 직경(直徑)이 7촌입니다.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서운관(書雲觀)에 대(臺)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 위에 두고 매번 비가 온 뒤에는 서운관의 관원이 직접 주척(周尺)으로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오고 갠 때와 물 깊이의 척·촌·분(尺寸分)의 수치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즉시 기록해 둘 것이며,” 이는 《세종실록》 세종 24년(1442년) 5월 8일 자 기록입니다. 578년 전인 1442년(세종 24년) 조선에서 강수량 측정을 위해 세계 처음 측우기와 측우대를 만들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영국의 건축가이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토퍼 렌에 의해 1662년 처음 서양식 우량계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우리나라보다 220년이 늦은 시기입니다. 지난 2월 20일 문화재청은 근대 이전의 강수량 측정 기구로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금영 측우기‘를 국보 제329호로,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를 국보 제330호로,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를 국보 제331호로 지정하였습니다. “영조 6년 여름에 경기도가 크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심동섭)은 2020년 기획특별전 <노랫말-선율에 삶을 싣다>를 2020년 5월 15일부터 2020년 10월 18일까지 연다. 전시는 선율을 타고 우리 삶을 실어 나른 대중가요 노랫말의 발자취와 노랫말에 담긴 우리말글의 묘미를 소개한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 19’라는 전 세계적 위기 상황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노랫말로 잠시나마 지친 몸과 마음을 쉬어갈 수 있는 전시가 되기를 바란다. 대중가요 ‘노랫말’을 조명한 최초의 전시 그간 대중가요를 주제로 한 다양한 전시가 열렸지만, 대중가요 앨범이나 가수가 아닌 대중가요의 ‘노랫말’을 본격적으로 다룬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나라 첫 창작 대중가요로 알려진 1929년의 <낙화유수>부터 진정성 있는 노랫말로 전 세계의 사랑을 받는 방탄소년단(BTS)의 <IDOL>까지 모두 190여 곡의 대중가요 노랫말과 더불어, 각종 대중가요 음반ㆍ가사지ㆍ노랫말 책ㆍ축음기 등 모두 206건 222점의 전시 자료를 소개한다. 전시장은 1부 ‘노랫말의 힘’, 2부 ‘노랫말의 맛’으로 구성되었다. 1부 ‘노랫말의 힘’에서는 1920년대 말부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호른은 트럼펫, 트롬본, 튜바와 함께 오늘날 서양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금관악기다. 호른은 금관악기 가운데 가장 먼저 오케스트라에 도입되었는데 프랑스에서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 전해졌기 때문에 흔히 프렌치 호른(French horn)이라고도 불린다. 다른 금관악기에 견주어 음색이 온화하고 부드러워 오케스트라에서 전체 악기의 소리를 모으고 감싸는 역할을 한다. 호른은 관의 길이가 매우 길어 깊은 울림을 지니지만, 깨끗하고 정확하게 연주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악기이기도 하다. 오는 6월 2일 저녁 7시 30분 서울 예술의전당 리사이트홀에서는 ‘이규성 귀국 호른 독주회’가 열린다. 일찍이 국내서 동아음악콩쿠르 등에서 입상하며 이름을 알린 호르니스트 이규성은 독일로 건너가 트로싱엔 국립음대를 졸업하였고 이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수료한 뒤 다시 독일로 돌아와 뷔르츠부르크 국립음대 최고연주자과정 졸업하면서 전문 연주자로서의 실력과 음악관을 탄탄히 준비해왔다. 호르니스트 이규성의 에너지 넘치는 풍부한 음색 그리고 음악을 압도하는 뛰어난 연주가 유럽 협연 무대를 통해 유감없이 발휘되며 유럽 무대에서도 그 실력을 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는 간송미술관에서 신윤복의 그림 ‘주유청강(舟遊淸江)’ 곧 맑은 강에서 뱃놀이하는 모습을 본다. 그림 속의 화제(畵題)에는 “젓대소리 늦바람으로 들을 수 없고, 백구만 물결 좇아 날아든다.(一笛晩風聽不得, 白鷗飛下浪花前)”라며 이날의 풍경을 전해준다. 녹음이 우거지고 산들바람이 일어나자 두서너 명의 양반들이 한강에 놀잇배를 띄우고 여가를 즐긴다. 호화스러운 배도 아니다. 꾸미지 않은 일엽편주(一葉片舟) 곧 한 척의 작은 배에 차일(遮日)을 드리우고 풍류를 즐기고 있다. 뱃전에 엎드려 스치는 물살에 손을 담가 보는 여인이나 턱을 고인 채 이 모습을 지켜보는 선비의 자태가 정겹다. 신록이 그늘진 절벽 밑을 감돌아 나가는 뱃전에서는 생황 소리와 젓대 소리가 어우러지고 잔물결은 뱃전을 두드리니 그야말로 선계(仙界)이리라. 하지만, 이런 선계도 그저 삿대질만 하는 뱃사공과 함께 묵묵히 흐르기만 하는 물결이 없으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저 저 한 척의 작은 배와 그 배에서 유유자적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고 있지만, 우리의 이상현 시인은 “꽃이 돋보이려면 흙이 있어야 하고 유람선은 묵묵히 흐르는 물이 늘 생명을 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심동섭)은 2020년 5월 15일 세종대왕 탄신 623돌을 맞이하여, 한글 문화유산의 공유와 확산을 꾀하고자 조선왕실 한글 유물 가운데 한글 궁체의 조형미를 풍부하게 담고 있는 덕온공주의 글씨를 활용하여 디지털 한글 글꼴(폰트) ‘(가칭)한글박물관 덕온체’ 개발을 시작한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옛 문헌 자료의 가치를 새롭게 되살리고 한글 글꼴의 다양성을 늘리고자 주요 소장 자료의 글씨를 복원하여 디지털 글꼴로 개발하는 사업을 진행하며, 국립한글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인 덕온공주 집안 한글 자료 가운데 《자경전기(慈慶殿記)》를 비롯한 덕온공주의 친필 자료가 그 첫 번째 주인공이다.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는 조선의 제23대 왕 순조(純祖, 1790-1834)의 셋째 딸로서 조선의 마지막 공주이며, 어려서부터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여 우아한 한글 궁체 자료를 다수 남겼다. 또한, 덕온공주의 가례 당시의 자료와 공주의 집안이 왕실과 주고받은 편지 등 왕실 여성들의 한글 문자생활과 19세기 국어의 특성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들이 남아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2016년부터 2019년까지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 유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 5월 15일은 세종대왕 탄신 623돌이 되는 날입니다. 이날을 맞아 문화재청은 15일 낮 11시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 영릉(英陵)에서 세종대왕 탄신 623돌을 기리는 숭모제전(崇慕祭典)을 봉행합니다. 이 숭모제전은 세종대왕의 위업을 기리고 그분의 유덕과 백성사랑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국가제향으로 거행하고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세종대왕 탄신 623돌을 기념하는 숭모제전은 다시 말하면 생일잔치입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생일잔치는 해마다 생가가 아닌 무덤에서 치러지고 있습니다. 생일잔치 이후 무덤에 가서 제사를 지낼 수는 있겠지만 세상에 어떤 집안이 조상의 생일잔치를 무덤에서 합니까? 우리는 오랫동안 현재의 대한민국이 있도록 크게 이바지한 세종대왕의 생가 복원이 이뤄지지 않아서 생일잔치가 무덤에서 치러지는 것을 개탄하고 지적하고 해왔습니다. 여행을 해보면 예술인들의 생가를 복원해놓은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럴진대 누구나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일등공신으로 꼽는 세종대왕의 생가복원이 아직껏 삽도 뜨지 않았으니 안타까울 노릇입니다. 관에서는 세종대왕의 사저 위치를 콕 집어 확인할 수 없고 당시의 사저 모습을 짐작도 할 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아아, 우리 중씨(仲氏)께서는, 예사 무리에 뛰어났다. 의표(儀表)가 번쩍이는 듯하고, 내심은 봄날같이 온화하였다. 아름다운 재주가 숙성(夙成)하여서, 소문이 날마다 새로워졌다. 과거에 이름을 걸어, 청운(靑雲)의 길이 피곤하지 않았다. 요직을 두루 거치며, 충성스러운 왕신(王臣)이었다. 도량(度量)은 포용(抱容)함이 있었고, 몸가짐(操守)은 더욱 진중(珍重)하였다. 사사로이 당패를 심음이 없었고, 권요(權要)에 아부하지 않았다. 큰 환란이 나라에 다가오는데, 감히 미리 아뢰지 않을 것이랴.“ 이는 퇴계 이황이 형님 온계(溫溪) 이해(李瀣)의 묘비문에 쓴 글이다. 퇴계는 평소에 가장 가까이에서 본 형님의 성품과 행동에 대해 묘비에 자세히 기록해 놓고 피 끓는 마음으로 형님을 애도한다. 최근 KBS에서 문화전문기자로 이름을 날렸으며, 보도제작국장을 지낸 이동식 작가가 휴먼필드를 통해 《온계 이해평전》을 펴냈다. 이동식 작가는 온계 이해 선생의 15세 후손이기도 하다. 작가는 들어가는 말에서 ”하늘이 명한 것[天命], 인간이 지키고 알아야 할 본성[性]을 자각하고 그것, 그러한 자각으로 인간의 도리[理]를 끝까지 추구하는 것, 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우리의 위대한 임금 세종대왕(1397~1450) 곧 ‘이도(李祹)’가 태어나신 날입니다. 《세종실록》 1권, 총서에 보면 “태조(太祖) 6년 정축 4월 임진에 한양(漢陽)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탄생하였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종을 위대한 성군으로 부르는 까닭은 훈민정음 창제부터 모든 정사를 ‘백성사랑’으로 했기 때문이지요. 세종은 들판을 지나가다가 농부를 보면 말에서 내려 걸어갔음은 물론 일산(햇빛가리개)까지 치우도록 했으며, 벼가 잘되지 않은 곳에선 반드시 말을 멈추어 농부에게 까닭을 묻고 마음이 아파 점심을 들지 않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세종실록》 59권, 1433년 1월 1일의 기록에는 “지금 소리를 들으니 또한 매우 맑고 아름다운 것은 물론 율(律)을 만들어 음(音)을 비교한 것은 뜻하지 아니한 데서 나왔기에, 매우 기뻐하노라. 다만 이칙 1매(枚)가 그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새해 첫날 회례음악을 연주했는데 세종이 동양음악 십이율(十二律) 가운데 아홉째 음인 이칙(夷則) 하나가 다른 소리가 난다고 지적하여 음악 전문가인 박연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렇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가면 국가민속문화재 제111호 <김덕령장군 의복(金德齡將軍 衣服)>이 있습니다. 이는 1965년 광산김씨의 무덤들이 모여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에서 김덕령 장군의 무덤을 이장할 때 출토된 400년 전의 옷들이지요. 김덕령(1567∼1596)은 임진왜란 때 담양에서 이름을 떨친 의병장으로 비록 체구는 작지만 민첩하고 능력이 탁월해 왜병장들은 그의 얼굴만 보고도 무서워 도망갔다고 합니다. 출토된 옷에는 조선시대 문무관이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거나, 임금을 호위할 때, 또는 국난을 당했을 때 입었던 철릭 여름용과 겨울용 2점, 두루마기와 같은 모습이지만 옷깃이 직선으로 곧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직령포 봄가을용과 겨울용 4점, 그리고 저고리 1점과 바지 1점입니다. 철릭은 임진왜란 당시 장군이 입었던 것으로 위급할 때에 양팔을 모두 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여름옷은 흰모시로 만들었고 겨울용은 두터운 솜을 넣고 누빈 것으로 길이도 여름용보다 더 길게 하여 방한용으로 입었지요. 직령포는 흰 무명을 곱게 누빈 봄가을용과 솜을 두텁게 두고 누빈 겨울용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명주직령포는 삭아서 솜만 남았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