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충북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에 가면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국보 제5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報恩 法住寺 雙獅子 石燈)”이 있습니다. 이 석등은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널따란 8각의 바닥돌 위에 두 마리 사자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특히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예스러운 멋을 풍기며,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데,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지요.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기와의 살짝 들린 처마와 버선코 그리고 저고리 섶코를 닮아 참 아름답고 안정되어 보입니다. 또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치지요. 석등을 세운 때는 8세기 전반이라고 짐작되며, 두 마리의 사자가 그동안 보여 왔던 8각 기둥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보다 약간 후대인 8세기 중반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국보 제35호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가을들꽃 가운데는 소담스럽고 아름다운 녀석 “사위질빵”도 있지요. 그런데 이 사위질빵이란 이름의 유래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습니다. 사위질빵은 강원도 사투리라고도 하는데, 북한에서는 모란풀 또는 질빵으아리, 사위질방 따위로 부르고 있지요. 그러나 어떤 이들은 사위질빵을 사위와 질빵(짐 따위를 질 수 있도록 어떤 물건 따위에 연결한 줄)이란 우리말의 합성어로 보기도 하는데, 사위와 질빵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17세기 초에 펴낸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사위질빵이 아니라 “술위나물”, 19세기 초에 나온 《물명고(物名考)》에서는 술의나물로 나옵니다. “술위”는 술의 > 수뤼 > 수레로 바뀐 것이지요. 이를 보면 “사위질빵”은 원래 “수레나물”이며, 따라서 원래의 이름 식물도감에도 그렇게 담겨야 한다고 계명대학교 김종원 교수는 《한국식물생태보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위질빵은 온 나라 곳곳의 산과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특히 산의 양지쪽에 자란 덤불 속에 많이 보입니다. 7∼9월에 지름 1.5~2.5cm의 흰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난 뒤에는 털이 달린 5~10개의 열매가 한데 뭉쳐 달리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더할 수 없이 검약하여 의대(衣)는 화려한 무늬 놓은 비단을 취하지 않았으므로 곤룡포(袞龍袍) 이외에는 목면(木綿)과 명주ㆍ모시뿐이었다. 근간에 무늬 놓은 비단을 자주 볼 수 있기에 몇 해 전에 무늬 있는 옥색 비단으로 배자(背子)와 허리띠 하나를 지어서 올렸더니,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고서는 한 번 입고 다시는 더 입지 않으셨다. 잠잘 때는 허름한 잠옷과 목침(木枕) 하나로 오늘날까지 지냈고, 기완(器玩, 감상하며 즐기기 위하여 모아 두는 기구나 골동품)과 습물(什物, 세간ㆍ기구)을 혹시라도 마음속에 두어본 적이 없으셨다.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함을 숭상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위는 순조실록 1권, 명경왕비(순조 비)가 내린 행록(行錄, 언행을 기록한 글)에 있는 내용입니다. 위를 보면 명경왕비는 검소하여 배자와 허리띠를 지어서 올렸는데 좋아하지 않는다며 한 번 입고 더는 입지 않았다고 하지요. 여기서 나오는 배자(背子)는 저고리 위에 덧입는 덧옷입니다. 소매가 없고, 양옆의 귀가 겨드랑이까지 틔었으며 길이가 짧지요. 흔히 비단 따위 겉감에 토끼ㆍ너구리ㆍ양의 털이나 융으로 안을 대고 선(縇)을 두릅니다. 배자를 입은 모습은 김홍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쇠뿔로 만든 화각(華角) 공예는 빛깔과 무늬에서 장식성이 뛰어나 우리나라의 전통공예, 특히 목공예 가운데에서도 매우 특색이 있는 공예입니다. 또 화각공예는 나전칠기(螺鈿漆器)와 쌍벽을 이루는 고유의 전통 왕실공예일 뿐 아니라, 동양공예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이한 공예지요. 조선시대에는 관제(官制, 국가의 행정 조직과 권한을 정하는 법규)에 화각공예를 하는 장인 곧 화각장(華角匠)이 있었을 정도로 화각제품이 꽤 사랑받고 있었습니다. 투명도가 높은 쇠뿔을 종잇장처럼 얇게 편 다음 백ㆍ적ㆍ황ㆍ녹ㆍ자ㆍ색 따위의 색으로 무늬를 그리고 그것을 나무로 만든 물건 위에 붙이는 것으로 재료가 귀하고 공정이 매우 까다로운 작업입니다. 따라서 생산이 많지 않았으므로 신분이 높은 귀족층의 기호품이나 애장품에 주로 이용되었지요. 화각공예품으로는 장롱, 사방탁자, 문갑과 같은 가구류와 작은 예물함, 경대, 필통, 화약통, 바느질자, 경상(經床), 반짇고리, 부채, 붓대 따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화각공예의 유품으로 가장 오래 된 것은 신라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이는 바느질자(針尺)를 비롯하여, 왕실 보물창고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비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열다섯째로 흰 이슬이 내린다 하는 백로(白露)입니다. 옛 사람들은 이때만 되면 편지 앞머리에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후 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 하옵시고”라는 인사를 꼭 넣었습니다. 그것은 포도가 제철인 때 곧 백로부터 추분까지의 절기에 어른에게 안녕하신지 묻는 것입니다. 포도는 예부터 다산(多産)의 상징으로 생각해서 맨 처음 따는 포도는 사당에 고사를 지낸 다음 그 집 맏며느리가 통째로 먹었습니다. 그러나 처녀가 포도를 먹으면 망측하다고 호통을 들었지요. 또 이때쯤 되면 ‘포도지정(葡萄之精)’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포도를 먹일 때 한 알 한 알 입에 넣고 씨와 껍질을 발라낸 뒤 아이의 입에 넣어주던 정을 일컫습니다. 누구나 어렸을 땐 어머니의 지극 정성한 공으로 자라건만 다 자라면 저 홀로 자란 듯 부모의 은공을 잊고 때론 부모를 죽이기까지 하는 세상이어서 참으로 씁쓸합니다. 백로 때는 밤 기온이 내려가고,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해집니다. 원래 이때는 맑은 날이 계속되고, 기온도 적당해서 오곡백과가 여무는데 더없이 좋은 때입니다.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내리쬐는 하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영가사오리(英哥沙吾里)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백두산이 있는데, 산이 3층으로 되어 있다. 정수리에 큰 못이 있으니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송화강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 흑룡강이 된다. 그 산에 사는 새와 짐승은 모두 흰빛이며, 산허리 이상은 모두 속돌(화산의 용암이 갑자기 식어서 생긴, 속에 기포가 많은 가벼운 돌)로 되어 있다.” 이는 《세종실록지리지》 「길주목」 ‘경원도호부’조에 기록된 백두산에 대한 내용입니다. 산 하나가 한반도 북부를 기름지게 하고, 만주를 살찌게 하니 참으로 엄청난 산입니다. 백두산은 지금부터 약 100만 년 전에 화산 작용으로 땅속 깊은 곳에서 용암이 솟아나와 이루어진 화산이라고 하지요. 봉우리에 있는 천지는 넓이 9165제곱킬로미터, 둘레 1만 4399킬로미터, 평균 수심 213.3미터, 최대 수심 384.05미터, 물의 부피 19억 5500만 세제곱미터나 된다고 합니다. 천지 물속에 하등식물은 조금 있으나 물고기는 없었는데 김일성의 지시로 송어를 양식한다고 하지요. 중국 연변의 류원무 작가가 쓴 《연변취담》에 보면 “백두산은 봄, 가을, 겨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정철(鄭澈)ㆍ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가인(三大歌人)이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의 지은이로 유명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를 모르는 한국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고산은 병자호란 때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제주도로 가다가,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감동하여 이곳에 13년 동안 머물게 됩니다. 그는 여기서 마음을 닦으며 글을 썼는데 이곳은 지금 명승 제34호 “보길도 윤선도 원림 (甫吉島 尹善道 園林)”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보길도는 섬 안의 바위와 산봉우리에 고산이 붙인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로 고산의 보길도 사랑이 뚝뚝 묻어나는 곳입니다. 그는 보길도에 들어가 물이 흐르는 계곡이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짓고, 낙서재(樂書齋)를 지어 살았습니다. 또 낙서재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세워 곡수당(曲水堂)이라 하고, 계곡의 동북쪽에는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 곳'이란 뜻의 ‘세연정(洗然亭)’을 지어 책을 읽고 자연을 벗 삼아 지냈지요. 아마도 이렇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모레는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 한가위가 곧 다가옵니다. 그래서 백화점과 대형마트에는 명절 특수를 보려고 안달입니다. 신세계백화점 앞에는 전봇대마다 “추석”이라고 쓴 깃발이 나부낍니다. 그런가 하면 롯데백화점 건물 외벽엔 역시 “추석”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그런데 왜 꼭 “추석”이란 말을 쓰는지 아쉬웠습니다. 요즘 기업이나 사람들은 한가위와 추석을 섞어서 씁니다. 과연 이 주 가지 말이 다 써도 좋은 말인지 알아봅니다. 먼저 중국에서는 가을을 셋으로 나눠 음력 7월을 맹추(孟秋), 8월을 중추(仲秋), 9월을 계추(季秋)라고 불렀는데 그에 따라 8월 보름을 중추라 한 것입니다. 또 추석이라는 말은 5세기 송나라 학자 배인의 ≪사기집해(史記集解)≫의 “추석월(秋夕月)”이란 말에서 유래합니다. 여기서 “추석월”의 뜻은 천자가 가을 저녁에 달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뜻이었으나 우리의 명절과 잘 맞지 않는 말이고, 더구나 중국 사람들조차 이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고 하지요. 그에 견주면 “한가위”는 뜻과 유래가 분명한 우리 토박이말입니다. “한가위”는 ‘크다’는 뜻의 '한'과 '가운데'라는 뜻의 '가위'라는 말이 합쳐진 것으로 8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안산시(시장 제종길)는 오는 9월 10일 최용신기념관과 본오3동 샘골로 일대에서 '제4회 상록수문화제'를 연다. 상록수문화제는 1930년대 최용신 선생이 샘골 마을 사람들과 함께하던 '한가위놀이'에서 시작됐으며 우리의 전통축제처럼 지역민에 의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고 해마다 새로운 가치를 지닌 특별한 잔치로 거듭났다. 올해 '상록수문화제'는 지난 7월 안산시민들이 상록수문화제 오픈 테이블을 통해 상상을 모은 결과를 축제로 기획돼서 마련됐다. 거리퍼레이드를 중심으로 공연, 전시, 교육 체험, 놀이 프로그램 등이 풍성하게 준비됐으며 최용신기념관, 샘골교회, 본오3동 주민센터 등 축제의 공간은 샘골로와 용신로라는 길로 서로 연결됐다. 일상에서 놀이공간으로 바뀐 차 없는 거리에서 '샘골마을 놀이터'와 '샘골마을 공연장', '샘골마을 전시장'이 차려진다. 샘골마을 놀이터에는 협동작업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주민의 건축'과 도로를 캔버스로 바꾸는 '마당캔버스'를 체험할 수 있다. 축제의 중심축인 샘골로에서 진행되는 '최용신교육체험박람회'는 최용신의 교육과 나눔 정신이 재미있게 담기며 박람회는 최용신의 정신을 현재에 실천하고 있는 안산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해외문화홍보원(원장 김갑수)은 8월 31일(수) 외교부(장관 윤병세)와 함께 한국방송(KBS)월드를 통해 '2016 글로벌 콘텐츠 공모전(6.1~7.26)'을 열고, 세 차례의 심사를 거쳐 분야별 우수작을 최종 선정해 발표했다. '코리아 인 유어 아이스(KOREA In Your Eyes)'라는 주제로 동영상, 사진, 웹툰, 엽서, 캘리그래피, 특별주제 한복 등 6개 분야에 걸쳐 진행된 이번 공모전에는 151개국에서 출품한 총 2만4천29건의 한국을 소재로 한 다채로운 작품이 접수됐다. 특히 올해 공모전은 전년도 1만5천911건에 비해 8천118건이 증가해 큰 폭의 성장세(약 51%)를 기록했으며, 참여국 역시 전년도 143개국보다 8개국이 늘었다. 올해 참여작들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 한류의 중심이었던 케이팝과 케이·드라마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한국적 소재를 다룬 것이다. 특별주제인 한복 분야에서는 자국의 문양과 특성을 살린 한복을 직접 제작한 작품이 다수 출품됐고, 서양의 바비인형에 한복을 만들어 입히는 과정을 영상으로 만든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이를 통해 대중문화에서 시작된 한류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우리 전통문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