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일찍이 어른들의 말을 들으니, 옛날에는 여자 옷을 넉넉하게 만들어서 시집올 때 입었던 옷을 죽어서 염할 때에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중간 줄임)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서 새옷을 시험삼아 입어 보았더니, 소매에 팔을 넣기가 몹시 어려웠고 한 번 팔을 구부리니 솔기가 터졌다. 심지어 간신히 입고 나서 조금 있으면 팔에 피가 통하지 않아 부어올라서 벗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소매 솔기를 뜯고 벗기까지 하니 어찌 그리도 요망스런가?” 위는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청장관전서》 부의(婦儀)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입어온 한복 저고리는 시대에 따라 형태가 달라졌는데, 특히 저고리의 길이가 크게 변하였지요. 조선 초기인 1580년 무렵 청주 한씨 덧저고리의 길이는 무려 81cm나 되었고 선조 때인 1589년에 그려진 감로탱에 나오는 여인들의 저고리도 무척 길지요. 그렇게 길었던 저고리가 점점 짧아지더니 1780년 무렵에는 27cm, 1890년대는 무려 19.5cm로 짧아지다가 급기야 1900년대는 14.5cm까지 짧아져 젖가슴이 보일 정도로 섹시한 저고리가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짧은 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제 7월 5일 저녁 7시 30분 새로 문을 여는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사)서울전통문화예술진흥원 주최, 송서율창보존회 주관의 “송서율창보존회 2016 정기공연”이 열렸다. “몸이 약해질 때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은 목소리가 약해지고 가라앉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감정이 목멘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사람의 소리에는 사람의 혼이 스며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몸에서 나오는 소리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소중함을 느끼는 시대가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과학 문명에 의존하지 않았을 때는 글 읽는 소리가 사람의 영혼을 흔들어 놓았다. 정인지의 글 읽는 소리에 이웃처녀가 매혹된 이 얘기는 자주 인용되는 사례이기도 하다.” 지난해 12월 열린 《송서 율창의 확산방안》의 학술대회에서 기조 강연자로 초빙된 원로 음악평론가 이상만 선생의 말이다. 이상만 선생이 말한 “글을 읽는 소리“란 바로 ”송서”를 말한다. ‘선비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의 하나”라고 한다. 그 소리를 예술화한 송서율창(誦書律唱)을 “송서율창보존회 2016 정기공연” 정기공연은 새롭게 각인시켜 주었다. 공연에 앞서 이날의 사회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한째에 해당하는 소서(小暑)입니다. 소서는 ‘작은 더위’라 불리며, 이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지요. 그리고 하지 무렵에 모내기를 끝낸 모들은 이때쯤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기 때문에 논매기도 시작합니다. 또 소서 때 논둑과 밭두렁의 풀을 베어 퇴비를 장만하기도 하고, 가을보리를 베어낸 자리에 콩이나 조, 팥을 심어 이모작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소서 즈음은 여름 장마철이어서 장마전선이 한반도 중부지방을 가로질러 장기간 머무르기 때문에 습도가 높고 비가 많이 내립니다. 그래서 비가 많이 내리면 날이 개기를 바라는 뜻으로 기청제(祈晴祭)를 지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시대에도 큰비를 뜻하는 “대우(大雨)”라는 낱말이 무려 960건이나 검색이 되며, “기청제(祈晴祭)”도 225건이나 보입니다. 기청제를 하는 동안에는 성안으로 통하는 물길을 막고, 성안의 모든 샘물을 덮으며, 물을 쓰면 안 되는 것은 물론 오줌을 누지도 않았습니다. 또 기청제 전날 밤에는 비를 섭섭하게 하는 일체의 행위는 금지되는데 심지어 부부가 각방을 써야 했지요. 또 이날 음(陰)인 부녀자의 시장 나들이는 일절 못하게 하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칠장(漆匠)은 7명이니 2명을 더하고, 시통장(矢筒匠)은 1명이니 8명을 더하고, 궁현장(弓絃匠)은 2명이니 2명을 더하고, 아교장(阿膠匠)은 2명이니 2명을 더하고.” 《세종실록》 16년 (1434) 6월 11일 기사에는 공장(工匠)들을 격려하고, 사람 수를 늘려야 한다는 상소가 있었는데 임금은 이를 모두 윤허한다는 명을 내립니다. 그런데 칠장은 7명에서 2명을 늘리지만 화살을 만드는 궁현장과 아교장은 각각 100%나 사람을 늘려달라고 하는군요. 칠장(漆匠)은 옻나무에서 거둔 수액을 용도에 맞게 정제하여 그릇 따위에 칠하는 장인을 말하며, 칠기 그릇을 비롯하여, 칠기장, 칠기함, 칠기 탁자, 칠기궤, 칠기관 따위를 만드느라 궁궐에서의 하루는 무척 바빴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칠공예품 칠은 완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며 과정이 매우 복잡하다고 하지요. 또 칠장은 직접 칠을 정제하여 쓰는데 옻액의 불순물을 없애기 위해 생칠을 2∼3 시간 동안 고무레로 섞는 고무레질과 옻칠의 수분 함유율을 줄여 붓자국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교반 작업도 어렵고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칠은 생칠을 바르고 갈고 바르는 과정을 숱
[우리문화신문=중국 연길 김영조 기자] 어언 18년 한국전통음악학회(회장 서한범)가 중국 연변을 찾아온 지 벌써 18해를 맞았다. 이날 공연이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연변대학 예술학원 교수들로 꾸려진 교학실천 예술단 민족악단의 첫 번째 민족음악 공연이 열렸다는 점이다. 18년 동안 꾸준히 교류해온 그 열매가 튼실하게 맺어진 결과하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7월 1일 늦은 1시 리홍관의 사회로 리동식이 지휘한 관현악단 연주와 반주는 기악합주 “백두의 넋”으로 시작하여, 남도민요, 대피리 독주, 해금이중주, 경기민요, 목관4중주, 서도민요, 옥류금 독주, 신민요의 화려함을 이끌어 냈다. 특히 한국 단국대학교에서 공부했던 리홍관은 서도민요를 열창하여 큰 손뼉을 받았다, 연변대학 민족악단의 연주가 끝나고 한국전통음악학회 서한범 회장은 준비해온 가야금 등 악기들과 금일봉을 연변예술학원 리훈 학장에게 전달하여 감동스러운 장면이 이어졌다. 그리고는 한국 연주단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맨 먼저 박문규 명인이 가곡 “편락”을 불렀고, 이기옥ㆍ김은숙의 송서ㆍ율창 “등왕각서”, 추점순 외 3인의 경기민요 양산도ㆍ뱃노래, 고향임 명창과 그의 제자 김갑보ㆍ김창연의 판소리 춘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새벽에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人馬)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상과 동궁은 말을 타고 중전 등은 뚜껑 있는 교자를 탔었는데 홍제원(洪濟院)에 이르러 비가 심해지자 숙의(淑儀)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宮人)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점심을 벽제관(碧蹄館)에서 먹는데 임금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은 반찬도 없었다.” 이는 《선조실록》 25년(1592년) 4월 30일 기록으로 선조 일행이 임진왜란을 당해 피난길에 오른 내용입니다. 선조 일행은 궁궐을 나와 벽제관에서 점심을 먹은 모양입니다만 원래 벽제관은 우리나라에 오는 중국 사신의 공용 숙박시설로 쓰기 위해 성종 7년(1476) 11월에 세운 것입니다. 중국 사신들은 여기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예를 갖추어 서울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지요. 벽제관은 중국으로 가는 큰 길에 설치된 첫 관문으로 임금이 중국 사신을 친히 배웅하고 맞이하던 모화관에 버금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곳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우리문화신문=중국 연길 김영조 기자] “제18회 한국전통음악교류회” 일정 이틀째다. 오전에 우선 연변대학교에 가서 하루 뒤 올릴 공연 리허설을 진행했다. 간단하게 하는 리허설이었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서한범 단장은 이번 공연의 의의와 가져야할 마음자세에 대해 나긋나긋 얘기했다. 리허설이 끝나고 용정으로 이동한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어릴 적 살았던 곳이다. 먼저 한적한 도시 용정에 들어서자 그 유명한 평양식 냉면을 먹으러 냉면집에 들어갔다. 특식이라는 냉면과 중국식 탕수육 그리고 토마토는 우리 입맛을 돋운다. 몇 사람을 빼고는 그 큰 냉면그릇을 싹싹 비운다. 중국에 와서 생각지도 않게 맛있는 냉면을 먹게 될 줄이야. 식사 뒤 곧바로 윤동주가 공부했던 대성중학교로 이동했다. 아담한 대성중학교에 들어서자 보이는 윤동주 시비에서 단체사진을 찍는다. 그리곤 이층에 올라가 해설사로부터 민족시인 윤동주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견주어 노래한 민족시인 윤동주. 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아버
[우리문화신문=중국 연길 김영조기자] 김영조 기자가 “제18회 한국전통음악교류회” 단원들과 함께 6월 29일부터 5박 6일 중국을 방문한다. 그 의미 있는 행사를 꼼꼼히 취재하고 생생한 사진과 함께 기사를 송고해올 예정이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한다.(편집자말) 어제 6월 29일은 35명의 식구들과 함께 중국 연길에 도착했다. 한국전통음악학회(회장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와 중국 연변대학예술학원(학장 리훈)이 공동주최하는 2016 제18회 “한국전통음악교류회” 취재차 온 것이다. 아침 5시부터 서두른 탓에 피로감이 몰려왔지만중국행을 함께 할 회원들을 만날 기대에자못 설레기만 했다. 35명의 식구들 가운데는 서한범 교수를 비롯하여, 한국정가학연구원 박문규 원장, 대전시 무형문화재 제22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 고향임 명창,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배뱅이굿 전수조교 박준영 명창 등이 함께 했다. 아침 9시 5분에 출발하는 아시아나 항공편을 이용해 3시간 만에 중국 연길공항에 도착했다. 2년 만에 다시 온 연길공항엔 연변대학예술학원 리훈 학장과 그 식구들이 “한국전통음악학회 여러분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란 펼침막을 들고 반긴다. 호텔에 짐을 풀고 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청주박물관에는 보물 제1629-1호 《신한첩 - 신한첩 건(宸翰帖 - 宸翰帖 乾)》이 있습니다. 이는 효종(孝宗, 1619~1659), 현종(顯宗, 1641~1674), 인조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가 효종의 셋째딸 숙명공주(淑明公主)에게 보낸 한글어찰을 모은 첩이지요. 수록된 어찰은 효종 7통, 현종 2통, 장렬왕후 2통, 인선왕후 54통 등 모두 65통이지만 원래 66통이었습니다. 이 어찰첩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의 《신한첩(宸翰帖)》, 오죽헌시립박물관의 “명안공주관련유물”(明安公主關聯遺物, 보물 제1220호)로서 현종,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 숙종의 한글어찰을 수록한 《어필첩(御筆帖)》과 함께 조선왕실의 한글어찰을 살필 수 있는 귀한 자료입니다. 특기할 것은 현종의 편지에는 인주색(印朱色)이 생생한 어보(御寶) 세 개가 찍혀 있습니다. 또 이 어찰첩은 한글서체 변천과정에서 고체(古體)에서 궁체(宮體)로 가는 과도기라고 할 수 있는 17세기 대표적인 필적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 관련분야 연구 자료의 기준이 되는 것으로 평가된다고 합니다. 그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는 경향신문을 즐겨 봅니다. 비교적 균형 잡힌 보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신문은 실망스러운 보습을 보였습니다. “허물만 남은 의인, 죽을 만큼 힘들 그후”라며 그를 또 다른 표현으로 커다랗게 “生, 死”라 썼습니다. 꼭 그렇게 한자를 써야 멋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터넷 언론 가운데 가장 크고 진보적이라는 오마이뉴스는 “중증장애인 최저임금 제외? 핵노답!"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핵노답“이 도대체 뭔가요? 아마도 질문에 대한 답이 전혀 없다는 젊은이들의 신조어인 모양인데 아무리 편집 과정에서 제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해서 그렇게 선정적이고, 젊은이들의 눈높이 맞추려 우리말을 더럽히는 것을 보니 참 안타깝습니다.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는데 언론의 현주소가 이러니 참으로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