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70년대는 주로 불우청소년들이 생활하는 시설을 방문하여 봉사를 해왔고 80년대 초부터는 YMCA 청소년 야학을 열어 중학교 교육도 받지 못한 성인들과 청소년들에게 중 고등학교 과정을 운영해 왔으며 그 이후에 컴퓨터 전산교육도 해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2000년도 이후에는 함께 몽골근로자들의 자녀를 수용하여 가르치는 몽골 외국인학교를 후원해 오고 있으며 YMCA가 주도적으로 펼치고 있는 쉼터의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제와이즈멘스 서울지구 성암클럽 제 41대 서한범 회장의 환영사 가운데 일부이다. ▲ 인사말을 하는 국제와이즈멘스 서울지구 성암클럽 서한범 회장 ▲ 와이즈맨 목적과 강령을 읽는 신영희 매넷위원장(왼쪽), 인사말을 하는 백우현 초대회장(가운데), 일본 나고야 가와베 회장 ▲ 점화식 어제 16일 저녁 6시부터 서울 YMCA 2층 대강당에서는 제40주년 서울성암 와이즈멘 클럽 촤타 기념식이 열렸다. 미국과 일본 나고야회원 9명을 포함한 서울 성암클럽 회원등 100명이 모여 제 4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식을 가졌다. 회장의 환영사에 이어 박형순 목사는 봉사를 통해 한민족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점점 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과 지방의 한량들과 동리 사람들이 모여 편을 갈라서 활쏘기 대회를 열어 승부를 겨룬다. 그런 뒤에 술을 마시고 흥겹게 논다. 가을철에도 또한 그러하다. 이는 《동국세시기》에 나오는 것으로 활쏘기 겨루기 이야기입니다. 활을 쏠 때 편을 갈라서 경쟁을 하는데, 편사는 양편이 각기 일정한 수의 선수를 뽑아 선수마다 세 순(巡:한 번에 다섯 대의 살을 쏘는 것)에서 다섯 순씩 쏘아 맞힌 화살의 총수를 합해서 승부를 결정짓는 경기입니다. ▲ 서울시무형문화재 제7호 장안편사놀이 (장안편사놀이보존회 제공) 편사의 종류로는 사정 간 경기인 사정편사(射亭便射), 구역간 경기인 골편사(洞便射), 지역간 연합으로 편을 편성해서 하는 경기인 장안편사(長安便射) 따위가 있으며 사정을 구분치 않고 무과에 급제한 사람끼리 하는 한출편사(閑出便射), 당상관 출신 한량이 연합하여 겨루는 삼동편사(三同便射), 한양을 반으로 나눠 편을 짓는 남북촌편사(南北村便射) 그리고 사계편사(射便射), 아동편사(兒童便射) 따위도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장안편사는 1894년 갑오개혁 당시 구습 타파로 맥이 끊어졌다가 1899년 황학정이 다시 세워지면서 부활 되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직지'(1377년)보다 70여년 늦은 독일 구텐베르크(1398~1468) '42행 성서 (1455년)의 금속활자 주조법은 금속주형이 아니라 한국과 중국 등 극동아시아의 설형문자적 주물사 주조 방식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이 말은 10월 13일 청주고인쇄박물관 세미나실에서 열린 '흥덕사지 발굴 30주년 기념 직지 국제콘퍼런스'에서 프랑스 학자 올리비에 드로뇽 교수의 주장입니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드로뇽 교수 외에 많은 국내외 학자들이 한국의 세계 최초 금속활자가 서양의 인쇄술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주제를 발표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세계문화유산 《직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는 불조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 직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 책의 원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입니다. 이는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에 펴냈으며, 독일의 금속활자본 《구텐베르크 42행 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서 펴낸 것으로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지요.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주조기법으로 제작되는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는 아기가 태어나면 배내옷을 입힙니다. 배내옷은 갓난아기의 살갗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부드러운 얇은 무명을 쓰고 크기를 넉넉하게 해 입고 벗기기에 편함은 물론 혈액순환이나 움직이는데 쉽게 합니다. 그러나 제주도 사람들은 갓난아기에게 봇뒤창옷을 입힙니다. 봇뒤창옷은 삼베로 짓는데 살갗을 튼튼하게 하고 인내심을 기르려고 한 것입니다. 이 봇뒤창옷은 봇태창옷·봇뒤창옷·봇뒤적삼·베옷·베창옷·삼칠일옷 같은 다름 이름으로도 불렀습니다. ▲ 어머니 사랑이 담긴 배냇저고리(위), 제주도 봇뒤창옷 그런데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아기씨가 태어나면 어떤 옷을 입혔을까요? 물론 목욕을 시킨 뒤 옷을 처음 입혔는데 이때 옷과 포대기는 새옷감을 쓰지 않고 고위 관리 가운데 무병장수한 사람의 무명옷을 얻어서 지었습니다. 이는 장수와 검약의 의미가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여러 번 빤 무명의 감촉이 부드럽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음의 《고종실록》 11년(1874) 2월 10일 치 기록을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포대기 같은 것은 명주를 쓰지 말고 이미 빤 무명을 쓰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이것은 비단 검소하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지나치게 덥게 하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진주(晋州) 지방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 교방 계통의 무용극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閑良舞)를 보셨나요? “한량”이란 양반 출신으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 또는 노상 놀고먹는 사람을 이르는데 한량무는 한량과 승려가 한 여인을 유혹하는 내용을 춤으로 표현한 무언무용극(無言舞踊劇, 노래나 대사가 없이 춤으로만 표현하는 연극)입니다. 원래 이 춤은 조선 중기 이후 남사당패(南寺黨牌) 가운데 무동들에 의해 놀았던 것인데 그 뒤 조선말까지 계속해서 연행되었으나 남사당패가 흩어지면서 1910년 이후 이 춤은 어른의 무용으로 기방에서 주로 추게 됩니다. ▲ "한량무"의 한 장면 (문화재청 제공) 각 지역마다 이 한량무와 비슷한 춤들을 추었으나 이제는 거의 없어지고 진주에서만 1979년도에 재연되어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고종(高宗) 때 정현석(鄭顯奭)의 《교방가요(敎方歌謠)》, 《진주의암별제지(晋州義岩別祭志)》 따위에 보면 진주는 예부터 진주 감영 교방에서 많이 추었다는 기록이 있지요. 이 춤은 부패한 양반과 파계승을 풍자한 무용극으로 한량을 비롯해서 승려·상좌(上座)·별감(別監)·색시(또는 기생)·주모·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초 땅에 대한 세금은 고려시대부터 시행해오던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으로 땅을 3등급으로 나누고, 걷어 들일 양을 미리 정한 다음 관리가 수확량을 확인해서 결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관리와 지방 유지들이 결탁하는 비리가 끊이지 않았지요. 이에 세종은 농민에게 일정한 땅을 나눠주고 비옥도와 풍흉년에 따라 등급을 나눈 다음 수확량의 10분의 1만 거두는 세금방식인 공법(貢法)을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수입이 줄어들 지주들이 한사코 반대한 것은 물론 농민들 또한 낯선 방법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지요. 그래서 세종은 조정 신하는 물론 양반과 농민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세계 최초의 여론조사까지 벌이게 됩니다. 다섯 달 동안의 여론조사에서 찬성이 98,657명, 반대가 74,149명으로 찬성이 많아 공법을 시행하려 했지만 이후로도 반대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1440년 9월에는 경상도에서 백성 천여 명이 등문고(登聞鼓, 신문고의 전신으로 백성이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임금께 알리기 위해 치는 북)를 치며 공법의 중지와 답험손실법의 부활을 요구하는 일까지 벌어졌지요. ▲ 공법 시행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제569돌 한글날이다. 한글날을 맞아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부근에서는 한글 28대 사건, 그 역사를 되살리다. 그림전과 청농 문관효 쓴 훈민정음 큰빛 붓글씨전 등 다양한 행사가 치러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한글날을 맞아 쓴 입맛만 다시고 있다. 그것은 우리 국민 누구나 한글을 세계 으뜸 글자라고 하지만 정작 우리의 일상에서 한글을 짓밟는 일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 길옆 팻말에는 일본말 노견이 버젓이 쓰여 있다. ▲ 어떤 팻말은 한술 더 떠서 노견을 우리말로 한답시고 그대로 한글화하여 길어깨라고 해놓았다. ▲ 시골 버스정류장에 BUS STOP라고 영어로 써놓았다.(왼쪽), 오른쪽처럼 그저 버스라고 써놓아도 될 것을... 우선 길에 가다 보면 길가에 세워진 팻말에 노견이란 말이 버젓이 쓰여 있다. 이 노견은 일본말 로카타(路肩,ろかた)를 그대로 한글화한 것이다. 그에 더하여 이 노견을 우리말로 번역답시고 길어깨라고 적어 놓은 곳이 있다. 갓길이란 우리말을 놔두고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그런가 하면 시골 노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버스 정류장에 BUS 또는 BUS STOP라고 쓴 까닭은 무엇일까? 버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 그래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오늘은 제569돌 한글날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훈민정음 곧 한글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목적이 한자음을 적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러나 위에 적은 세종이 직접 쓴 《훈민정음》 서문에 보면 창제의 첫 목적은 분명 백성 사랑입니다. 백성 모두가 글자를 배워 세상과 소통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것은 절대군주 세종이 자신은 물론 양반들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것이지요. ▲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의 백성사랑이 그 바탕이 되었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오해의 또 한 가지는 훈민정음이 파스파 글자를 모방에서 만들어냈다는 설입니다. 그러나 이는 파스파 글자가 천지인 철학이 담긴 훈민정음과는 전혀 다른 것에서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훈민정음》 해례본에 한자음 적기가 창제의 동기라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569년 전 세종임금이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든 날로 한글창제 이후 우리나라는 우리의 소리인 한글을 새기고 찍어내어 남녀노소가 읽고 쓸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세종은 1446년 한글 창제 원리를 《훈민정음 해례본》에 담았는데 해례본은 펴낼 당시에 목판에 정교하게 글자를 새긴 뒤 한지에 인쇄하여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5세기에 한글 창제와 함께 활자를 찍어낼 우수한 종이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 1,200년 동안이나 썩지 않은 국보 제126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고려지(高麗紙)는 종이에 색깔이 하얗기가 명주와 갖고 질기기가 비단과 같아 여기다 글씨를 쓰면 먹이 진하게 배어 아주 좋다. 이것은 중국에는 없는 것으로 역시 기이한 물품이다.” 이는 《해동역사(海東歷史, 조선후기 실학자 한치윤이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책》에 나오는 이야기로 “한지는 천년을 가고 비단은 오백년을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조선의 종이 기술은 뛰어났습니다. 신라시대에는 중국에 한지를 수출했고 발전된 고려의 기술을 이어 받은 조선은 제지술이 크게 발달하여 1415년에는 이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입곱 째인 한로(寒露)로 찬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때다. 음력으로는 9월의 절기로서 공기가 차츰 선선해짐에 따라 이슬(한로)이 찬 공기를 만나 서리로 변하기 직전이다. 《고려사(高麗史)》 권50의 한로 관련 기록을 보면 “한로는 9월의 절기이다. (중간 줄임) 초후(한로 15일 동안을 5일씩 끊어서 첫째)에 기러기가 모여들고, 중후에 참새가 줄고 조개가 나오며, 말후에 국화꽃이 누렇게 핀다(寒露 九月節 兌九三 鴻鴈來賓 雀入大水化爲蛤 菊有黃華).”라고 했다. ▲ 한로 때 농촌은 오곡백과를 거두기 위해 타작이 한창이다. "김홍도의 <벼타작>" 한로 즈음은 찬이슬이 맺힐 시기여서 날씨가 더 차가워지기 전에 추수를 끝내야 하므로 농촌은 오곡백과를 거두기 위해 타작이 한창이다. 한편 여름철의 꽃보다 아름다운 가을 단풍이 짙어지며, 제비 같은 여름새가 가고 대신 기러기 같은 겨울새가 오는 때다. 한로와 상강(霜降) 무렵에 사람들은 시절음식으로 추어탕(鰍魚湯)을 즐겼다. 《본초강목(本草綱目, 중국 명나라 때 이시진이 쓴 의학서)》에는 미꾸라지가 양기(陽氣)를 돋우는 데 좋다고 하였다. 한방에서는 한로 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