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예전엔 여성이 시집가면 출가외인이라 하여 친정부모를 쉽게 만날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한가위가 지난 뒤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중간 지점을 정하고, 음식을 장만하여 만나서 한나절 동안 회포를 풀었는데 이를 반보기'라는 했습니다. 반보기는 다른 말로 중로상봉(中路相逢)이라고 했는데 한가위가 지난 다음 서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끼리 때와 장소를 미리 정하고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도에서 만났으므로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반만 풀었다는 데서 이렇게 말한 것이지요. ▲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의 애틋한 만남 반보기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또 한마을의 여자들이 이웃 마을 여자들과 경치 좋은 곳에 모여 정을 나누며 하루를 즐기는 일도 있었는데 이때 각 마을의 소녀들도 단장하고 참여하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며느릿감을 고르는 기회로 삼기도 했습니다. 속담에 근친길이 으뜸이고 화전길이 버금이다 하여 가까운 친척을 만나러 가는 것이 먼저이고, 꽃구경은 나중이라고 하였으며, 한가위 앞뒤로 반보기가 아닌 온보기로 하루 동안 친정나들이를 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큰 바람이었습니다. 요즘은 민족대이동이라 하여 국민 대다수가 고향을 찾아 일가친척을 만나고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 흔히 슈퍼문이라 말하는 대보름달(최우성 기자) '추석 달' / 김정기 뉴욕에서 보는 추석 달 속에 코스모스 무리지어 핀 고향 철길 있네 장독대 뒤에 꽈리 한 타래 가을볕에 익어 있네 가난이 따뜻하고 아름답던 성묫길 소슬바람 송편 향기 마천루 달 속에서 물씬거리네 함지박에 가득 담긴 머루 다래 수수 차좁쌀 쪽머리에 이시고 흰 옥양목 적삼의 어머니 계시네 울음 때문에 바라볼 수 없는 어머니 모습이네 우리 겨레의 3대 명절 하면 설, 단오, 한가위를 꼽는다. 그 가운데서도 ‘한가위’는 가장 큰 명절이다. 1819년(순조 19) 김매순(金邁淳)이 지은 한양(漢陽)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있는 ‘더도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라는 말처럼 한가위는 햇곡식과 과일이 풍성한 절기로 ‘5월 농부, 8월 신선’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이다. 한가위의 유래와 말밑(어원) 한가위는 음력 팔월 보름날(15일)로 추석, 가배절, 중추절, 가위, 가윗날 따위로 부른다. '한가위'라는 말은 "크다"는 뜻의 '한'과 '가운데'라는 뜻의 '가위'라는 말이 합쳐진 것으로 8월 한가운데에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모레는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 한가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한가위가 아니라 추석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런가 하면 중추절, 가위, 가윗날, 가배절, 가붓날이라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말밑(어원)은 무엇이며, 어떤 말을 쓰는 게 바람직할까요? 먼저 중국에서는 가을을 셋으로 나눠 음력 7월을 맹추(孟秋), 8월을 중추(仲秋), 9월을 계추(季秋)라고 불렀는데 그에 따라 8월 보름을 중추라 한 것입니다. 또 추석이라는 말은 5세기 송나라 학자 배인의 ≪사기집해(史記集解)≫의 추석월(秋夕月)이란 말에서 유래합니다. 여기서 추석월의 뜻은 천자가 가을 저녁에 달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뜻이었으나 우리의 명절과 잘 맞지 않는 말이고, 더구나 중국 사람들조차 이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고 하지요. ▲ 말밑(어원)이 불분명한 추석보다는 신라 때부터 쓰던 토박이말 '한가위로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에 견주면 한가위는 뜻과 유래가 분명한 우리 토박이말입니다. 한가위는 크다는 뜻의 '한'과 '가운데'라는 뜻의 '가위'라는 말이 합쳐진 것으로 8월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또 '가위'라는 말은 신라에서 유래한 것인데 다음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6.25 한국전쟁 이후인 50~60년대 우리는 식량이 모자라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학교 갈 때 도시락을 싸가지고 갈 수가 없어서 점심시간에 친구들 몰래 수돗물로 배를 채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겨우 도시락을 싸간다 해도 대부분 도시락은 꽁보리밥에 반찬이라고 해야 김치 하나뿐인 그런 것이었지요. 그런데 당시는 세계적으로 먹거리가 모자라 식량 증산에 큰 관심을 보일 때 였습니다. 그래서 1960년 필리핀에 미국이 주도하여 동남아시아 쌀 연구의 전진기지인 국제미작연구소(IRRI)를 설립합니다. 이 국제미작연구소에서 가장 먼저 보급된 IR8이란 품종은 기적의 벼로 불리며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때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허문회 교수가 이 IR8의 개발에 참여했는데 IR8은 인디카 품종(남방벼)이었으므로 그대로 한국에 도입할 수는 없었습니다. ▲ 통일벼가 온나라에 퍼지면서 쌀 자급자족이 이루어졌다.(농촌진흥청 제공) 허문회 교수는 2년의 연수 기간 동안 한국에서 재배할 수 있는 IR8의 후손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지요. 이 품종은 한국에서 통일이라는 정식 이름을 얻고 1971년부터 농가에 보급되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고 서서히 음의 기운이 커진다는 24절기 열여섯째 추분(秋分)입니다.《철종실록》 10년(1859) 9월 6일 기록에 보면 “추분 뒤에 자정(子正) 3각(三刻)에 파루(罷漏, 통행금지를 해제하기 위하여 종각의 종을 서른 세 번 치던 일)하게 되면, 이르지도 늦지도 않아서 딱 중간에 해당하여 중도(中道)에 맞게 될 것 같다.”라는 내용이 보입니다. 이 기록처럼 우리 겨레는 추분날 종 치는 일조차 중도의 균형감각을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중용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추분 때가 되면 들판의 익어가는 수수와 조, 벼들은 뜨거운 햇볕, 천둥과 큰비의 나날을 견뎌 저마다 겸손의 고개를 숙입니다. 내공을 쌓은 사람이 머리가 무거워져 고개를 숙이는 것과 벼가 수많은 비바람의 세월을 견뎌 머리가 수그러드는 것은 같은 이치가 아닐까요? ▲ 추분엔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에서 겸손을 생각한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태종실록》 11년(1411) 1월 11일 기록에는 “《천문지(天文志)》를 살펴보면, 노인성은 항상 추분(秋分)날 아침에 병방(丙方)에서 나타나, 춘분(春分)날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맷돌은 곡식을 누르고 비비면서 껍질을 까거나 빻는데 쓰는 연장입니다. 위·아래 두짝으로 구성되며, 아래짝 가운데에는 중쇠(숫쇠라고도 함)를, 위짝에는 암쇠를 박아 끼워서 서로 벗어나지 않도록 하지요. ‘ㄱ’자 모양의 맨손(손잡이)은 위짝 구멍에 박으며 칡이나 대나무로 테를 메워 고정시키기도 합니다. 위짝에는 곡식을 집어넣는 구멍이 있고, 아래짝 위에는 곡물이 잘 갈리도록 하기 위하여 판 홈이나 구멍이 있습니다. 맷돌의 크기는 매우 다양한데 적은 것은 지름이 20cm에 지나지 않지만 절에서 쓰던 맷돌은 1m가 넘는 것도 있고 풀매라고 하여 고운 돌로 조그맣게 만든 것도 있지요. 또 강원도 두메에서는 통나무로 만든 나무맷돌을 쓰기도 하고, 제주도에서는 네 사람이 함께 돌리는 큰 맷돌을 쓰기도 합니다. ▲ 종가 운조루에는 남부지방의 맷돌(왼쪽)과 중부지방의 맷돌이 함께 있다. 그런데 모양을 보면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이 다릅니다. 먼저 중부지방 것을 보면 위쪽 맷돌과 아래쪽 맷돌의 크기가 같아 맷돌 아래에 매함지나 매판을 깔고 쓰도록 되어 있지만 남부지방은 아래 맷돌이 더 커서 굳이 아래쪽에 매함지나 매판을 쓸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새 노래 몇 곡을 태연하게 연주하다 창문을 열어젖혀 눈이 마주치고선 뛰어난 재능에 탄복했네 물고기가 솟아오르고 학이 내려앉을 음악을 이제 모조리 전해주노니 예를 쏘아 맞힌 활일랑 내게 겨누려 하지 말거라” ▲ 김성기 명인, 창문 밖에서 스승의 거문고 음악을 엿듣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위 시는 조선후기의 여항시인(閭巷詩人 위항시인이라고도 하는 중인이나 서자 출신 문학인)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이 쓴 《추재기이(秋齋紀異)》에 나오는 한시입니다. 17세기 후반부터 활동한 유명한 가객 김성기에 대한 이야기인데 김성기는 연주에도 뛰어나고 작곡에도 큰 업적을 남긴 거문고 악사였습니다. 이 김성기는 숙종(1674~1720) 때 거문고 대가였던 왕세기(王世基)로부터 거문고를 배웠다고 하지요. 하지만 왕세기는 원래 새 음악을 만들면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고 비밀로 했습니다. 이에 음악에 목말라 했던 김성기는 도둑 공부라도 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밤마다 왕세기의 집으로 가 창문에 귀를 대고 엿들은 다음 이를 모조리 암기하고 자신의 음악으로 만들어버리지요. 그런데 그를 눈치 챈 왕세기가 어느 날 밤 거문고를 타고 있다가 갑자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예로부터 금(金)은 영원히 변치 않는 아름다움과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옷에 금박을 입힌다는 것은 옷을 입는 사람의 기품을 드러내는 것이었지요. 동시에 금박으로 무늬나 글자를 새겨 넣어 입는 이의 소망을 담아내기도 했습니다. 금박장식은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만 쓸 수 있었기에 현전하는 유물이 많지 않지만 순조(純祖)의 3녀 덕온공주(1822~1844)가 혼례 때 입었던 것이라고 전하는 원삼에는 '수(壽)'와 '복(福)'자가 금박 장식되어 있습니다. ▲ 덕온공주(1822~1844)가 혼례 때 입었던 것이라고 전하는 금박당의, '수(壽)'와 '복(福)'자가 금박 장식되어 있다.(중요민속문화재 제211호) 금박장식은 접착제를 바른 무늬판을 무늬를 넣고자 하는 자리에 찍고 접착제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금박지를 붙인 다음 무늬 밖에 있는 금박지를 다시 떼어내는 방법으로 입히게 되지요. 금박장 기술은 옷의 구성에 어울리는 무늬를 고르고, 배치하는 안목을 바탕으로 무늬판을 조각하는 목공예 기술과 주재료인 아교와 금박지의 물성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오랜 제작경험을 바탕으로 완성되는 기술입니다. “금박(金箔)”이란 원래 금 조각을 계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草草人間世 덧없는 인간세상 居然八十年 어느덧 나이 팔십이라. 生平何所事 평생에 한 일 무엇이뇨 要不愧皇天 하늘에 부끄럼 없고자 한 것이네." 위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 선생이 쓴 병중에 회포를 적다(病中書懷)라는 한시입니다. 1704년, 선생이 78살로 세상을 뜨기 두 달 전에 지은 것으로서, 글쓰기를 마감한 절필시(絶筆詩)지요. 선생은 죽음이 가까워왔을 때 평생을 뒤돌아보면서 “하늘에 부끄럼 없고자 최선을 다했음”을 고백합니다. 높은 벼슬이나 재산을 탐하지 않았던 선생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난 시입니다. ▲ 갈암 이현일 선생, 평생 부끄럼 없이 살고자 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선생이 태어나기 전인 임진왜란 때 중국 두사충이란 이가 조선에 왔다가 선생의 집을 보고 “자색 기운이 1장이나 뻗혀있으니 저 집에 틀림없이 뛰어난 인물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하지요. 선생은 인현왕후 폐비의 부당함을 상소하여 7년에 걸친 유배생활을 했던 올곧은 선비였습니다. 또 퇴계학맥의 적통을 이은 대단한 인물인데 외할아버지 경당 장흥효 선생도 퇴계학맥의 적통을 이은 분이지요. 또 선생의 어머니는 도토리죽을 쑤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6월 19일에서 21일까지 경주 예술의전당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의 피리를 한 자리에서 모아보는 경주세계피리축제가 펼쳐졌습니다. 올해로 5년째를 맞이하는 경주세계피리축제에서는 여러 나라의 피리를 비롯한 민속 악기의 전시가 이루어졌는데 그 축제에서 주인이 되었던 것은 당연이 우리나라의 피리들 곧 향피리, 당피리, 세피리였지요. 피리는 관악기 가운데 작은 것으로 향피리의 길이가 보통 30cm 정도고 세피리는 더 작아서 지름이 1cm도 안될 정도입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악기 편성에서 중심될 만큼 피리는 작지만 당찬 악기입니다. ▲ 피리 종류 / 세피리, 향피리, 당피리(위로부터) 피리 가운데 향피리는 향악 연주에서 주 선율을 맡습니다. 특히 많이 연주되는 여민락, 영산회상(靈山會相), 수제천 따위에서 핵심 관악기로 연주되고 있지요. 향피리는 당피리(唐)와 함께 고려 때 중요한 관악기의 하나로 연주됐다고 《고려사》 권71 “악지”에 전합니다. 피리의 그림이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세종실록》 권132 “오례의(五禮儀)”의 악기도설인데 좀 더 자세한 향피리의 그림과 설명은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 권7에 나옵니다. 당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