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강제성이 있는 곧 타율기능을 가진 법(法)이 없어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겠지요. 하지만 본인이 아무리 착해도 다른 착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법은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이란 건 여간 어렵지 않은 것이어서 일반인은 다가서지 쉽지 않지요. 그래서 현대사회에선 변호사가 일반인을 대신해서 법에 관한 업무를 맡아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엔 어땠을까요? 조선시대엔 법 정보가 모두 한자로만 되어있기에 양반들을 빼고는 다른 사람이 대신 법 관련 일을 해줄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일을 했던 사람들을 외지부(外知部)라고 불렀습니다. 외지부는 고려시대 노비 장부과 소송을 담당한 관청 도관지부(都官知部)에서 유래했지요. ▲ 김윤보(1865~1938)의 형정도첩(刑政圖帖) 일부, 백성들이 관에 소장을 내는 모습이 그려있다.(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정식 관원이었던 도관지부와 달리 외지부는 관원이 아니면서도 소송인에게 대가를 받고 소장을 대신 작성해주거나 법률 자문을 통해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왕의 거동과 언행을 자세히 기록한 《승정원일기》에는 영조 임금이 최초의 한글 소설인 김만중(1637-1692)의 《구운몽》을 세 번 읽은 것으로 나옵니다. 맨 처음은 58살 때인 1751년으로 영조는 중국의 로맨스소설인 《평산냉연》에 대해 물어본 뒤 갑가지 《구운몽》의 지은이가 누구인가를 물었습니다. 이에 신하들이 김만중이라고 하자 영조 임금은 《구운몽》의 지은이가 당시 문장가인 이의현(1669-1745)인지 알았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구운몽도를 연구한 정병설 교수는 그만큼 영조임금이 구운몽의 문장이 우수하다고 본 것 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구운몽》의 지은이가 서포 김만중인지 알지만 조선시대에는 《구운몽》에 대해 정확한 정보가 있지 않아 임금조차도 그 지은이를 쉽게 알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영조 임금이 처음으로 구운몽 지은이에 대해 물어본 뒤 십년 쯤 지난 어느 날 또 다시 《구운몽》에 대해 신하들에게 물으면서 《구운몽》이 문장 솜씨가 있고 좋은 글이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구운몽》은 영조 임금만 좋아한 게 아닙니다. 당시 수많은 문인들도 《구운몽》을 좋아했고 춘향전 등에도 《구운몽》이 인용되었을 뿐 아니라
▲ 최우성 / 창덕궁 후원 부용정의 가을(보물 제1763호 창적궁 부용정) ▲ 김덕중 / 가을색 짙은 연경당(보물 제1770호 창적궁 연경당) ▲ 한대희 / 비 내리는 불국사(사적 제502호 경주 불국사) ▲ 허애영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강남에 있는 G아르체갤러리(강남역 지하3층 신분당선 개찰구 앞)에서 사진으로 만나는 우리문화의 유산 2015년 문화유산채널 사진전시회가 오는 9월 18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 전시회는 한국에 있는 자연적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자연의 조화와 선인들의 정신이 새겨져 있는 전국의 문화유산들을 찾아다니는 문화유산사진작가들이 1년동안 담아온 사진들가운데 오직 한 작품씩만을 출품한 전시회다. 문화재가 없는 나라는 문화후진국이요, 문화재가 많은 나라는 문화선진국이다. 온 나라에 산재하고 있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을 한 때는 개발에 장애가 된다고 암암리에 훼손하고 없애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없어진 문화유산을 다시는 재현할 수 없다. 아무리 멋지고 세밀하게 만들어도, 그것은 모조품이 되는 것일 뿐. 한 번 훼손된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화 활짝 필 때 술이 한 말이거든 꽃 두 되를 주머니에 넣어 술독 속에 매달아 두면 향내가 가득하니 꽃은 매화와 연꽃 등 향기가 있고 독이 없는 꽃을 이 법으로 하되 꽃을 많이 술 위에 뿌려야 좋으니라. 유자는 술맛이 쓸 것이니 술독에 넣지 말고 유자 껍질을 주머니에 넣어 매달고 술독을 단단히 덮어 두면 향기가 기이하니라. 이는 전의이씨가 순 한글로 쓴 조리서 《음식방문니라》에 나오는 화향입주(花香入酒) 담그는 법입니다. 여성군자로 알려진 경북 영양 석계종택의 장씨부인이 지은 《음식디미방》과 견줄만한 조리서가 충남 홍성의 사운고택(士雲故宅)에 전해지는데 《음식방문니라》가 그 책입니다. 이 책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송철의 교수에 따르면 조리서로도 가치가 있지만 19세기말 국어 표기법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라고 합니다. 이 책은 흉년 때 빈민구휼에 앞장섰던 사운 조중세(士雲 趙重世 : 18471898) 선생의 종가에 내려오는 조리책으로 《음식방문(飮食方文)》 이란 음식을 만드는 법을 적은 글이란 뜻이지요. ▲ 사운고택의 숙부인 전의이씨가 쓴 《음식방문(飮食方文)니라》 이 책에는 화향입주법 말고도 두견주법, 소국주법, 송순주법,
[한국분화신문=김영조 기자] 대광통교 넘어서니 육주비전(六注比廛) 여기로다. / 일 아는 여리꾼(列立軍)과 물화 맡은 시전주인은 대창옷에 갓을 쓰고 소창옷에 한삼(汗衫)달고 / 사람 불러 흥정할 제 경박하기 한이 없다. 위는 조선 현종 때 사람 한산거사(漢山居士)가 지은 한양가(漢陽歌) 일부입니다. 광통방(廣通坊, 현재 중구 서린동 근처) 부근에 있던 큰 다리 대광통교(大廣通橋)를 건너면 육주비전(六注比廛)이라 하여 나라로부터 독점적 상업권을 부여받고 나라가 필요로 하는 수요품을 조달하던 시전(市廛)이 있었지요. 이 육주비전에는 여리꾼(列立軍) 곧 거간꾼들이 있었습니다. 여리꾼이란 남는 이익(餘利)을 얻는다는 뜻과 함께 종로 거리에 열 지어 서 있다가 손님이 나타나면 흥정을 붙인다는 뜻의 열립꾼(列立軍)인 것이지요. 당시 조선시대 시전상인은 대개 한 평 남짓한 좁은 터에 최소한의 상품을 진열하고 손님을 기다렸지요. 게다가 다닥다닥 붙은 가게들은 상호를 적거나 상품을 알리는 간판도 없었고, 심지어 값도 써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손님은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쉽게 찾을 수가 없어서 시전 거리에서 헤매곤 했는데 이때 상인과 손님의 틈새를 파고든 것이 바로 여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교육부가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가운데 전국의 역사학계 학자들이 대거 들고 일어섰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역사역사교육 연구자 1,167명은 9일 오전 서울 흥사단 강당에서 박근혜 정부는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국정교과서는 교과서의 집필편찬은 물론 수정개편까지 교육부 장관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독점적인교과서이다. 그런 까닭에 국정제는 정권이 원하면 얼마든지 역사를 왜곡할 수 있고, 정권에 따라 교과서 서술이 뒤바뀌어 역사교육 현장에서 일대 혼란과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한 제도이다.라고 강조했다. ▲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역사역사교육 연구자들이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또 이들은 정부와 여당은 역사역사교육 연구자들과 사회 각계의 반대에도 국정화 기도를 멈추지 않음으로써 학계와 교육 현장은 물론 사회 전반에 불필요한 갈등과 혼란을 조장하고 있다. 이에 우리 역사역사교육 연구자들은 정부와 여당의 국정화 기도가 교육의 자율성과 중립성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그 피해가 결국 미래세대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수밖에 없는 점을 심각하게 우려한다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제 군기(軍紀, 군대의 기강)를 점검하므로 무릇 철야장(鐵冶匠, 쇠를 주물러 여러 연장을 만드는 장인) 죽장(竹匠, 대나무로 물건을 만드는 장인)목공장(木工匠) 가운데 경박한 무리들이 이때를 틈타서 칼과 화살 같은 따위를 질 낮게 만들어 저자에 벌여 놓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꼬여서 매우 비싸게 값을 받습니다. 앞으로는 군사무기를 저자에서 사고팔지 못하게 하여, 한성부의 경시서(京市署, 시전-市廛을 감독하는 일을 하는 관서)로 하여금 엄격히 금지한 다음 위반하는 자는 중죄로 다스리게 하소서. 위는 《세종실록》 20년(1438) 11월 25일 기록입니다. 당시 군역을 치르는 백성은 갑옷은 물론 무기까지 준비를 해야 했는데 군기를 점검하면 질 낮은 무기를 만들어 파는 이들이 있어 이를 중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병조가 아뢰는 내용이지요. 지금이야 군인들에게 필요한 것들은 나라가 모두 준비해주지만 조선시대엔 군역을 치르는 백성이 직접 준비해야 했으므로 백성에겐 큰 고역이었을 것입니다. ▲ 조선시대에도 질 낮은 무기를 파는 이들이 잇었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러나 이때에는 그저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정도였지만 요즘 언론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다섯째인 백로입니다. 백로(白露)는 흰이슬이란 뜻으로 이때쯤 밤에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힌다는 뜻이지요. 농촌에서는 백로를 풍년의 기준점으로 삼는데 한낮엔 여전히 더위가 가시지 않고, 아침저녁으론 이슬이 맺힐 만큼 서늘하여 냉온탕을 오가는 날씨로 이때 곡식들은 부쩍 여물어갑니다. 하루 햇볕은 쌀 10만 가마를 증산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지요. 매운 고추는 더 맵게, 포도 등 단 과일이 더 달게 익는 것도 이때입니다. 밤도 예외가 아니라 생각했는데 맑아진 하늘에 유성과 운석의 활동이 자주 눈에 띄면 낮 동안 부족한 일조량을 메워주기 위한 하늘의 은혜로 여겼습니다. 조선시대 나라에서는 이 시기를 낭비하는 것은 한해를 허비하는 것이라 해서 궁궐 대신과 관원들의 음주 가무를 금했지요. 특히 세종대왕 시절엔 모든 잔치를 금하고 이를 어기면 누구나 벼슬을 파면하기도 했습니다. 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삼았던 때는 당연했을 것입니다. ▲ 오늘은 백로, 어머니의 포도지정이 그리워(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특히 이때 옛 사람들의 편지 첫머리를 보면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만강하시고. 하는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도깨비모양을 한 조각상으로 ‘도깨비바우’로 불리는 전남 강진의 사문안석조상 (寺門안石彫像)은 전남 강진군 작천면 갈동리 면동마을 들머리에 있는 높이 122㎝의 석상입니다. 토동입석상이라고도 부르는 이 석상은 마을 수호신이자 절의 경계 표시로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1992년 3월 9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7호’로 지정된 석상입니다. 전남 강진군 작천면 갈동리 토동마을은 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4㎞ 지점의 언덕바지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양산 김씨(梁山 金氏)가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곳입니다. 마을 앞에는 예전에 월남사라는 절이 있어 토동마을은 절 안의 동네라는 뜻으로 ‘사문(寺門)안골’이라 불린 까닭에 사문안석조상(寺門안石彫像)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토동마을이라는 이름은 마을 북쪽에 위치한 앞 삼봉 중간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작은 봉우리가 달을 바라보는 옥토끼 모양으로 앞삼봉의 양쪽 봉우리는 토끼의 귀, 고랑에 있는 마을 앞의 논은 토끼의 입에 해당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도깨비바우는 큼지막한 둥근 받침 위로 4각의 석상이 놓여 있는 모습인데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특징이지요.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
[한국문화시문=김영조 기자] 한 일간신문의 기사 제목은 아빠의 Jean한 센스입니다. 아마도 아빠가 진바지를 입는 센스를 말하는 모양인데 어찌 영어 낱말에 형용사형 우리말 접미사 ~한을 붙여 이상한 말을 만드나요? 우리말 해치기에 전문가적 실력을 발휘하는 모양새는 참 안타깝습니다. 더구나 옆에는 영어의 한글 표기 테일러드진과 보이프렌드진 히스키니진이 있고, Style도 빼놓지 않습니다. 또 글로벌SPA는 뭔가요? 젊은 친구들은 알까요? 한국에서 청바지로 불리는 옷감 진(Jean)은 리바이 스트리우스라는 사람이 착안해서 만든 것입니다. 1830년대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많은 이들이 금을 캐기 위해 모여들었고 주변 일대는 이른바 '천막촌'이 되었는데, 이때 리바이 스트리우스가 광부들의 바지를 질긴 천막용 옷감으로 만들었고, 이것이 미국의 농부나 목동들이 일옷으로 즐겨 입게 된데서 청바지가 유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축성이 없는 꽉 끼는 청바지를 입으면 몸이 숨을 쉴 수 없고, 몸에 압박을 주어 건강에 해롭다고 한의사들은 말합니다. 게다가 무릎에 구멍이 난 청바지는 특히 겨울에 관절을 차갑게 해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