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일곱째인 입하(立夏)입니다.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절후지요. ‘보리가 익을 무렵의 서늘한 날씨’라는 뜻으로 맥량(麥凉), 맥추(麥秋)라고도 하며, ‘초여름’이란 뜻으로 맹하(孟夏), 초하(初夏), 괴하(槐夏), 유하(維夏)라고도 부릅니다. 이때가 되면 봄꽃들은 지고 산과 들에는 초록빛이 짙어지고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리지요. 또 밭에는 참외꽃이 피기 시작하며, 모판에는 볍씨의 싹이 터 모가 한창 자라고, 밭의 보리이삭들이 패기 시작합니다. 한편 이때는 한창 찻잎을 따는 시기입니다. 일본에서 발달한 녹차는 곡우 전에 딴 우전차를 최상품으로 치지만, 차의 성인 초의(艸衣)선사는 '우리의 차(茶)는 곡우 전후보다는 입하(立夏) 전후가 가장 좋다.'고 하였습니다. 원래 찐차인 우전차는 신선하고 향이 맑기는 하지만 우리의 전통 덖음차는 입하 때 딴 잎으로 덖었을 때 깊고, 구수하며, 담백한 맛을 내는 것입니다. ▲ 오늘은 입하(立夏), 아이스크림이 먹고싶어지는 여름의 시작(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또 세시풍속의 하나로 이 즈음에 쌀가루와 쑥을 한데 버무려 시루에 쪄 먹는 떡, 이른바 쑥버무리를 시절음식으로 먹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깃부고나 오날날 / 五월 一일은 / 우리들 어린이의 / 명절날일세 /복된 목숨 길이 품고 / 뛰여 노는 날 / 오-날이 어-린이-의 날 / (후렴) 만세-만세-를 / 갓치부르며 / 압흐로-압흐로- / 나아갑시다 / 아름다운 목소래와 깁분 맘으로 / 노래를 부르며 가세 / 깃부고나 오날날/ 五월 一일은 / 반도정긔 타고난 / 우리 어린이 / 길이길이 맷터날 / 새목숨 품고 / 즐-겁게 뛰-여 노-는날” 위는 동아일보 1927년 4월 26일 자에 나온 <어린이날 노래>입니다. 노래의 뒤엔 “곡조는 야구가(野球歌)”라 하여 아마도 야구응원가 곡조에 붙여서 부르라는 듯 합니다. 조금은 유치한 듯 하지만 당시로는 그 정도도 대단한 노래였을 것입니다. ▲ 개성의 어린이날 행진 사진, 동아일보 1924년 5월 4일자 이 <어린이날 노래> 옆에는 “어린이날 준비 어린이날을 명절로 직히자”라는 기사도 보입니다. 내용을 보면 “다못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파멸을 당하여 전조선 땅덩어리가 아둠과 고초로 지내오는 오늘날 우리의 처디에 잇어서 오직 순진한 조선 정신으로 성립된 이날이 과거에 우량한 성적으로 지내왓고 미래에 또한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태왁박새기”란 해녀가 바다에서 작업할 때 몸을 의지하여 쉬기도 하고, 작업하는 위치를 알려주기도 할뿐만 아니라 ‘망사리(망사리)’를 매달아 채취한 해산물을 물 위에 띄워 놓기도 하는 ‘뒤웅박’을 말합니다. 흔히 “태왁”이라고만 말하기도 하는데 ‘박새기’는 바가지를 이르지요. 태왁은 잘 여믄 박을 파내어 작은 구멍을 뚫고 그 속의 씨를 빼낸 다음 물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구멍을 막아둔 것이기 때문에 물에 잘 뜹니다. 하나의 태왁을 만들기 위해 해녀들은 2월에 흙을 파고 밑거름을 해두었다가 3월 삼짇날에 박씨를 심습니다. 해녀들의 정성이 헛되지 않아 6월 하순께가 되면 지붕 위나 주저리(덤불) 에 박들이 주렁주렁 열리지요. 제주도 속담에 “6월 20일에 박이 까마귀 머리만큼 하면 잘 여문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 해녀의 생명줄 태왁과 망사리 <제주 민속의 아름다움(진성기)> 해녀들은 바다에서 작업을 할 때 대개 두 사람이 짝을 이루어 하게 됩니다. 특히 물살이 빠른 곳일 경우에는 작업 도중 태왁이 떠내려감을 막기 위히여 교대로 태왁을 붙잡고 있기도 하지요. 바다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해녀의 생명은 오직 이 태왁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선조 때부터 광해군 때에 걸쳐 활약한 문장가·사상가·개혁가였던 교산 허균이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썼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압니다. 그러나 허균은 1611년에 우리나라 팔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음식을 소개한 책 《도문대작(屠門大嚼)》도 펴냈습니다. 이 책은 허균이 바닷가로 귀양 갔을 때에 쓴 책으로 귀양지에서 거친 음식을 먹게 되자 전에 먹었던 좋은 음식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놓은 것이라고 하지요. 이 책은 당시의 먹거리를 병이지류(餠餌之類, 떡 종류), 과실자류(果實之類, 괴일), 비주지류(飛走之類, 날짐승 종류), 해수족지류(海水族之類, 물고기 조개 따위), 소채지류(蔬菜之類, 푸성귀)로 나누어 써 놓았습니다. 그밖에 차, 술, 기름, 두부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써놓았는데 이 책에 소개된 먹거리만도 무려 134종이나 됩니다. 특히 비주지류에는 웅장(熊掌, 곰발바닥), 표태(豹胎, 표범 태반), 녹미(鹿尾, 사슴 꼬리), 녹설(鹿舌, 사슴 혀) 따위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허균은 대단한 미식가인 듯합니다. ▲ 허균의 《성소부부고》 가운데 <도문대작> 부분 《도문대작》은 먹거리들을 지방특산물 별로 소개를 해놓았는데 방풍죽은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충남 논산의 절 개태사에 가면 “개태사 철확”이라 부르는 무쇠솥이 있습니다.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호인 이 솥은 지름이 289㎝이고 높이는 96㎝이며 둘레는 910㎝입니다. 이 솥은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개국사찰로서 개태사를 창건하였을 때 부엌에서 쓰던 것이라 전해지지요. ▲ 고려시대의 커다란 무쇠솥 개태사 철확(충남 민속자료 제1호, 문화재청 제공) 그런데 이 철확은 절이 없어지면서 이리저리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가뭄 때 사람들이 이를 끌어 다른 곳으로 옮기면 비가 온다고 하여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닌 적도 있으며, 방치되었다가 큰 장마를 만나 떠내려가 4km나 떨어진 연산읍 냇가에 파묻혀 있던 철확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배에 선적하려고 하자 큰 소리가 나자 혼비백산하여 가져가기를 포기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또 고철로 쓰려고 부수려 했는데 이때 갑자기 뇌성벽력이 쳐서 무사했다는 말도 있지요. 이 철확은 영조 때 문헌인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 연산군조에 보면 개태사가 한창일 때 된장을 끓이던 솥이라고 합니다. 개태사에는 이 철확 말고도 보물 제219호 석불입상, 충남 문화재자료 제274호 오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의열투쟁(義烈鬪爭)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투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의열투쟁은 군사단체나 조직을 배경으로 하는 유격전이나 사변(事變) 또는 전쟁과 달리, 독립운동 단체에서 집단적이며 조직적이 아닌 몇몇 사람에 의한 무력투쟁을 말합니다. 경술국치 후 광복단(光復團)의 활동으로부터 시작된 의열투쟁은 1923년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서 그 이론이 체계화 되었으며 의열단·병인의용대·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등의 의열투쟁을 꼽을 수 있습니다. 1930년으로 접어들면서 일제의 대륙침략이 강화되기 시작하였고 나라 안팎의 독립운동은 침체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어 이를 타개할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게 될 무렵 의열투쟁은 또다시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 상해임시정부의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이 돋보이는 활약을 하게 되는데 윤봉길(1908-1932)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가 그것입니다. 물론 홍구공원의 의거는 1932년 벽두부터 도쿄·국내·대련·상해에서 연속적으로 전개된 김구 주도의 의열 활동의 연장선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 동아일보 1932년 5월 2일 자 홍구공원 식장 광경 1932년 4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일제강점기 잡지 《조선》 1923년 1월호에 수록된 “호모화(護謨靴)에 관한 조사”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호모화의 유입은 1919년경부터 개시되어 당시는 양화형(洋靴型)의 것으로 극히 소량에 불과했으나, 1921년 봄 무렵 선화형(鮮靴型)의 것이 나타나자마자 별안간에 조선인들의 환영을 받아 도시에서 시골로 보급되고 지금은 한촌벽지에 이르기까지 잡화상의 점두(店頭)에도 고무신을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 질기고 질겼던 60~70년대의 타이야표 통고무신 여기에 나오는 ‘호모화’라고 말은 곧 ‘고무신’을 이르는 것인데, ‘호모’는 ‘고무’의 일본어식 음차(音借)표기입니다. 고무신이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것을 잡지 《조선》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지요. 처음에는 서양식 구두를 본떠 단화 형태로 나왔지만 나중에 조선식으로 개량해 나온 뒤 도시는 물론 시골두메까지 엄청난 인기를 누린 듯합니다.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신어온 짚신을 팽개치고 고무신 한 짝을 갖는 것을 소원할 정도가 되었던 게지요. 이러니 다투듯 고무신 공장이 나타났는데, 그 가운데 ‘대륙고무공업’은 광고 문안에 순종 임금은 물론 모든 궁인들이 다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와 친근한 새로 “두루미”가 있는데 이를 한국문화대백과에서 찾아보면 “학이라고도 하며, 선학(仙鶴)·선금(仙禽)·노금(露禽)·태금(胎禽)·단정학(丹頂鶴) 등으로도 불린다. 학명은 Grus japonensis이다. 흔히 신선이 타고 다니는 새로 알려져 있으며, 천년을 장수하는 영물로 인식되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매우 친숙하게 등장하고 있다.”라고 나옵니다. ▲ 두루미를 닮아 자태가 우아한 두루미꽃(이명호 사진작가 제공) 그런데 봄에 피는 꽃 가운데 “두루미꽃”이라고 들어보셨나요? 꽃이 두루미 머리와 목을 닮고, 잎과 잎맥 모양이 두루미가 날개를 펼친 것 같다는 녀석입니다. 뿌리 말고 나머지를 “무학초(舞鶴草)”라고 하여 역시 한자 이름도 두루미가 춤을 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지혈효과가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고한 이 녀석은 사람들에게 쉽게 보여주기 싫은 듯 1,000m 이상 높은 곳 물기가 있는 쪽에서 무리지어 자랍니다. 키는 “두루미”라는 이름과 달리 어른 손 한 뼘도 되지 않을 정도(8~15cm)로 작아 허리를 숙여야만 볼 수 있는 꽃입니다. 외떡잎식물 백합목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잎은 심장 모양이며 끝이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정유재란 때 어전회의에서 왕이 영변으로 피난 갈 것으로 정하고, 모든 벼슬어치들이 몰려가려면 장을 미리 준비해야겠다고 했다. 이때 남자안(南子安)이 신공(申公)을 합장사(合醬使, 임금이 피난을 갈 때 피난처에서 먹을 장을 마련하는 벼슬)로 삼아 영변 땅에 먼저 파견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유천(韓柳川)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공만은 안 됩니다. 신이라는 성은 장 담그기를 꺼리는 달인 신일(辛日)과 음이 같으니 신불합장(申不合醬)이라 좋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위는 선조실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임금이 피난 갈 때도 장을 마련하는 벼슬아치를 피난지에 먼저 보낼 정도로 장은 우리 겨레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먹거리였다. 또 장은 현대에 와서는 더욱 건강식품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시중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장들이 유전자조작 콩으로 만든 장이라는 의심을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 우리콩 전통장 담그기행사 열음식(개막식) 모습 ▲ 전통장문화 시범학교 협약식 ▲ 정효성 서울시 제1부시장(오른쪽)이 전통장 시범학교장에게 장을 기증하고 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꼭 먹어야 할 장은 학교의 무상급식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는 예부터 제사를 지내거나 신성한 의식을 행할 때 목욕해서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부정을 피하려고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했습니다. 그러나 성리학의 시대였던 조선시대에는 옷을 함부로 벗어던질 수 없었기에 선비들은 한 여름에도 냇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조선 숙종 때의 문장가였던 신유한(申維翰)은 그의 일본 기행문 《해유록(海遊錄)》에서 남녀가 함께 목욕하는 풍속에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물론 조선시대 이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는 불교가 전해지고 불교의 나라가 되면서 목욕이 습관화되기도 했었지요. 심지어 신라시대는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죄수에게 목욕벌을 내리기도 했고, 고려 때는 불교가 국교로 부흥하면서 목욕문화는 더욱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또 삼국시대에 대중화된 목욕문화는 백제가 불상과 경전을 일본에 보낼 때 함께 전파되었지요. 더구나 불교에 의해서 발전되었던 목욕은 고려시대부터 질병치료와 예방의학으로 정립되었으며, 《고려도경》에는 ‘고려인들이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을 했고 개성의 큰 내에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목욕을 했다’고 기록되어있을 정도입니다. 또 《고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