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심봤다’라는 말은 산삼을 캐는 심마니들이 산삼을 발견했을 때 세 번 지르는 소리지만 일반인 사이에서도 요즘말로 “대박” 느낌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이란 삼(蔘)이요, 메는 산(山)이고, 마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심메마니”라고도 합니다. 이에는 소장마니(젊은 채삼꾼)가 있고 어인마니(노련한 채삼꾼)도 있지요. 한반도에서 산삼을 캘 수 있는 지역으로는 모두 네 곳이 손꼽히는데 함경도 혜산·갑산·풍산을 비롯한 개마고원 일대, 평안북도의 강계·자성·후창 일대, 강원도의 금강산·설악산·오대산 일대, 남부지방의 덕유산·지리산 일대입니다. 심마니가 산삼을 캐러 들어가는 시기는 눈이 녹기 시작하는 3월 중순부터 초겨울까지의 약 9달 동안이며 가장 좋은 때는 처서((處暑)에서부터 입동(立冬)을 전후한 기간인데, 이때의 산삼이 가장 약효가 좋다고 전해집니다. 이들의 입산일은 1·3·5·7 와 같이 양의 수를 고르는데 이 날이 액이 없고 길하다고 여겨온 것이지요. 양수의 날이라도 그날의 일진이 호랑이날이면 피하는데, 이는 호랑이를 산신의 화신으로 여겨서 산신이 노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 심봤다를 외치려 고독한 산행을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나례란 민가와 궁중에서, 음력 섣달 그믐날에 묵은해의 마귀와 사신을 쫓아내려고 베풀던 의식을 말하는데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나례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시용향악보》는 향악의 악보를 기록한 악보집으로 1권 1책으로 되어 있지요. 향악(鄕樂)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하던 궁중음악의 한 갈래로, 삼국시대에 들어온 당나라 음악인 당악(唐樂)과 구별되는 한국고유의 음악을 말합니다. 《시용향악보》에는 악장을 비롯한 민요, 창작가사 따위의 악보가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악보가 있는 가사(歌詞)는 모두 26편이 실려 있습니다. 1장에 수록되어 있는 가사 가운데 「상저가」, 「유구곡」을 비롯한 16편은 다른 악보집에 전하지 않아 귀중한 고려가요 자료입니다. 서울 서대문구의 (재)아단문고에는 보물제551호로 지정( 1971.08.30)된 『시용향악보』가 있는데 만든 시기와 펴낸 사람을 알 수 없으나, 여러 정황으로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가사의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는 이 책은 국문학연구와 민속학연구에 귀중한 새로운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새로 발견된 16편에는 순 한문으로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양주 회암사터에는 남북으로 나란히 남아 있는 2기의 화강암 맷돌이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것으로 경기도 민속문화재제1호로 지정된 맷돌입니다. 조선시대 것은 주둥이가 짧으나 고려시대 것은 주둥이가 길고 타원형에 가까워 고려시대 맷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회암사터 맷돌은 아래쪽을 고정시키기 위한 매함지와 맷돌을 함께 만들고, 맷돌을 돌리는 맷손을 중심부에 박아 놓은 모습 또한 특이한 것이지요. 고려 말 온나라 절의 총본산이었던 이곳의 승려 수는 3,000명에 이르렀다니 맷돌도 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양주 회암사는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큰 절로 중창하였으며, 1378년(우왕 4)나옹(懶翁)이 중건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지공 스님이 창건하기 전에도 1174년(명종 4)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온 적이 있으며, 보우가 1313년(충선왕 5)에 회암사에서 광지(廣智)에게 출가한 바 있어 이미 12세기에 있었던 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회암사 맷돌들(문화재청 제공) 이 절터 주변에는 보물들이 즐비한데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못오를 리 없건마는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는 봉래 양사언의 유명한 시로 유달리 금강산을 사랑했던 양사언(1517~1584)은 호를 봉래(蓬萊)로 지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조선 명종 때 문신으로 시조와 서예가로도 이름이 났는데 한석봉과 김정희, 양사언을 가리켜 조선의 세 명필이라 할 정도로 유명하지만 그의 백성 사랑 또한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양사언은 비상한 천재인데다가 노력을 거듭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고 전해질 만큼 학구파였습니다. 그가 과거에 급제하여 40년간 다스린 고을이 8군데나 되었지만 청렴결백하기로도 유명하지요. 양사언이 평창군수 시절에 임금에게 상소하기를 “신이 맡고 있는 고을은 바로 옛적 예맥(穢貊)의 한 작은 고을입니다. 주민들은 모두 암굴에서 짐승처럼 거처하는 섶을 묶어 입구를 가리며 비탈밭을 경작하여 근근이 수확하면서 구차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운데 줄임) 백성은 귀신같은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를 했고 옷은 해져서 몸도 제대로 가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애처로워 나도 모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동방의 풍속이 예로부터 세시를 중히 여겨 / 흰머리 할아범, 할멈들이 신이 났네 / 둥글고 모난 윷판에 동그란 이십팔 개의 점 / 정(正)과 기(奇)의 전략전술에 / 변화가 무궁무진하이 / 졸(拙)이 이기고 교(巧)가 지는 게 더더욱 놀라우니 / 강(强)이 삼키고 약(弱)이 토함도 미리 알기 어렵도다. / 늙은이가 머리를 써서 부려 볼 꾀를 다 부리고 / 가끔 다시 흘려 보다 턱이 빠지게 웃노매라.” 위는 고려말-조선초의 학자 목은 이색이 쓴 ≪목은고(牧隱藁)≫에 나오는 이웃 사람들의 윷놀이를 구경하면서 쓴 시입니다. 이 윷놀이를 할 때 던져서 나온 윷가락의 이름은 하나를 도, 둘을 개, 셋을 걸, 넷을 윷, 다섯을 모라 부르는데, 이는 끗수를 나타내는 말이지요. 이 도·개·걸·윷·모는 원래가 가축의 이름을 딴 것으로 봅니다. 곧 도는 돼지[豚]를, 개는 개[犬]를, 걸은 양(羊)을, 윷은 소[牛]를, 모는 말[馬]을 가리킵니다. ▲ "모야, 윷이야!" 신나는 추임새문화 윷놀이(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먼저 도는 원말이 ‘돝’으로 어간(語幹) 일부의 탈락형인데 돝은 돼지의 옛말로 아직도 종돈(種豚)을 ‘씨돝’이라 부르고, 또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개구리 폴짝 뛰어 오르면 발걸음이 빨라지는 저 엉덩이 풋풋한 봄 동 냄새 싱그럽고 어린 쑥 파르르 고개 내민다. 친구여! 벌건 얼굴 불붙었으니 홍매화 그렇게 울면서 진다. 위 시는 임인규 시인의 “우수” 일부입니다. 우수가 되니 “얼굴이 벌겋게 불붙은 홍매화는 그렇게 울면서 진다.”라고 노래합니다. 오늘은 24절기 둘째인 우수(雨水)입니다. 우수는 말 그대로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뜻인데 이때가 되면 추운 북쪽지방의 대동강물도 풀린다고 했지요. 아직 추위가 남아있지만 저 멀리 산모퉁이에는 마파람(남풍:南風)이 향긋한 봄내음을 안고 달려오고 있을 겁니다. ▲ 오늘은 우수, 대동강물도 풀려 빨래하기 좋아(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예부터 우수 때 나누는 인사에 "꽃샘잎샘에 집안이 두루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이 있으며 "꽃샘잎샘 추위에 반늙은이(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속담도 있지요. 이 꽃샘추위를 한자말로는 꽃 피는 것을 샘하여 아양을 떤다는 뜻을 담은 말로 화투연(花妬姸)이라고 합니다. 봄꽃이 피어나기 전 마지막 겨울 추위가 선뜻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앙탈을 부려보기도 하지만 봄은 이제 시골집 사립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꽁꽁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오늘은 을미년(乙未年) 양띠해가 시작되는 설날이다. 설날을 맞아 그 깊은 뜻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먼저 설날이란 말의 말밑(어원)부터 살펴보자. 먼저 조선 중기 실학자 이수광(李睟光, 1563 ~ 1628년)의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설날을 달도일(怛忉日)이라 했다. 곧 한 해가 지남으로써 점차 늙어 가는 처지를 서글퍼하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설은 사리다'(愼, 삼가다)'의 `살'이 변한 말이라며 설날은 신일(愼日) 곧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라 하여 몸과 마음을 바짝 죄어 조심하고 가다듬어 새해를 시작하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 찬란하게 떠오르는 설날 아침 해돋이 또 설은 새해라는 정신적ㆍ문화적 의미의 낯 설은 날'을 뜻한다고 보기도 했다. 처음 가보는 곳, 처음 만나는 환경은 낯 설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밖에 연세설(年歲說)도 있는데 산스크리트어는 해가 바뀌는 연세(年歲)를 '살'이라 하는데 이 '살'이 '설'로 바뀌었다고 보기도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붉은 해 동이 터오고 새벽 닭이 울었다 새해오리까 아니 한박휘 해가 도랐으니 새해오리까? 복조리 사라외치니 새해오리까 호사한 아기들 세배하러 오고 가며 널뛰는 색씨 붉은당기 날르니 이 또한 새해오리까?“ 위는 잡지 《삼천리》 제90권 1호(1937년 1월 1일)에 실린 박세영 님의 “신년송(新年頌)”이란 시의 일부입니다. 시를 보면 붉은 해 동이 터오고 새벽닭이 울면 새해요, 호사한 아기들 세배하러 와도 새해요, 널뛰는 색시 붉은 댕기 날아도 새해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복조리 사라” 외치니 새해라고도 하였습니다. 1925년에 펴낸 최영년(崔永年, 1856~1935)의 시집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예로부터 섣달 그믐날의 해가 저물면 복조리 파는 소리가 성 안에 가득하다. 집집마다 사들여서 붉은 실로 매어 벽에 걸어 둔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예전엔 한 해의 복이 쌀알처럼 일어나라는 뜻을 담아 한 해 동안 쓸 조리를 새해 첫 날에 샀던 것입니다. 이때 남정네들은 복을 갈퀴처럼 긁어모으려고 복갈퀴를 사기도 했지요. 돌이나 뉘까지 골라낸 쌀을 사서 먹는 요즘 복조리는 이미 부엌에서 사라져버렸지만 예전엔 부엌살림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교자상(交子床)은 주로 잔치 따위에 쓰는 커다란 상을 말하는데 술과 안주를 차리는 건교자상, 여러 가지 반찬과 면·떡·과일 따위를 차리는 식교자상, 식교자와 건교자를 섞어서 차린 얼교자상이 있습니다. 교자상에 차리는 음식은 신선로, 전골, 찜류·전류·편육류·회·숙채·생채·마른반찬·떡·숙과류·생과류·화채류 따위가 있으며 초대한 손님의 식성, 계절, 색채를 생각하여 시간·예산·집안의 형편에 맞추어 차립니다. 차린 음식에 따라 간장·초간장·초고추장도 함께 올리지요. 날마다 먹는 밥과 반찬을 주식으로 차리는 반상에 견주어 교자상은 주식과 부식의 구분이 없이 여러 가지 음식으로 구성하는 점이 특징입니다. 교자상으로는 직사각형의 큰 상이 쓰이는데 길이 80∼90㎝, 너비 60㎝ 안팎에 높이 35㎝가 주로 쓰입니다. 요즈음은 보다 큰 것으로 길이 120㎝, 너비 70㎝에 높이 35㎝ 짜리도 있습니다. 재료로는 은행나무나 피나무상판에 소나무나 화류나무로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 교자상(交子床) 차림(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시대 식생활은 홀로 먹는 독상 위주여서 교자상이라도 그리 크지는 않았습니다. 예전 교자상은 크기가 작았으므로 필요시에는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백두산에 우람한 소나무가 있는데 그 이름을 미인송이라 부릅니다. 이 미인송에는 애틋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청풍이라는 총각과 나월이란 처녀의 슬픈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원래 송풍나월 (松風蘿月)이라고 하면 소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과 담쟁이덩굴 사이로 비치는 달이라는 뜻으로 운치 있는 자연 경치를 이르는 말입니다만 백두산 북쪽 안도현 마을 어귀에 사는 이 처녀총각의 이야기는 안타깝기만 합니다. 처녀 나월이를 사랑하는 송풍을 질투한 마을 이장은 나월이를 첩으로 두려고 송풍을 멀리 부역을 떠나보냅니다. 그 뒤 송풍이 죽었다하고 나월이를 차지하려하지만 나월은 송풍을 그리며 백하강으로 뛰어 들어 죽습니다. 나월이 죽은 뒤 고향으로 돌아온 송풍은 이장 집에 불을 지르고 자신은 나월이 무덤에 우뚝 솟은 소나무를 끌어안고 자결을 하지요. 백두산 미인송은 이렇게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여인과 관련된 나무이름으로는 열녀목(烈女木)이라는 것도 있는데 오얏나무와 비슷한 나무로 가지와 줄기가 옆으로 퍼지지 않고 하늘 높이 곧게 자라는 특징이 있어 열녀목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 광나무라고도 불리는 “여정목(女貞木)” 또한 광나무라고도 부르는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