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편집국장] 2014 갑오년 한 해 동안 한국문화신문은 숨 가쁘게 달려왔다. 아직 여러 가지로 열악한 상태에서 스포츠와 연예 기사 없는 오직 한국문화와 우리말, 배달겨레의 역사 그리고 민족 이야기 거기에 나눔의 따뜻한 기사만을 써야 했기에 모든 기자들은 고군분투했으며, 하루하루를 좀 더 알찬 기사를 써 올리기 위해 온 정성을 쏟았다. 갑오년 마지막 날인 오늘 그 결과를 보면 날마다 10~20여 건의 기사가 생산되었고, 아직 미미 하지만 조회 수 즈믄(1천) 건을 돌파하는 기사가 6건이나 나왔다. 광화문 현판, 8월 15일 1시간 동안 한글이었다 ▲ 8월15일 광복절 아침 7시부터 1시간 동안 한자현판을 가린 한글 펼침막 모습 (한글문화세계화추진본부 이대로 제공) 조회수 으뜸인 기사는 김슬옹 교수의 광화문 한글 현판 기사인 광화문 현판, 8월 15일 1시간 동안 한글이었다 였다. 기사는 교황이 시복식을 하는 동안만이라도 광화문에 한글간판을 달자는 한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작은 투쟁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상세하게 보도했다. 조회수 1,251를 기록했으며, 댓글도 무려 80개가 달렸다. 또 이 기사는 문화재청장에게 제안하는 한글문화세계화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회양군 난곡면 해동의원장 이일재 등은 평소부터 다대한 자선사업을 하여왔으며 지난 섣달그믐을 맞이하여 동리의 극빈자들에게 백미 한 말과 정육 한 근을 분급하였다”, “함경남도 풍산 경찰서 직원 일동은 풍산군내의 다수의 기민(饑民)을 구제코저 자금을 모아 위선 읍내에 가난한 집 10여 호에 백미를 배급하였는데 이후로는 지방 인사들과 협력하여 대대적으로 구제책을 강구하리라 한다.” 이는 1934년 2월 15일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당시에는 일제 강점기인지라 총독부 방침으로 양력을 썼으나 사람들은 음력을 기준으로 설밑에 이웃을 돕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경성부내 서대문 1정목에 있는 구세군 본영에서는 며칠 남지 않은 음력설을 앞두고 제3차로 마을 사람들 1,050명에게 설명일(설명절)에 한 끼의 밥이라도 지어 먹게 하기 위해 이날 오후 2시 30분부터 본영 앞마당에서 백미 20가마니를 가지고 1인당 1승(1되) 내지 2승을 분배해 주었다.” 이는 1935년 2월 3일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음력이 되었든 양력이 되었든 연말이 되면 이렇게 우리 겨레는 이웃에게 따뜻한 밥 한 끼라도 챙길 줄 아는 아름다운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사회에 나가서 빛과 소금이 되거라.”와 같은 말은 예전에 학교 졸업식장에서 흔히 듣던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전 우리는 어린애가 오줌을 싸면 아침 일찍 키를 머리에 씌워 이웃으로 소금을 얻어 오게 하는 풍습이 있었으며, 상가집에 문상을 다녀온 뒤 문밖에서 소금을 뿌려 부정을 막기도 했지요. 이렇게 일상에서 소금은 음식의 간을 하는 재료뿐만 아니라 다양한 용도로 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 라든지 “소금꽃”이라고 해서 진땀을 흘리고 일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로도 쓰인 것이 소금입니다. ▲ 《한국수산지》에 보이는 바닷물을 염전으로 퍼올리는 모습 “호포(戶布)를 설치한 것은 다만 잡공(雜貢)을 감면하기 위함인데, 고려 말기에는 이미 호포(戶布)를 바치게 하고 또한 잡공(雜貢)도 징수하여 백성의 고통이 적지 않았으니, 지금부터는 호포를 일체 모두 감면하고, 각 도에서 구운 소금은 안렴사(按廉使, 고려와 조선시대 각 도의 으뜸 벼슬)에게 부탁하여 염장관(鹽場官)에게 명령을 내려 백성들과 무역하여 국가의 비용에 충당하게 할 것이다.” 이는 태조실록 1년(1392) 7월 28일 기록으로 “염장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는 예부터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하여 여름이 가까운 단오 때엔 부채를 선물하고, 동지 때는 달력을 선물하는 것이 중요한 풍속이었습니다. 그 달력을 조선시대에는 특징에 따라 역서(曆書) 또는 월력(月曆), 책력(冊曆)이라고 불렀지요. 특히 조선시대 달력은 책 형태로 만들어졌기에 주로 책력이라는 이름을 많이 썼습니다. 책력은 단순히 월(月), 일(日)과 같은 시간의 흐름을 나열한 것에 그치지 않고 24절기와 예상 강수량, 풍, 흉년 예측을 기록하여 농사짓기의 지침서가 되었지요. 또 “이사 가기 좋은 날, 목욕하기 좋은 날, 씨앗 심기에 안 좋은 날” 같이 각종 길흉일을 표기하여 삶의 지침서로도 활용되었습니다.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달력으로 1580년(선조 13) 만든 보물 1319호 “경진년 대통력(庚辰年 大統曆)”(왼쪽)서애 류성룡(柳成龍)이 사용했던 대통력(보물 제160-10호) “농자천하지대본”이었던 농경사회에선 24절기에 맞춰 만든 책력은 요긴한 선물로서 귀중한 대접을 받았는데 조선 전기에 1만 부 정도 펴낸 책력은 조선 후기에 30만부 이상 펴냈을 정도로 책력의 중요성은 시간이 갈수록 높아졌지요. 이러한
[한국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철저히 사전 분석하고 실천 남다른 통찰력, 성공 밑거름 정주영을 사람들은 흔히 불도저라고 한다. 그것은 그가 일을 할 때 불도저처럼 밀어붙인다고 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어떤 일을 밀어붙이기 전에 누구보다도 철저히 분석하고 생각하고 또 계산하고 있음을 정작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따라서 정주영식 생각하는 불도저를 단순히 보이는 외형만을 보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에게는 남다른 보이지 않는 탄탄한 내공이 있음을 알아야한다. 서산간척지 마지막 공구 물막이 때 23만 톤 유조선을 가라앉힌 것도, 10층 빌딩만한 자켓 89개를 인도양 건너로 운반한 것도, 망신만 당하지 말라던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일도, 소백산 귀신을 돌려세우고 경부고속도로를 공기 안에 완성한 일도 모두 그의 철저한 계산과 분석 뒤에 불도저처럼 밀어붙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소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정주영이었기에 성공 역시 학교 공부와 정비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성공을 두고 사람들은 남달리 사업에 대한 직관력과 감각 그리고 인생에 대한 통찰력과 함께 끊임없이 밀어붙인 그의 불도저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주영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옛 사람들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했다. 곧 농사는 천하(天下)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근본(根本)이라는 것이다. 그때 임금의 특권임과 동시에 의무이며, 정치의 중요한 깨달음이 바로 관상수시(觀象授時) 곧 천체현상을 관찰하고 역서(曆書)를 만들어 농사지을 때를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 관상수시의 중심인 역서란 책력(冊曆)이라고도 했고, 지금은 달력이라고 부른다. ▲ 일만 원 짜리 지폐에 오른 혼천시계 복제품(전시장 들머리에 있다) 그런데 맨 처음 만들어진 달력은 무엇이며, 지금의 달력과 어떻게 다를까? 또 옛날의 달력에는 어떠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었을까? 그 모든 것에 대한 것을 알려주는 달력, 시간의 자취 전시회가 경기도 남양주의 실학박물관(관장 김시업)에서 내년 2월 29일까지 열리고 있다. 특히 이 전시회는 국립민속박물관(관정 천진기)과의 공동기획전으로 생활필수품인 달력이 인간의 삶 속에서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를 살펴보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먼저 전시회에서 눈에 띄는 것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달력으로 1580년(선조 13) 만든 보물 1319호 경진년 대통력(庚辰年 大統曆)이다. 이 대통력은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가 써오던 소반의 크기는 너비가 50센티미터 안팎입니다. 한 사람이 소반을 받쳐 들고 부엌에서 마당을 지나 대청을 오르고 안방이나 사랑방으로 옮겨가는데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될 만큼의 크기지요. 또 소반의 좌우 폭이나 지름이 성인의 어깨 넓이보다 크지 않아 양팔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높이도 25~30센티미터 안팎으로 몸을 많이 구부리지 않아도 되며, 팔을 움직이는 데도 큰 불편이 없지요. 이처럼 이리저리 옮겨야 하는 가구이기 때문에 재목은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것들을 썼는데 주로 은행나무, 가래나무, 피나무, 오동나무, 소나무 따위입니다. 또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목재의 연결부분을 슬기로운 짜임으로 튼튼하게 짜 맞추어 가늘지만 소반과 그 위에 놓인 그릇과 음식들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옮기기 편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릇을 올려놓는 천판이 밖으로 나와 따로 손잡이 없이 양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반의 특징 가운데는 다리도 빼놓을 수 없지요. 다리는 구조적으로 튼튼하게 하되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아름다운 모양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크리스마스가 찾아왔습니다. 예년보다는 조금 조용한 것 같습니다만 우리나라의 크리스마스는 어쩌면 종교적인 것 보다는 기형적인 향락으로 흘러서 캬바레나 바(bar)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가 되어 버린 느낌입니다. 외국에서는 친한 가정에서 서로 초대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여 가정본위로 보낸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보낼 것인가?” 이는 1958년 12월 23일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이 신문의 기사를 더 보지요. ▲ “춤,술,선물로 일탈하는 한국은 독일 성탄절과 다르다” (1959년 12월 23일 동아일보 기사) “크리스마스 파티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오후 2시부터 4시정도로 합니다. 제1부는 기도나 찬미가(찬송가)를 부르며 그리스도의 강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제2부는 (모두)즐겁게 보내는 시간으로 마련합니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금액의 선물을 사가지고 와서 번호를 매겨서 심지 뽑기를 해서 교환합니다. 파티시간은 두 시간이면 두 시간, 세 시간이면 세 시간으로 고정해서 초과하지 않도록 합니다.” 참으로 친절한 “크리스마스 행사 안내” 기사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선물교환까지 자세히 안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미국 아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오늘 밤은 구세주 예수가 오신다는 성탄절 전야입니다. 구세주(救世主, 영어: Savior/Saviour)는 "세상을 구원하는 자"란 뜻으로 종교적 의미에서 신앙의 대상을 가리키는 말로 쓰지요. 기독교 신자가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구세주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지만 불교에서는 “미륵보살”, 이슬람교에서는 “마흐디”가 구세주인 것입니다. “종교”는 신(神)이나 절대적인 힘을 통하여 인간의 고민을 해결하고 삶의 근본 목적을 찾는 문화 체계이기에 어느 종교든 구세주가 있게 마련인 것이지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부를 차지한 사람이 있는 반면 헐벗고 고통 받는 사람이 있고 그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원할 구세주 사상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예수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구세주가 곧 미륵님이었던 것입니다. 미륵신앙은 미륵보살이 사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과, 말세인 세상을 구하러 미륵이 오시기를 바라는 두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말한다면 천국에 가는 것과 구세주를 맞이하는 것에 견줄 수 있습니다. 특히 미륵신앙은 후삼국시대 궁예가 흉흉한 민심을 타고 자신이 미륵이라 하여 한때 사람들의 호응을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흔히들 “차 한 잔 할까?” 하면 이제 녹차나 홍차가 아닌 커피를 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최근 국내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 2,000개가 넘어섰을 정도라 하니 커피는 그야말로 누구나 즐기는 차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커피는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 왔을까요? 흔히 사람들은 1896년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황제가 처음 마셨다고 알고 있으며, 일반인들은 1902년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Waeber)의 처형인 손탁(Sontag)을 통해 접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조선에서 처음 커피를 팔았다고 알려진 "손탁호텔"(한국학중앙연구소) 그러나 영국 외교관 윌리엄 칼스가 남긴 《조선풍물지(1888)》에 보면 그가 1883년 11월 서울에 당도했을 때, 박동(지금의 수송동)에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집에서 ‘따뜻한 커피(hot coffee)’를 얻어 마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또 해군군의관 조지 우즈가 남긴 일기장에도 1884년 3월에 정동의 미국공사관에서 커피를 마셨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아관파천 보다 적어도 13여 년 이상 빠르게 이미 커피가 조선에 들어와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