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먼저 정신상 국가가 있은 뒤에야 형식상 국가가 있는 것이니, 정신적 국가란 민족의 독립정신, 자유정신, 생존정신, 국위선양의 정신, 국광을 활발히 할 정신을 두고 말하는 것이며, 형식상 국가라 함은 강토, 국권, 대포, 육군, 해군이다. 오호라! 정신적 국가가 망하면 형식상의 국가가 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나라는 이미 망한 나라이며, 정신적 국가만 망하지 않는다면 형식상 국가는 망하였을지라도 그 나라는 망하지 않은 나라이다." 이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의 학자이고 언론인이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이었던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선생이 한 말입니다. 오늘은 1859년 박은식 선생이 태어나신 날이지요. 선생은 독립운동가 이전에 학자로서 유명한 분입니다. 10살부터 17살까지 아버지의 서당에서 정통파 성리학과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는데 당시 황해도 일대에서 이름나 있던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가깝게 지내면서 문장을 겨루어 황해도의 양 신동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 큰 성리학자 역사학자이면서 독립운동가였던 박은식 선생, 선생의 책 《한국통사(韓國痛史)》 이후 정약용(丁若鏞)의 제자인 신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오늘은 선의 왕후(宣懿王后) 기신(忌辰, ‘기일-忌日’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아침의 어선(御膳, 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에 육찬(肉饌, 고기붙이로 만든 반찬)이 있었는데, 나의 눈이 침침하였기 때문에 분변하지 못하고 집어 먹었다가 깨닫고서 토했었다.(今日宣懿王后忌辰也。 朝者御膳有肉饌, 而予眼昏, 故不辨而下箸, 覺而之矣)” 《영조실록》 47년(1771) 6월 29일 자 기록입니다. 이를 보면 영조임금은 육고기를 싫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조임금은 재위 기간이 가장 긴 임금이기도 했지만,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임금이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던 일 곧 “감선(減膳)”을 89차례나 했을 정도로 임금으로서의 처신을 분명히 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감선은 권력 사이에서 신하들을 경고하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고 하며, 심지어 감선이 아니라 아예 굶는 일도 어려 차례 있었다고 합니다. ▲ 조선왕조궁중음식, 그러나 영조임금은 무려 89차레나 감선했다.(문화재청) 또 영조는 자신의 몸을 잘 섭생하여 오래 살았던 임금인데, 밥 먹는 시간도 정확히 지키고 소식 했다도 하지요. 더구나 식성도 까다로워 나이가 들수록 밥맛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臨溪茅屋獨閒居 시냇가 띠풀 집에 한가히 지내노라니, 月白風淸興有餘 달은 밝고 바람은 맑아 흥취가 가득하네. 外客不來山鳥語 손님이 오지 않으니 산새가 찾아와 지저귀는데, 移床竹塢臥看書 대나무 밭에 평상을 옮겨놓고 누워서 책을 보네. 위 시는 고려 말 충신으로 호가 야은(冶隱)인 길재(吉再)의 한시 閒居(한가히 지내다)입니다. 그는 새 왕조인 조선에 벼슬하지 않고 금오산(金烏山)에 은둔하여 후학 양성에만 몰두했지요.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했던 야은은 이씨(李氏)들의 조선에서 벼슬에 나가 부귀공명을 누리는 것이 욕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 길재는 평상에서 책을 보는 즐거움으로 살았다. 공재 윤두서의 수하오수도(樹下午睡圖) 야은은 시냇가에 띠풀로 이은 집을 짓고 조용히 삽니다. 이 집에는 손님이 찾아오지 않지만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 더없는 벗이 되지요. 그뿐만 아니라 산새까지 곁을 지켜주니 이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습니다. 야은은 한술 더 떠서 한가함 속에 평상을 대나무 그늘 속에 옮겨놓고 누워서 달빛에 책을 봅니다. 벼슬을 탐하는 속세의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삶에서 그는 은자의 낙을 한껏 누리고 있는 것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세계 으뜸 글자 한글 그 한글을 기리는 박물관이 세워졌다. 한글날(10월 9일) 개관하는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이 그것인데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터 안에 들어섰다. 연면적 1만1322m²(약 3,425평),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1만1,000여 점의 한글 관련 유물이 전시된다. 미리 둘러본 박물관. 모음을 토대로 하늘, 사람, 땅을 형상화한 국립한글박물관이라 하지만, 뭘 상징했는지 얼른 들어오지 않는다. 국립중앙박물관 입구를 거쳐 500m 정도 걸어야 하는데 아직 팻말도 없고 박물관 들머리가 어딘지 우왕좌왕하게 된다. 물론 개관일이 남아 있으니 그 안에 안내 시설을 정비하겠지만 말이다. ▲ 한글박물관 전경 ▲ 상설 전시실에 들어서면 한글을 상징하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확대해 금색 글자로 새겨 넣은 벽이 보인다 먼저 2층 상설 전시실에 들어서면 한글을 상징하는 기둥과 훈민정음 해례본을 확대해 금색 글자로 새겨 넣은 벽이 보였다. 박물관의 취지를 돋보이게 하는 긍정적인 면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뭔가 막혀 있다는 느낌이 들어 답답한 생각도 들었다. 상설 전시실(1240m²약 375평)이 1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맹골도 앞 바다 물을 다 마셔서 우리에 자식들을 건질 수만 있다면은 엄마인 이 애미는 저 거친 바다를 다 마시겠다. 눈물과 바다를 서로서로 바꾸어서 자식들을 살릴 수가 있다면은 엄마인 나는 삼백 예순 날을 통곡을 하겠노라“ ▲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보유자 후보 정명숙 명인이 살풀이춤으로 희생자들의 넋을 달랜다. ▲ 도종환 시인이 비통한 목소리로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시 “맹골도 앞 바다의 깊은 슬픔”을 흐느낀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전수조교 김수연 명창이 정철호 명인이 작창한 창작판소리 “맹골도 앞 바다의 깊은 슬픔”을 토하고 또 토한다. 장내 청중들은 숨을 죽인다. 아니 통곡을 삼킨다. 도종환 시인이 비통한 목소리로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시 “맹골도 앞 바다의 깊은 슬픔”을 흐느낀다. 이어서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보유자 후보 정명숙 명인이 살풀이춤으로 희생자들의 넋을 달랜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고법보유자 정철호 명인의 북장단에 맞춰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전수조교 김수연 명창이 4명의 제자들과 함께 창작판소리 “맹골도 앞 바다의 깊은 슬픔”을 토하고 또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옛날 아기들이 입던 옷에는 두렁치마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두렁치마는 조선시대 어린아이의 배부터 아랫도리를 둘러주는 기능적인 치마로서 '두렁이', 또는 '배두렁이'라고도 하지요. 배두렁이는 뒤가 겹치지 않게 만들었는데 이는 누워있는 아기에게 뒤가 배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물론 기저귀를 갈기에도 편리한 것입니다. 요즘처럼 옷감의 종류도 많지 않았고, 요즘 입는 속옷 같은 것도 없었던 옛날에 몸이 여린 갓난아이에게 보온용으로 입혔던 것이지요. 흔히 무명이나 명주, 융 따위를 겹으로 하거나 또는 솜을 두어 만들었으며 누비로 만든 것이 많았습니다. 《조선상식문답》을 쓴 최남선은 이칠일은 [두닐헤]라 하여 깃 있는 옷에 두렁이를 입히고 한쪽 팔을 마저 풀어주며 활개를 다 놀리게 하며 삼칠일에라야 비로서 상유하고의 구양한 의복을 입혔다. 이때부터 산실의 금기가 풀리고 산모의 음식기거가 상인의 예로 회복된다.고 하였지요. 이를 보면 두렁치마는 두 이레쯤(14일) 될 때 입히기 시작한 듯합니다. 아기들이 기어 다니기 전까지는 남아나 여아 같이 입었지만 자라면서 주로 여아들만 입었습니다. ▲ 정교하게 손누비 하여 지은 두렁치마(석주선박물관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조선 후기 시인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이 펴낸 《추재기이(秋齋紀異)》는 특정한 인물 일흔한 명의 범상치 않은 삶과 활동을 시로 읊고, 그 배경을 이루는 구체적인 사실을 간결하게 설명한 책입니다. 이 책을 안대희 성균관대 교수가 현대어로 옮겨 2010년 한겨레출판을 통해 책을 내놓았습니다. 그 책의 첫장에는 은덩이를 양보한 홍씨와 이씨(讓金洪李)라는 제목의 일화가 나옵니다. 한성 오천(梧泉, 현재 수표동 근처)에 사는 이 씨는 몇 대에 걸쳐 부자로 살다가 가산을 탕진하여 살던 집을 홍 씨에게 팔았습니다. 홍 씨가 이 집을 보수하다가 집안에서 은덩이 오천 냥이 나왔지요. 그러자 새 주인 홍 씨는 원주인 것이라 생각하여 불러다 돌려주려고 합니다. 그러자 원 주인 이 씨는 그 은덩이가 자신의 것이란 증거도 없을뿐더러 이미 판 집이니 자기 것 일 리가 없다며 사양했습니다. ▲ 은덩이를 놓고 서로 상대방 것이라고 하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결말이 나지 않자 이들은 관아에 알려 임금에게 보고가 됩니다. 이에 임금은 우리 백성 가운데 이렇듯 어진 사람이 있구나! 지금 옛 사람들보다 못하다고 누가 말하랴.라고 말하고는 은덩이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원나라 농민들이 목화를 심는 것을 보고, 추위에 떠는 백성들이 솜옷을 입을 수 있도록 목화씨를 고려에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원나라는 목화가 다른 나라에 퍼지는 것을 막았기에, 아무도 목화씨를 가지고 국경을 넘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원나라 경비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목화씨를 붓대에 넣어 고려로 돌아왔다 ▲ 문익점면화전시관의 문익점 영정 한 블로그에 위와 같은 글이 올라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태조실록(太祖實錄)》 7년(1398년) 6月 13일자 기록 문익점 졸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문익점이)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그런가 하면 《고려사》 기록에도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얻어가지고 와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원나라에는 목화가 널려 있어 금수품목도 아니었기에 훔쳐올 필요가 없었지요. 여기서 문익점(1329~1398)과 관계된 사실이 잘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24절기의 16째 추분입니다. 추분에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으므로 중용(中庸)의 덕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 추분 무렵이면 들판의 벼가 익어 가는데 벼는 한여름 땡볕과 천둥, 번개 그리고 폭우를 견뎌내면서도 고개를 숙여 우리에게 겸손을 덕목을 가르쳐줍니다. 《천문지(天文志)》를 살펴보면, 노인성(老人星)은 항상 추분(秋分)날 아침에 병방(丙方)에서 나타나, 춘분(春分)날 저녁에 정방(丁方)에서 사라지는데, 노인성이 나타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임금이 수창(壽昌)하는 까닭에, 추분날 남교(南郊)에 나가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본조(本朝)에서 춘분(春分)추분(秋分)에 노인성을 제사지내는 것은 대개 가을에 나타나고 봄에 사라지는 뜻을 취하여 이를 제사지내는 것입니다. ▲ 세화(歲畵)의 하나인 노인성도(老人星圖) - 국립민속박물관 위처럼 《태종실록》 11년(1411) 1월 11일 기록에는 추분에 고려 때부터 장수를 담당한다는 노인성(老人星)에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소사(小祀, 나라에서 하는 작은 제사)로 정해 나라에서 제사를 지낸 것인데 태종과 세종대를 거쳐 제사를 지냈으나, 중종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해롱해롱 황피롱아 / 님 죽은지 3년만에 / 무덤압헤 꼿치피네 그 꼿이름 무엇인가? / 님을 그려 상사화(相思花) / 꼿튼 잇서 피건마는 님은 가고 아니오네! / 내가 죽고 제가 살면 / 꿈에라도 다니리라! ▲ 꽃무릇의 아름다움(사진 최우성 기자) 위는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인 양명(梁明, 1902 ~ 모름)이 삼천리 제7권 제8호 (1935.9.1)에 “우리민요와 문학”이라는 글 속에서 소개한 노래입니다. 통영출신인 그는 최치원, 정몽주, 이퇴계, 박지원 등 수많은 선비들이 사상가로서는 훌륭하고 문예지식도 높으나 불행히도 이들은 모두 중국 고문(古文)의 모방과 중국고인(中國古人)의 노예로 일평생을 보내고 말았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위 노래와 같은 우리말노래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안자스니 님이 오나 / 누엇스니 님이 오나 / 뒷담 속에 귀뚜라미 소리 /사람의 간장 다 뇌긴다 / 백일청천에 뜬 종달이 / 요내 속가래도 달 떠사라 / 마당전에 북덕불은 / 요내 속갓티 속만 탄다"(용강민요 ‘龍岡民謠’)와 같은 노래를 양명은 “진짜 우리 겨레의 마음”이라고 하면서 “우리민요와 문학”에서 여러 편을 소개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