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제69주년 광복절 하루 전인 14일 인제대학교 상계백병원 17층 강당에는 제93회 인문학 강좌로 열린 “국어사전에 남아 있는 일본말 잔재” 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100여 명의 청중으로 강당 안은 열기가 뜨거웠다. 일제 침략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광복절은 우리 겨레에게 더 없는 기쁨의 날이요, 감격의 날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말 속에는 식민 잔재인 일본말이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강사로 초청된 사람은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으로 이날 강연 주제는 인물과 사상사를 통해서 펴낸 이 소장의 책 《오염된 국어사전》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 《오염된 국어사전》, 이윤옥, 인물과사상사 ▲ “국어사전에 남아 있는 일본말 잔재” 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는 이윤옥 소장 이날 강연에서 이 소장은 우리 삶 속에 남아있는 일본말을 잉꼬부부, 야끼만두, 자부동 같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과 국민의례, 국위선양, 부락과 같은 민족의 자존심을 해치는 말로 구분하여 2시간 동안 휴식도 없이 열강을 해서 청중으로부터 큰 손뼉을 받았다. 이윤옥 소장은 요즈음 인기 있는 영화 “명량” 얘기를 하면서 흔히 이순신 장군을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오는 17일은 고종임금이 1897년(고종 34)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쓰기 시작한 날입니다. 연호란 새로 임금이 즉위한 해를 시작으로 햇수를 세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한무제 때 처음으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은 중국의 연호를 따라 썼었는데 1895년 11월 17일 갑오개혁 때 처음 건양(建陽)이란 연호를 썼지만 이는 일본 제국주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새로 쓰기 시작하여 순종(純宗)이 임금 자리에 오를 때까지 연호였던 광무(光武)는 고종 임금의 자주적인 뜻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고종은 같은 해 10월 12일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로 올라 자주독립국가임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제후가 입는 붉은색 곤룡포를 황제가 입는 황금색 곤룡포로 바꿉니다. 따라서 광무라는 연호는 대한제국 선포, 황금색 곤룡포와 함께 중국의 종속국가가 아닌 자주독립국가임을 만천하에 알린 것입니다. 드디어 새 임금이 등극하거나 중요한 사항을 모두 중국의 황제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던 관계를 청산하게 된 것이지요. ▲ 광무(光武) 4년(1900) 황성신문사에서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공동대표 윤미향(상임)・한국염・김선실, 이하 정대협)는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을 맞아 8월 14일(목) 오후 7시 서울역 광장에서 촛불문화제 나비야 촛불을 들자!를 한다.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은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공개 증언을 통해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고발한 날을 기억하고 그 용기와 투쟁을 기리기 위해 2012년 제11차 아시아연대회의에서 각국이 함께 결의한 이래 지난해부터 다양한 공동행동을 펼치며 연대해 왔다. 이번 촛불문화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대학생, 청년들의 모임인 평화나비와 희망나비가 함께 주관하며, 방송인 김제동씨의 사회로 가수 이한철과 조약골, 극단고래 등의 연대 공연과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연대한 단체와 시민들의 발언이 이어질 예정이다. 또한 일본군위안부 생존자 김복동 할머니가 직접 참석해 시민들을 향해 촛불을 함께 들자는 제안 발언을 진행하고, 평화와 인권을 위한 공동 결의를 선언문 발표 등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용기와 투쟁을 이어받고 함께하는 다채로운 순서로 펼쳐진다. ▲ (사진 최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소신은 천성이 본래 잔약하고 어리석어서 남에게 무엇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남들이 혹시 주는 것이 있으면 받아서 먹기도 하였으니 청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전하께서 너그러이 용납하시어 탐관오리를 면한 것만으로도 만족한데 사실과 달리 넘치는 이름을 얻고 보니, 이는 신이 하늘을 속이는 죄를 받을 뿐만 아니라 깨끗한 정사(政事)를 지향하는 전하께도 혹 누가 될는지 두려우며 몸 둘 바를 몰라 저도 모르게 이마에 땀이 맺히고 등에도 땀이 흐릅니다. 청백리의 이름을 지워주소서 이는 유배지나 다름없는 제주목사가 되어 갔다가 제주의 문제점들을 소상히 적어 올린 뒤 제주도 방어문제로 노심초사하던 임금으로부터 청백리로 인정받은 송강(松岡) 조사수(趙士秀, 1502 1558)가 한 말입니다. 이렇게 청백리로 인정받는 것에 대해 조재수가 사양하자 이에 명종은 청백리란 예부터 드문 것이다. 경의 행실은 온 조정이 잘 알기 때문에 천거한 것이니 사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의 안동 임청각에 있는 송강 조사수 글씨 조사수에 대한 일화는 이것만이 아니지요. 그는 출근하는 길 옆에 진복창의 집이 있었는데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古史不欲觀 옛 역사는 보고 싶지가 않네 觀之每병淚 볼 때마다 눈물이 흐르는 걸 君子必困厄 군자들은 반드시 고통을 당하고 小人多得志 소인들은 득세한 자들이 많으니. 垂成敗忽萌 성공할 즈음이면 문득 패망 싹트고 欲安危已至 편안해질 듯하면 이미 위태함 따라오네 從來三代下 삼대시대 이후로 오늘날까지 不見一日治 하루도 올바로 다스려진 적 없는데 生民亦何罪 백성들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 冥漠蒼天意 저 푸른 하늘 뜻 알 수가 없네. 旣往尙如此 지난 일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而況當時事 하물며 오늘날의 일이겠는가. 위 한시(漢詩)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17세기 후반 공납제도의 폐단을 혁파하기 위해, 대동법 실시를 주장했던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 ~ 1658)의 “옛 역사를 보면(觀史有感)”입니다. 시인은 소인들이 권세와 명예와 부를 차지하고 군자는 늘 고통을 면치 못하니 백성들이야 오죽 할까 생각하지요. 또 시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세상은 소인배들의 싸움터가 되어 버렸기에 사마천 이래 군자들은 늘 하늘의 뜻을 물었고, 시인 자신도 하늘의 뜻을 알 수가 없다고 탄식합니다. ▲ 김육(金堉, 1580 ~ 1658)의 초상, 대동법大同法의 시행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2백여 년이 지난 뒤에 송언신을 아뢰는 자가 있기에 어첩(200년 전 선조임금이 내린 어찰)을 가져와 읽어 보니 마치 운한(雲漢)이 밝은 빛을 내며 회전해서 찬란하게 문장을 이루어 상서로운 빛이 나와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다. (가운데 줄임) 듣건대 그의 집이 예부터 한강 남쪽에 있는데 매우 가난하여 어첩을 정성들여 걸어둘 곳이 없다 하므로 그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집을 지어주어 봉안(奉安)하게 하였고, 그에게 영양(榮襄)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이어 그 자손을 찾아서 그 고을에서 먹여주도록 하였다. 이는 정조실록 27권 13년(1789)) 6월 5일 기록입니다. ▲ 보물 제941-2호 송언신(宋言愼) 초상 송언신은 선조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예문관검열과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등을 지낸 인물로 언관으로서 서인을 공격하는 데에 앞장서는 바람에 여러 번 삭탈관직당하는 등 파란만장한 정치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러나 선조는 그를 몹시 신임하여 파직하라는 상소문도 여러 번 반려하는 등 송언신을 적극 두둔하였고 직접 어찰을 내리는 등 각별한 사랑을 쏟습니다. 한번은 함경감사 시절 어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사직을 요청하지만 선조임금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제주 성읍민속마을은 전통술인 오메기술을 맛볼 수 있는 곳입니다. 오메기란 좁쌀의 제주도 말로 논이 매우 귀한 이곳에서는 쌀로 술을 빚지 않고 밭곡식인 ‘조’로 술을 담급니다. 이를 오메기술이라 하지요. 제주에서는 밭벼라고 하는 '산디'를 심지만 수확량이 적어 흰쌀은 제사상에 올리는 곤밥(희고 곱다고 하여 곤밥이라고 함)을 지을 때 쓰기 때문에 예부터 오메기(조)로 술을 담가 먹었습니다. 조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부족한 쌀 대신 식량으로도 쓰고 술도 빚어 대소사에 접대용으로 쓰거나 제사나 차례상에 제주(祭酒)로 올립니다. ▲ 좁쌀로 빚는 제주 <오매기술>(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오메기술을 빚기 위해서는 먼저 좁쌀을 가루 내어 익반죽하고 도넛 모양으로 만드는데, 이를 ‘오메기떡’이라 합니다. 오메기떡은 끓는 물에 삶아 으깬 다음 누룩을 넣고 고루 섞은 뒤 떡 삶은 물을 식혀서 부어 60일 이상 발효시킵니다. 발효가 진행되면 위에 맑은 술만 걸러낸 것이 오메기청주이며 밑에 가라앉은 것을 떠내어 체에 밭친 것을 오메기술(막걸리, 탁배기)이라 하지요. 보통 40되들이 밑술을 담는데 메좁쌀 12되와 누룩을 만들 밀과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겨우 일어선 현대조선이 쓰러질 수도 있는 위기였다. 그러자 정주영은 다른 위기에서 그랬듯이 또 다시 역발상을 한다. 그까짓 거 만들어 놓은 배를 가져가지 않으면, 우리가 그 배로 직접 사업을 하자. 무수히 시련을 당했던 정주영. 그러나 그때마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톡톡 튀는 기발한 생각으로 헤쳐 나오던 그였다. 정주영은 1976년 3월 골칫거리였던 해약당한 초대형 유조선 3척으로 아세아상선을 설립해 해운업에 나섰다. 우리나라에 수입해 쓰는 기름을 우리가 우리 유조선으로 운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동안은 남의 나라 배로 기름을 실어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업이든지 그에게 호락호락한 것은 없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기름을 실어 날랐던 외국 선박회사들은 수송권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1400만 달러를 달라고 했다. 그야말로 칼만 안든 강도였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유조선이 없어 자기네 배를 돈 주고 빌려 썼지만 이제 배가 생겼는데 당연히 우리 배로 실어 날라야 하는 것 아닌가? 이제부턴 우리나라 배로 우리나라 기름을 운반해 쓸 것이므로 그에 다른 조건이 있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버티던 아세아상선은 결국 그들에게 돈 한 푼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상주 목사 정기룡(鄭起龍)은 인심을 얻었고 또 싸움도 잘하니 이제 당상(堂上)에 올리어 토포사(討捕使)로 삼아 적이 만약 다시 움직이면 상주 낙동강을 막아 지키거나 혹은 물러나 토기(兎機)를 지키게 해야 할 것이며, 왜적이 움직이기 전에 도내에 있는 토적을 잡는 것이 유익할 것 같습니다. 이에 선조임금은 그렇게 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이는 선조실록 54권, 27년(1594) 8월 21일 기록입니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국난을 이겨내는데 큰 공을 세운 매헌 정기룡(15621622) 장군은 1580년(선조 13) 경남 고성에서 향시에 합격하고, 1586년 무과에 급제합니다.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되어 있는 정기룡 장군의 설화에는 그가 이름을 기룡으로 바꾼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기룡이 과거 보러 갔을 때, 임금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임금의 꿈에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 임금이 신하를 불러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니, 정가(鄭哥)라는 사람이 막 과거에 급제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로 인해 이름을 정기룡으로 고쳤다.는 것입니다. ▲ 정기룡 장군이 상주목사를 제수받을 때 교지 ▲ 정기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五六월 또약볕에 살을 찌는 한 더위로 뭇인간은 어쩔 줄을 모르고 허덕이더니 오늘이 립추(立秋), 제 그러케 심하던 더위도 이제부터는 한거름 두거름 물러가게 되엇다. 언덕우 밤나무가지와 행길옆 느티나무위에선 가을을 노래하는 매암이 소래도 차(寒)가고 아침저녁 풀숲에는 이슬이 톡톡하게 나려 인제 먼 마을 아낙네의 옷 다듬는 소리도 들려올것이요. 삼가촌(三家村) 서당아해들의 글읽는 소리도 랑낭히 들려올 때다. 옛날부터 오늘로서 따밑에 잠겻든 궁음(窮陰, 겨울의 마지막)이 더위를 쫏고 올르는 날이라고 하고 또 가을은 서방금기(西方金氣, 가을 기운)라 숙살(肅殺, 쌀쌀한 가을 기운이 풀이나 나무를 말려 죽임)스런 기운이 대지에 흐른다 하며 (줄임) 오늘 아침쯤 그 어느집 우물가에 오동잎새가 떨어젓는지 정히 궁금하다." 위 글은 동아일보 1938년 8월 9일 “지하의 궁음(窮陰)이 나와 염제(炎帝,무더위)를 쫓는다” 기사인데 마지막 단락의 “어느집 우물가에 오동잎새가 떨어지는지 궁금하다”는 말이 참 정겹습니다. 오늘은 24절기의 열셋째 입추(立秋)지요. 이제 절기상으로는 가을철로 들어서며 입동(立冬) 전까지를 가을절기로 봅니다. 《고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