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까치에 수염이 있나요? 우리 들꽃에는 큰까치수염이라는 녀석이 있습니다. 68월 산길을 올라가다 보면 길 옆에 작은 별 모양의 하얀 꽃망울들을 꼬리 모양으로 터트리고 있는 꽃이 바로 요놈입니다. 여느 꽃들처럼 한번만 피고 지는 게 아니라 초여름부터 피고 지는 자리에는 열매를 맺으면서 계속 꽃을 피어 오래도록 꽃을 볼 수 있지요. 다른 이름으로는 큰꽃고리풀, 민까치수염, 홀아빗대 따위로도 불립니다. ▲ 그라마루의 허브와 초록이가 있는 풍경 블로그 제공 한국일본중국의 볕이 잘 드는 풀밭에서 자라고 줄기는 곧게 서며 크기는 높이 50~100cm 정도까지 큽니다. 잎은 어긋나고 긴 타원 모양으로 끝부분이 뾰족하며, 잎 표면엔 털이 있고 뒷면엔 털이 없습니다. 한방에서는 꽃 모두를 진주채(珍珠菜)라는 약재로 쓰는데, 생리불순대하이질인후염유방염타박상신경통에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비슷한 꽃 까치수염은 모양이 좀 달라 잎이 좁고 둥글지요. 큰까치수염은 등산로 주변을 수놓는 것으로 해마다 만나는 녀석이지만 볼 때마다 신기한 느낌이 듭니다. 어떤 이는 그늘진 수풀에 하얀 불을 켜 놓은 듯하다고 하지요. 가끔 꼬리처럼 생긴 꽃을 꺾어 턱에다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독하고 도도한 여성들을 아는가? 다음에 12만 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린 독하고 도도한 여성들이란 카페, 일명 독도카페(카페지기 샤넬) 회원들이 어제(7월 20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한복, 걷기 행사를 열었다. 이들은 한복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카페 활성화를 위해서 택한 것이 한복 자랑하기였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한복의 일상화란다. 한복이 국민들의 시선에서 멀어져 가고 있을 때 20~30대의 젊은 여성들이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 독하고 도도한 여성들 카페에서 준비한 한복을 입고 자랑을 하는 한 중국 여성 ▲ 한복을 입어보려는 시민들과 외국인들이 접수마당에 몰려 있다. 오늘족에는 보통날에도 사랑해주세요라는 펼침막을 세워놓고 한복의 생활화를 주문한다. 많은 사람들은 한복이 입기 불편하고 값이 비싸서 입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본 기모노는 한복에 견주면 훨씬 입기 어려운 옷임은 물론 값도 거의 10배가 넘는다. 그래도 일본 가정 대부분 그 비싼 기모노 몇 벌은 가지고 있으며 축제나 행사 때는 물론 평상시도 자주 입고 자랑스럽게 나들이를 한다. 그런 점에서 이제라도 우리의 한복에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조선시대에는 서양의 브리태니커사전 같은 여러 백과사전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은 홍봉한(洪鳳漢) 등이 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 따위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쓴 책은 1614년(광해군 6)에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說)》이지요. 그런데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徐有)가 쓴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도 여기서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 책은 113권 52책의 필사본인데 또 다른 이름으로 ≪임원십육지 林園十六志≫ 또는 ≪임원경제십육지 林園經濟十六志≫라고도 합니다. 책의 내용을 보면 주로 전원생활을 하는 선비에게 필요한 지식과 기술, 그리고 취미를 기르는 것들입니다. 특히 농업기상과 점성적인 천문관측, 가축과 야생동물 그리고 어류를 다룬 내용, 각종 음식조미료, 술을 빚는 방법이 있으며, 육아법과 계절에 따른 섭생법, 심지어는 260종의 구황식품(救荒食品, 흉년에 곡식 대신으로 먹는 먹거리)도 낱낱이 들어놓았습니다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에 의해 종묘제례와 함께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이 지난 17일 국립고궁박물관 앞에서 연주되었다. 이 연주는 국립국악원과 국립고궁박물관이 종묘의 유·무형적 가치를 새롭게 조명한 ‘종묘’ 특별전 개최를 기념하여, 특별전에 대한 전시해설과 악樂·가歌·무舞가 어우러진 종합예술인 종묘제례악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자리였다. ▲ 국립고궁박물관 앞에서 있었던 종묘제례악 연주 모습 조선은 좌묘우사(左廟右社)의 법도에 따라 주궁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단을 두었다. 그리고 해마다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나라의 가장 큰 일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종묘사직(宗廟社稷)’이란 말은 나라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특히 조선 왕실의 역대 임금과 왕비들의 위패를 모신 유교 사당인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 의식 곧 종묘제례는 나라의 아주 중요한 의식이었고, 이 제례에서는 장엄하면서도 절도 있는 음악과 함께 조상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춤을 추는 ‘종묘제례악’이 있어왔다. 공연은 먼저 국립국악원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오늘은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초복(初伏)입니다. 초복은 삼복의 첫날인데 하지 후 셋째 경일을 초복, 넷째 경일을 중복, 입추 후 첫 경일을 말복이라 하여, 이를 삼경일(三庚日) 혹은 삼복 이라 합니다. 복날은 열흘 간격으로 오기 때문에 초복과 말복까지는 20일이 걸립니다. 그러나 해에 따라서 중복과 말복 사이가 20일 간격이 되기도 하는데, 이를 월복(越伏)이라고 하지요. 삼복 기간은 한해 가운데 가장 더운 때로 이를 '삼복더위'라 하는데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더위를 이겨 내라는 뜻에서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빙표(氷票)를 주어 관의 장빙고에 가서 얼음을 타 가게 하였습니다. 복중에는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아이들과 부녀자들은 여름과일을 즐기고, 어른들은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산간계곡으로 들어가 탁족(濯足, 물에 발을 담그는 일)을 하면서 하루를 즐깁니다. 한편으로 바닷가에서는 백사장에서 모래찜질을 하고 복달임(복날에 고기 따위로 국을 끓여 먹는 풍속)을 하면서 더위를 이겨내기도 하였지요. ▲ 복날 여인들은 계곡에서 물맞이를 했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복날과 널리 퍼졌던 믿음으로는 “복날에 시내나 강에서 목욕을 하면 몸이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 이십 리 못 가서 불한당 만나고 삼십 리 못 가서 되돌아오누나 에헹 어야 어야 더야 내 사랑아 에헤” 위는 서도민요의 하나인 <사설난봉가> 일부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아리랑> 가사에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십리도 못가서 발명이 나는 것은 물론 한 술 더 떠서 이십 리 못 가서 불한당을 만나고 삼십 리 못 가서 돌아온다고 합니다. 아리랑은 그저 발병 나기를 바라는 정도지만 사설난봉가는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임이 떠나면 칼부림나기도 하지만, 우리 겨레는 원래 임이 떠나도 해코지를 하는 대신 그저 민요 한 자락 부르며 가슴 속에 쌓인 한을 날려 버립니다. ▲ 사설난봉가를 부르고 있는 서도민요 전수조교 유지숙 명창 그런데 사설난봉가의 해학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앞집 처녀가 시집을 가는데 뒷집 총각이 목매러 간다. 사람 죽는 건 아깝지 않으나 새끼 서발이 또 난봉 나누나.”라든가 “영감을 데리고 술장사 하자니 밤잠을 못자서 걱정이고 총각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출장연회 또는 출장뷔페는 요리, 음료, 식기, 식탁, 유리잔 따위 필요한 집기 비품들을 준비한 뒤 손님이 정한 곳으로 운반하여 손님이 만족할 만한 연회행사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출장연회라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시작한 곳은 명월관으로 보기도 합니다. 명월관(明月館)은 1909년 무렵 대한제국 말기 궁내부(宮內府)에 있으면서 궁중 요리를 하던 안순환이 현재의 서울 종구로 세종로에 문을 연 20세기 최초의 조선 요릿집이지요. 궁중 요리사가 운영하던 이 명월관은 조선후기 궁중잔치를 기록한 《진찬의궤(進饌儀軌)》에 나오는 음식들을 팔았기에 당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 요리들은 바로 숭어잉어조기도미 따위를 구워 푸성귀국수와 함께 끓인 승기악탕(勝妓樂湯, 원 이름 승기아탕)과 신선로(神仙爐)에 여러 물고기와 육고기 그리고 푸성귀를 넣어 끓인 신선로(원 이름 열구자탕-悅口子湯) 따위가 있었지요. ▲ 가곡성(歌曲聲) 높은 명월관(明月館)이라는 사진과 기사, 동아일보 1936년 1월 7일 그런데 명월관은 단체 회식은 물론이고, 회갑연과 혼례연까지 할 수 있었던 곳으로 조선음식을 팔던 첫 번째 전문음식점이라 할 만 합니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한복은 우리 겨레의 옷이면서도 이제 대다수 사람들의 외면으로 길에서 한복 입은 사람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복을 입은 사람을 보면 고무신을 신은 사람이 많지요. 마치 고무신이 우리의 전통신이나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한복 학계 최고 학자라는 분은 자신의 책에 요즘은 대개 고무신과 구두를 겸용하고 있지만, 한복에는 버선에다 고무신을 신는 것이 원칙이다.라고 해놓았습니다. 맞는 말일까요? ▲ 60~70년대 인기를 끌었던 타이야표 통고무신(왼쪽), 강철보다 더 질기다는 일제강점기 고무신 광고 일제강점기 직전까지 조선 사람은 짚신과 미투리를 주로 신었고, 양반층은 가죽으로 만든 갖신 곧 태사혜나 당혜를 신었지요. 하지만, 짚신이나 미투리는 거칠 뿐만 아니라 불편했으며, 비가 올 때 신는 나막신도 두꺼운 버선을 신지 않으면 발이 아파 멀리 갈 수 없었습니다. 이런 조선 사람에게 들어온 1910년대 말 고무신이 들어왔습니다. 고무신은 호모화(護謨靴)라고 했는데 호모의 일본식 발음이 고무였던 것입니다. 고무신은 짚신 다섯 켤레 값을 치러야 겨우 한 켤레 살 수 있을 만큼 비쌌지만 착용감이 좋고 경제적인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거친 밭 쓸쓸한 언덕에 寂寞荒田側 흐드러진 한 송이 꽃 가지를 눌렀네 繁花壓柔枝 매화비 그쳐 향기 날리고 香經梅雨歇 보리바람에 그림자 흔들리네 影帶麥風欹 수레 탄 사람 누가 보아주리 車馬誰見賞 벌 나비만 부질없이 찾아드네 蜂蝶徒相窺 천한 땅에 태어난 것 스스로 부끄러워 自慙生地賤 사람들에게 버림받아도 참고 견디네 堪恨人棄遺 위는 신라 후기 학자이며 문장가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촉규화(蜀葵花, 접시꽃)”란 한시(漢詩)입니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살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이 되도록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에 18살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습니다. ▲ 삼국사기 옥산서원본 가운데 최치원 부분. (출처 : 국사출판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그러나 토황소격(討黃巢檄)>이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학문도 뛰어난 최치원은 별로 대접받지 못하지요. 그런 자신의 처지를 "매화비 곧 장마가 그쳐 향기 날리지만 보리바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독일의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 정식 이름이 라이히스 아우토반(Reichs Autobahn)이지만 우리는 흔히 아우토반(Autobahn)이라고 부른다. 도로의 너비는 18.520m이고, 길 가운데는 3.55m 너비의 중앙분리대가 있다. 1932년 쾰른과 본 사이를 왕래하는 최초의 아우토반이 완공됐는데 오늘날에는 총연장 1만1000㎞에 이르며 독일 땅의 대부분에 미치고 있다. 제한 속도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의 하나이지만, 위험지역에서는 100㎞ 또는 130㎞의 제한속도 표지가 붙는 경우도 있다. 지난 2006년 월드컵 직전 공연단 취재차 가봤던 독일, 일반도로에서는 철저히 제한속도를 지키며 다니던 자동차들은 아우토반에만 들어서면 대부분 시속 200㎞로 달렸다. 빨라야 110㎞를 달리던 한국에서 200㎞를 달리니 오금이 저리기도 했지만, 짜릿한 쾌감도 순간 느꼈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을 방문했고, 이 아우토반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본에서 쾰른으로 가는 20㎞ 구간의 아우토반을 지나가면서 박 대통령은 두 차례나 차를 멈추고 독일 관계자들에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한다. 어떻게 고속도로를 건설했고, 공사비용은 얼마나